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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전쟁 개요
- 포클랜드 전쟁은 1982년 4월 2일에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전쟁이다.
- 이 전쟁은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군사적 충돌로, 두 나라의 주권 문제가 핵심 쟁점이었다.
- 전쟁의 발발은 국제 정치와 군사 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의 군사 작전에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하였다.
- 포클랜드 전쟁은 냉전 시대의 군사적 긴장 속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군사적 개입의 필요성과 그 결과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였다.
현대 해전의 사례
- 포클랜드 전쟁은 21세기 현대까지도 미사일 시대를 대표하는 해전의 교과서적 사례로 평가된다.
- 이 전쟁은 현대 해전의 전술과 전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 특히, 공중전과 해상전의 조화로운 운영이 두드러지며, 이는 현대 군사 작전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다.
- 포클랜드 전쟁의 사례는 군사 훈련과 전략 개발에 있어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정규군 해전의 변화
- 포클랜드 전쟁 이후, 정규군 해군 간의 대규모 해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 이는 군사 전술의 변화와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음을 시사한다.
- 현대의 군사 작전은 비대칭 전쟁과 소규모 충돌로 전환되었으며, 이는 전통적인 해전의 개념을 변화시켰다.
- 이러한 변화는 군사 자원의 배치와 전략적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비핵보유국의 선제공격
- 포클랜드 전쟁은 4차 중동전쟁과 함께 비핵보유국이 핵보유국을 상대로 선제공격을 한 전쟁으로도 평가된다.
- 이는 국제 관계에서의 군사적 불균형과 전략적 선택의 복잡성을 드러낸다.
- 비핵보유국의 선제공격은 군사적 억제력과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 이러한 사례는 국제 정치에서의 군사적 결정과 외교적 대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 역사
- 포클랜드 제도는 영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지역이다.
- 아르헨티나는 1950년대부터 영유권을 주장해왔다.
- 이로 인해 1960년대와 70년대에 여러 차례 영유권 협상이 있었으나,
- 영국 측의 거부와
- 지역 주민들의 아르헨티나 귀속 반대 여론으로 인해 모두 결렬되었다.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의 경제 정책
- 1976년 쿠데타로 세워진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 오일 쇼크로 인한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자본과 외채를 대규모로 도입하였다.
- 그러나 1980년 금리 인상으로 이자율이 급상승하였고,
- 기업 채무를 국가에서 갚도록 하는 정책을 펴면서 재정난이 심각해졌다.
경제 위기와 사회적 불만
- 아르헨티나 정부는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 재정지출을 대폭 줄이는 정책을 도입하였다.
- 이로 인해 외채는 더욱 증가하였고,
- 사회 복지 정책의 실종으로 빈부격차가 심화되었다.
국민의 관심 전환 전략
- 심각하게 악화된 경제 상황 때문에 국민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 이를 위해 1978년 월드컵을 개최하고,
- 자국 팀을 우승시키기 위한 무리수를 두었다.
전쟁의 배경과 군사적 계산
- 당시 아르헨티나 군부는 내부적 불만을 외부의 적으로 돌려 단결을 꾀하자는 안을 제시하였다.
- 브라질, 칠레 등 주변 남미 국가들이 거론되었으나,
- 최종적으로 포클랜드 제도의 영국군이 대상이 되었다.
- 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의 앞마당과 같았으며,
- 영국 본토는 지구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다.
아르헨티나 군의 군사력
- 아르헨티나군은 전쟁 당시 군 현대화를 거쳤으며,
- 프랑스에서 수입한 쉬페르 에탕다르와 엑조세 대함미사일 등을 장비하고 있었다.
- 또한, 미국산 CH-47 치누크, 독일제 209급 잠수함, 소련제 스트렐라 지대공 미사일 등 다양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 이러한 군사력은 아르헨티나군의 자부심을 높였을 것이다.
영국의 군사적 약점
- 영국은 1970년대에 미국과 소련의 양강 구도에서 밀려난 한물 간 나라로 여겨졌다.
- 제2차 중동전쟁에서 굴욕을 당한 경험이 있으며,
- 더 이상 옛날의 대영제국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 영국 해군의 마지막 정규 항공모함인 오데이셔스급 아크로열이 퇴역하여
- 유사시 장거리 항공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워졌다.
전쟁 발발의 복합적 요인
- 여러 개전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포클랜드 제도는 본국으로 통하는 항공편이 없었고,
- 의료 서비스조차 본국이 아닌 아르헨티나에 의존해야 했다.
포클랜드 영유권 분쟁의 배경
- 정기적인 회담: 아르헨티나와 영국은 포클랜드의 영유권 문제를 주제로 정기적인 회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 회담 종료: 1982년 2월 27일의 회담을 마지막으로, 3월 1일 아르헨티나는 영국에 **'영유권 문제 해결 의사가 없다면 교섭을 중단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향후 모든 수단을 취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 영국의 예측 부족: 아르헨티나의 성명에 대해 영국은 그 '수단'이 포클랜드 무력 점령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아르헨티나의 강경한 입장
- 강경한 태도: 아르헨티나는 영유권 문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며, 이는 군부 정권의 정치적 필요와 관련이 있다.
- 교섭 중단: 아르헨티나의 성명은 교섭 중단을 의미하며, 이는 양국 간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 국내 여론: 아르헨티나의 군부는 국내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해 강경한 조치를 취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고철 수집상의 포클랜드 침입
- 콘스탄티노 다비도프: 1982년 3월 19일, 아르헨티나의 고철 수집상인 콘스탄티노 다비도프가 포클랜드 제도로 들어왔다.
- 불법 상륙: 이들은 마땅한 해상편이 없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 해군 수송함에 탑승하여 아르헨티나 국기를 게양한 채 사우스조지아 섬에 도착하였다.
- 입국 절차 문제: 이들은 영국 정부로부터 방치된 포경 공장의 해체권을 주장했으나, 입국 절차에 문제가 있어 불법 상륙으로 간주되었다.
영국의 반응과 갈등의 시작
- 영국의 발견: 아르헨티나 국기를 게양한 상황에서 상륙한 이들을 영국의 남극관측대원이 발견하고 항의하였다.
- 상황 악화: 이로 인해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었으며, 아르헨티나의 민간 시설이 공격받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 강경한 주민 반응: 강경한 주민들이 아르헨티나의 민간 시설을 공격하고 "대영제국 만세", "까불면 코피 터질 줄 알아라!" 같은 낙서를 남겼다.
아르헨티나 군의 전쟁 준비
- 전쟁 준비: 당시 아르헨티나는 해군참모총장 호르헤 이사악 아나야 제독을 중심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 개전 시점: 아르헨티나는 개전 시점을 8~9월로 잡고 있었으나, 예상보다 빠른 전개에 당황하였다.
- 전략적 계산: 아르헨티나는 영국의 군함 퇴역과 남반구의 겨울 날씨를 고려하여 전략적으로 개전 시점을 조정하고 있었다.
경제난과 군부의 침공 결정
- 경제난 심화: 3~4월에 아르헨티나에서 경제난이 심화되었고,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었다.
- 군부의 결정: 다급해진 군부 정권은 국내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해 침공을 서둘렀다.
- 정치적 필요성: 군부는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전쟁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이는 국가의 안정과 정권 유지와 관련이 있다.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침공 시작
- 침공 시작일: 4월 2일
- 참여 군대: 아르헨티나 해병대 및 특수부대 소속의 지상군 4,000명
- 지원군: 해군의 지원을 받음
- 전쟁의 시작: 포클랜드 제도를 기습 침공하면서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임.
영국군의 미미한 저항
- 영국군의 규모: 현장에 있는 영국군은 고작 100여명의 해병대 코만도로 구성됨.
- 충돌의 결과: 아르헨티나군과의 미미한 충돌 후, 영국군은 즉시 항복함.
- 항복의 이유: 아르헨티나군의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인해 저항이 불가능했음.
포로의 굴욕적인 상황
- 포로 상황: 포로로 잡힌 해병들의 굴욕적인 사진이 영국인들의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침.
- 사진의 내용: 포로들은 범죄자처럼 엎드리게 해놓은 상태로 촬영됨.
- 여론의 반응: 이러한 사진은 영국 내에서 큰 논란을 일으키고, 여론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음.
총독 렉스 헌트의 항복
- 총독의 지시: 렉스 헌트 경은 영국군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지시를 내림.
- 아르헨티나 사령관에게 요구: 영국 영토를 무단으로 침입하고 있으니 즉각 퇴거할 것을 요구함.
- 체포 및 추방: 아르헨티나 군대는 헌트 경을 체포하여 우루과이로 추방함.
헌트 경의 복귀
- 전쟁 종료 후: 헌트 경은 포클랜드 전쟁이 끝난 후에 다시 총독으로 부임함.
- 복귀의 의미: 그의 복귀는 전쟁의 결과와 영국의 입장을 반영하는 중요한 사건임.
아르헨티나의 전략적 계산
- 전략적 판단: 아르헨티나는 무력으로 강경하게 실효점유를 시작하면 영국이 협상에 임할 것이라고 생각함.
- 영국의 반응 예측: 영국이 포클랜드를 수복하기 위해 재정적 소모를 감수하기보다는 협상에 나설 것이라는 판단을 내림.
국제사회의 예측
- 국제사회의 관측: 국제사회에서도 영국이 외교적인 항의 정도만 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음.
- 전반적인 반응: 이러한 예측은 아르헨티나의 침공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을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임.
영국의 각료들의 전쟁 반응
- 회의 분위기: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열린 회의에서 일부 각료들은 아르헨티나와의 ‘협상’을 원했다.
- 국방장관의 입장: 심지어 국방장관조차 전쟁을 원치 않았고, 사직하겠다고 밝혔다.
- 미국의 태도: 영국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인 미국 역시 전쟁을 바라지 않았다.
- 당시 미국은 남미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여러 독재 정권들을 보호하고 있었으며, 아르헨티나의 군사 정권도 그 중 하나였다.
- 대처 총리의 반응: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대처 총리에게 직접 전화를 해 전쟁을 만류했으나, 대처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 인용: "다음에 미국이 알래스카를 침공당하거든 내가 그대로 말해주리다."
미국의 중재 노력
- 미국의 외교적 입장: 미국은 아르헨티나의 군사 정권을 지원하고 있었으며, 자국의 동맹과 또 다른 동맹이 싸우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 전쟁 회피의 필요성: 미국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영국의 강경한 입장으로 인해 상황은 복잡해졌다.
- 전략적 고려: 미국은 남미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아르헨티나의 군사 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영국 해군의 강경 입장
- 해군참모총장의 입장: 영국 해군참모총장 헨리 리치 제독은 “반드시 탈환해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 경고의 내용: 리치는 “우리가 질질 끌며 조심조심하다 보면, 몇 달 내에 우리는 우리 말이 안 먹히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 군사적 긴장: 해군의 강경한 입장은 영국 정부의 전반적인 군사적 긴장감을 반영하고 있다.
마거릿 대처의 결단
- 대처 총리의 성향: 당시 영국 총리는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마거릿 대처였다. 그녀는 보수당의 매파로 강경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 영토 방어의 의지: 대처는 자국의 영토가 잠식되고 대외 영향력이 침해당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 군에 명령: 즉시 포클랜드를 탈환할 것을 군에 명령하였다.
영국 국민의 분노와 반응
- 국민의 감정: 아르헨티나의 일방적인 침공으로 자국 군인들이 굴욕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소식에 영국 국민들은 분노하였다.
- 전국적인 반응: 결국 영국 전역이 아르헨티나를 응징하자고 부르짖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 경제적 위기: 당시 영국은 경제난과 내적 혼란이라는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으며, 영토 손실이 국민 정서와 국가 안정성에 미치는 영향이 우려되었다.
포클랜드 제도의 지정학적 중요성
- 지정학적 위치: 포클랜드 제도와 사우스 조지아 섬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 남극 탐사 경로: 남극 탐사는 보통 칠레를 통해 접근하는데, 이 두 섬은 남미의 협조 없이도 남극 탐사를 가능하게 해준다.
- 전략적 가치: 이 섬들은 영국의 군사적 및 경제적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해협 통제의 전략적 가치
- 드레이크 해협의 중요성: 영국은 이 섬들 덕분에 칠레나 아르헨티나처럼 드레이크 해협을 오가는 선박들을 통제할 수 있다.
- 대체 항로의 가치: 드레이크 해협은 파나마 운하가 차단될 경우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대체 항로의 가치를 지닌다.
- 역사적 사례: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 동양함대가 영국 함대를 격파한 사건이 포클랜드 해전으로 이어졌다.
포클랜드 전쟁의 역사적 배경
- 전쟁의 발단: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중국 산동 반도에 배치된 독일 동양함대가 본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태평양을 횡단하였다.
- 영국의 군사적 대응: 영국은 순양전함 2척을 포클랜드로 급파하였고, 결국 포클랜드 해전에서 독일 함대를 격파하였다.
- 군사적 역사: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포클랜드 전쟁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포클랜드의 석유 자원 개발
- 자원 개발의 중요성: 1970년대 이후로 개발하고 있는 포클랜드 인근의 석유 자원은 영국에게 중요한 경제적 이익을 제공할 수 있다.
- 전략적 자원: 석유 자원은 영국의 군사적 및 경제적 전략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영국의 강경 대응 이유
- 침공의 선례: 포클랜드 침공을 그대로 놔두면, 각 지역에 가시처럼 알박아놓은 섬들을 상대 국가들이 무력으로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선례가 될 것이다.
- 강경 대응의 필요성: 영국 입장에서는 강경 대응할 이유가 충분하였으며, 이는 국가의 안전과 영토 방어를 위한 필수적인 조치로 여겨졌다.
대처의 전쟁 선택
- 협상에 대한 오해: 레오폴도 갈티에리는 영국 측에서 협상을 청하여 자신에게 설설 길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마거릿 대처의 선택은 전쟁뿐이었다.
- 전쟁의 불가피성: 대처는 상황을 고려할 때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였다.
전쟁 발발과 영국의 결정
- 대처 총리의 개전 결정: 대처 총리는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을 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 외교관계 단절: 영국은 아르헨티나와의 외교관계를 즉시 단절하였다.
- 전쟁 승인: 상원과 하원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전쟁이 승인되었다.
- 작전 명칭: 포클랜드 탈환작전은 "코퍼레이트 작전(Operation Corporate)"으로 명명되었다.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군사력 비교
- 영국군의 회의적 반응: 영국군 내에서도 원정 거리 등의 이유로 전쟁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이 있었다.
- 아르헨티나 공군의 전력: 1982년 당시 아르헨티나 공군은 미라주 III 전투기 20대, 전폭기 30대, A-4 스카이호크 공격기 60대를 포함하여 약 200여 대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 해군의 현대적 전력 부족: 아르헨티나 해군은 현대적인 전력을 갖추지 못했으나, 영국 기동부대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 영국 해군의 전투기 부족: 영국 해군은 경항공모함 두 척에서 발진하는 시해리어 수직이착륙 전투기 20여 대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 해군의 전투기 부족
- 전투기 수의 한계: 영국 해군은 아르헨티나군의 공습에서 상륙부대를 보호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
- F-4 팬텀 II와 중형 항모: 중형 항모 아크 로열이 있었더라면 아르헨티나 공군의 위협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이 있었다.
- 아크 로열의 퇴역: 1979년 아크 로열의 퇴역으로 인해 영국의 함재기 대다수가 일선에서 물러나 아르헨티나가 영국을 우습게 보기 시작한 것이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 대처 총리의 위기감: 대처 총리는 전쟁 개시 시 여러 척의 호위함정과 경항모의 손실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다.
전쟁 준비와 외교적 노력
- 철저한 준비 필요성: 대규모 원정을 위해 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 정치적 목적: "정치적인 목적에서라도 포클랜드 탈환은 필요하며, 할 수 있다"는 제1해군경 헨리 리치 대장의 조언이 있었다.
- 전투함 동원: 본토와 지브롤터에 있는 전투함을 모두 동원하고 상선까지 징발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 단기전의 전략적 유리성: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점령이 길어질수록 불리해질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국제 사회의 지지 확보
- 외교전 전개: 대처 총리는 국제 사회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외교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 UN 안보리 결의안: 아르헨티나의 침공 다음날, UN 안보리에서 아르헨티나를 침략자로 규정하며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 유럽 국가들의 수출 금지 조치: 유럽 국가들에게 대(對) 아르헨티나 수출 금지 조치를 유도하였다.
- 미국의 지지 확보: 대처 총리는 미국의 지지를 얻어냈으며, 이는 아르헨티나와 영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미국의 중재와 아르헨티나의 반응
- 미국의 동맹 관계: 미국은 영국과 아르헨티나 모두와 동맹이었으며, 갈등이 전쟁으로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 알렉산더 메이그스 헤이그 2세의 중재: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알렉산더 메이그스 헤이그 2세가 중재를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런던을 오갔다.
- 중재안의 무산: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중재안인 '아르헨티나군이 철수한 후, 포클랜드 현지 주민들의 주민 투표로 귀속 국가를 결정한다'는 제안을 거부하였다.
- 국민의 반응 우려: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철수 시 국민들이 외압에 굴복하는 것으로 여길까 우려하였다.
전쟁의 정당성과 국제적 반응
- 아르헨티나의 침략 행위: 아르헨티나의 행동은 명백한 침략 행위로 간주되었다.
- 국제 사회의 지원: 아르헨티나의 침략 행위로 인해 영국은 국제 사회의 지원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 남미계 원주민의 거주지 아님: 포클랜드는 원래 남미계 원주민들이 사는 섬이 아니었으며, 아르헨티나의 무단 점령은 정당성을 결여하였다.
- 영국의 동조: 제2차 중동전쟁과 같은 구린 구석이 없었기에 모든 국가가 영국에 동조하였다.
원정의 시작과 군사 행동
- 원정의 거리: 북대서양의 영국에서 남대서양의 포클랜드까지의 원정은 거의 지구 반바퀴를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 모든 선박과 항공기 동원: 4월 중순에서 하순에 걸쳐 긁어모을 수 있는 모든 선박과 항공기가 동원되었다.
- 호화 여객선의 징발: RMS 퀸 엘리자베스 2와 같은 호화 여객선까지 징발하여 병력을 수송하였다.
- 군사 행동의 시작: 1956년 수에즈 전쟁 이후 오랜만에 본격적인 군사 행동에 나선 것이다.
영국군 편제 개요
- 제3코만도여단 상륙 이전: 영국군의 편제와 관련된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다.
- 기동부대 및 전대: 다양한 기동부대와 전대의 명칭이 언급되며, 이들은 전투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제317기동부대: Task Force 317
- 제317.0기동전대: Task Group 317.0
- 제317.1기동전대: Task Group 317.1
- 제317.8기동전대: Task Group 317.8
- 제317.9기동전대: Task Group 317.9
- 제324.3기동전대: Task Group 324.3
기동부대 및 전대 구성
- 상륙 이후의 영국군 편제: 제5보병여단의 상륙 이후 영국군의 편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설명한다.
- 기동부대의 재편성: 상륙 작전 이후에도 기동부대와 전대의 역할이 지속적으로 중요함을 강조한다.
- 전투 준비 상태: 각 기동부대는 전투 준비 상태를 유지하며, 작전 수행을 위한 훈련과 전략을 수립한다.
영국 지상군 및 해군
- 영국 지상군: 영국의 지상군 편제와 그 역할에 대한 설명이 포함된다.
- 영국 해군: 해군의 작전 및 지원 역할이 강조된다.
- 전략적 협력: 지상군과 해군 간의 협력 관계가 전투에서의 성공에 기여함을 나타낸다.
영국 공군의 역할
- 영국 공군: 공군의 작전 및 지원 역할에 대한 설명이 포함된다.
- 항공 지원: 공군은 지상군과 해군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항공 작전을 수행한다.
- 전략적 중요성: 공군의 역할은 전투의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양국의 전략적 차이
- 전략적 접근의 차이: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전략적 접근 방식의 차이를 설명한다.
- 아르헨티나의 전략: 아르헨티나 대통령 레오폴도 갈티에리의 전쟁 전략이 언급된다.
- 승리의 기대: 갈티에리는 승리할 경우 국가 영웅이 될 것이라 기대하였다.
- 언론 통제: 패배하더라도 언론을 통제하여 국민을 속일 계획을 세웠다.
- 영국의 현실적 접근: 영국은 전쟁을 진행하면서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아르헨티나의 전쟁 전략
- 갈티에리의 기대: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의 이점을 강조하였다.
- 언론 통제 계획: 패배하더라도 언론을 통해 국민을 속일 계획을 세웠다.
- 외교적 무관심: 아르헨티나는 전쟁의 여파가 외교에 미칠 악영향을 고려하지 않았다.
영국의 외교적 대응
- 대처 총리의 외교 노력: 마가렛 대처 총리는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설득하기 위해 직접 방문하였다.
- 전쟁의 정당성 설명: 대처는 영국의 상황과 전쟁의 정당성을 설명하며 피노체트를 설득하였다.
- 영공 배치 허락: 피노체트로부터 칠레 영공에 영국 항공기를 배치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대처의 외교적 노력
- 우방국 설득: 대처는 미국을 포함한 우방국들을 돌며 아르헨티나의 기습 침공을 강조하였다.
- 국제 사회의 반응: 주요 국가들은 영국 편을 들거나 중립을 지키게 되었다.
- 아르헨티나의 고립: 최소한 아르헨티나 편을 들지 않도록 국제 사회의 반응이 형성되었다.
패러켓 작전 개시
- 영국군의 반격 개시: 4월 말에 영국군이 반격을 개시하였다.
- 작전 명칭: 이 작전은 "패러켓 작전(Operation Paraquet)"으로 명명되었으며, 사우스조지아 섬 탈환이 목표였다.
- 군사적 의미: 군사적 의미는 크지 않지만, 상징적 의미에서 중요한 임무로 결정되었다.
- SAS의 정찰 계획: 본격적인 작전 개시 전, SAS를 파견하여 아르헨티나군의 규모를 정찰할 계획이 수립되었다.
SAS의 초기 작전과 실패
- 정찰 방법: SAS 대원들은 해군 대잠용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포투나 빙하에 상륙할 계획이었다.
- 아르헨티나군의 예측: 이 작전의 이유는 아르헨티나군이 빙하를 가로질러 침투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조종사들의 반응: 해군 조종사들은 작전 내용을 듣고 비아냥거림을 보였으며, "차라리 폴라리스 미사일을 날리는 게 더 빠를걸요"라고 말했다.
- 작전 실패: SAS 대원들은 4월 21일에 빙하에 도착했으나, 악천후로 인해 22일에 임무를 포기하고 귀환을 요청하였다.
헬리콥터 사고와 구조 작전
- 헬리콥터 손실: 귀환 헬리콥터 중 2기가 악천후로 인해 눈밭에서 굴러 손실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 구조의 필요성: SAS 대원들과 승무원들이 밤새 얼어죽을 위험에 처하였기 때문에 구조가 필요하였다.
- 이언 스탠리 소령의 활약: 유일하게 남은 웨식스 대잠헬기 조종사인 이언 스탠리 소령이 영웅적인 활약을 펼쳤다.
- 세 번의 시도 끝에 날이 저물기 직전 포투나에 착륙하였다.
- 제한 중량을 1,000kg 초과하여 모든 대원들을 태우고 귀환에 성공하였다.
- 수훈장 수여: 스탠리 소령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전후 수훈장(DSO)**을 받았다.
영국군의 재침투와 관측소 설치
- 재침투 작전: 하루 뒤, SAS와 SBS는 보트를 타고 다시 사우스조지아 섬에 침투하였다.
- 관측소 설치: 이번에는 아르헨티나군이 주둔 중인 리스 인근에 관측소를 설치하였다.
- 아르헨티나군의 규모: 관측된 아르헨티나 수비대는 소규모로, 탈환작전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 잠수함의 위협: 영국군은 아르헨티나 해군의 구형 발라오급 잠수함 산타페가 사우스조지아로 향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산타페 잠수함의 위협
- 산타페의 동향 추적: 영국 해군은 산타페의 동향을 추적하기로 결정하고, 작전을 연기하였다.
- 입항 가능성 판단: 모든 정보를 취합한 결과, 산타페가 아르헨티나군이 주둔 중인 그리트비켄이나 리스 중 하나로 입항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 헬기 수색 작전: 24일부터 그리트비켄을 헬기로 샅샅이 훑기 시작하였다.
- 잠수함 포착: 25일 아침, 웨식스 헬기의 레이더로 잠수함을 포착한 이언 스탠리 소령은 폭뢰공격을 가하였다.
산타페 공격과 영국군의 승리
- 산타페의 피해: 폭뢰공격으로 산타페의 밸러스트 탱크가 모두 파괴되어 잠항능력을 상실하였다.
- 영국군의 공격: 영국군 헬기들이 기관총탄과 대전차미사일을 날려대며 산타페를 공격하였다.
- 좌초 사건: 산타페는 최후의 수단으로 그리트비켄 항구로 돌진하여 해안에 좌초하였다.
- 항복: 영국 해병대와 특수부대가 함포사격을 등에 업고 그리트비켄으로 쫓아오자, 산타페의 수비대원들은 항복하였다.
사우스조지아 섬 탈환
- 항복 문서 서명: 317.9 전단 지휘관 브라이언 영 대령은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다.
- 영국 국기 게양: "사우스 조지아의 그리트비켄에 영국 국기와 해군기가 펄럭이고 있음을 여왕폐하께 아룁니다."라는 전문을 본국에 보내 낭보를 알렸다.
- 리스의 항복: 다음날, 리스의 아르헨티나군이 교전 없이 항복하면서 아르헨티나군의 짧았던 사우스조지아 지배는 영국군의 무혈점령으로 끝났다.
블랙 벅 작전의 시작
- 전쟁의 시작: 본격적인 전쟁은 5월 1일에 시작되었다.
- 작전 목표: 이날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의 비행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활주로에 폭격을 가하는 "블랙 벅 작전(Operation Black Buck)"을 시행하였다.
- 작전 단계:
- 1단계: 아브로 벌컨 폭격기가 동원되었다.
- 2단계: 함재기 시해리어가 동원되었다.
- 3단계: 함포사격이 대미를 장식하였다.
- 장거리 비행 기록: 대서양 어센션 섬에서 발진한 벌컨 폭격기가 왕복 7천km를 날아갔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블랙 벅 작전의 전투 결과
- 폭격 목표: 블랙벅 작전의 구체적인 목표는 활주로 중앙을 폭격하여 일시적으로 파괴하는 것이었다.
- 명중률 계획: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폭격 코스를 활주로와 비스듬한 방향으로 잡았다.
- 폭탄 투하 결과: 투하한 폭탄들은 대부분 빗나가거나 활주로 가장자리에 떨어졌지만, 1발이 명중하였다.
- 아르헨티나군의 심리적 영향: 블랙벅 작전은 아르헨티나군의 심리를 강타하여, 아르헨티나군이 미라주 III 전투기들을 본토 방공 임무로 전환하게 만들었다.
원자력 잠수함과 해상 교전
- 날짜 및 사건: 1982년 5월 2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초의 극적인 해상 교전이 발생하였다.
- 주요 군함: 영국 해군의 HMS 컨커러가 아르헨티나 해군의 헤네랄 벨그라노를 Mk 8 어뢰로 격침하였다.
- 교전의 중요성: 이 사건은 원자력 잠수함의 실전 격침 첫 사례로 기록되며, 이후의 해상 전투에 큰 영향을 미쳤다.
HMS 컨커러의 배경
- 함선 정보: HMS 컨커러는 처칠급 원자력 잠수함의 3번함으로, 1969년 진수되고 1971년 취역하였다.
- 기능 및 역할: 이 잠수함은 영국 해군의 중요한 공격 원잠으로, 해상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헤네랄 벨그라노의 역사
- 함선 정보: 헤네랄 벨그라노는 미국의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USS 피닉스(CL-46)**에서 파생된 군함이다.
- 전후 배경: 이 군함은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국과 남미 국가 간의 상호 방어 지원 프로그램에 따라 아르헨티나 해군에 인도되었다.
교전 전개와 전략적 상황
- 발견 및 추적: HMS 컨커러는 1982년 4월 30일 포클랜드 섬 남서쪽 바다에서 헤네랄 벨그라노를 발견하고 조용히 추적하였다.
- 위험 요소: 당시 아르헨티나의 유일한 항공모함인 베인티싱코 데 마요가 포클랜드 섬 북쪽에서 접근하고 있었으므로, 영국 함대는 남북으로 협공당할 위험이 있었다.
- 기상 문제: 아르헨티나 항공모함은 기상 문제로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하였고, 이로 인해 헤네랄 벨그라노도 공격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우드워드 제독의 명령
- 명령 발신: GMT 5월 2일 0710시경, 우드워드 제독은 영국 본토의 잠수함사령부를 무시하고 **"발신 317.8기동전대 사령관, 수신 컨커러, 긴급 – 벨그라노 전단을 공격하라."**라는 전문을 통신위성에 업로드하였다.
- 명령 삭제: 해군본부는 이 명령이 월권행위임을 인지하고 즉각 전문을 삭제하였으나, 우드워드 제독의 의도를 파악하였다.
벨그라노의 격침과 결과
- 격침 시점: 컨커러는 GMT 17:00시에 잠망경 심도로 부상하여 변경된 교전수칙을 수신한 후, 5월 2일 오후 6시경 헤네랄 벨그라노에 어뢰를 발사하였다.
- 격침 결과: 헤네랄 벨그라노는 두 발의 어뢰에 피격되어 20분 만에 침몰하였고, 323명의 승조원이 전사하였다.
- 구조 작전: 침몰 당시 기상 악화로 인해 구조 신호를 받지 못한 호위 구축함들이 있었다.
벨그라노의 역사적 의의
- 해군 전력의 변화: 아르헨티나 해군의 대부분이 포클랜드 해역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영국은 제해권과 제공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 전투의 결과: 이 사건으로 인해 영국은 포클랜드 섬을 공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아르헨티나군은 영국 해군에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정치적 논란과 여파
- 논란의 시작: 영국 정부의 결정은 정치적 논란을 일으켰으며, Tam Dalyell 의원은 공격이 의도적으로 사태를 확전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대처 총리의 반응: 마거릿 대처 총리는 공격 명령에 대한 비난에 대해 **"우리 해군 애들을 지키기 위해서 함대에 위협이 되는 적함을 격침시켰다고 총리가 비난을 받는 나라는 영국뿐일 것 같다."**고 반박하였다.
결론과 후속 논의
- 논쟁의 종결: 벨그라노 격침은 현장 지휘관의 의사와 총리의 군사 조언가의 권고를 수용한 결과로, 아르헨티나 정부도 이 사건이 적법한 전시행위임을 인정하였다.
- 후속 연구: 이 사건은 군사 역사에서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으며, 원자력 잠수함의 실전 격침 사례로 여전히 주목받고 있다.
현재까지의 의미
- 유일한 사례: 컨커러의 헤네랄 벨그라노 격침은 2023년 현재까지도 교전 상황에서 원자력 잠수함이 어뢰로 군함을 격침한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다.
셰필드 쇼크의 배경
- 셰필드 쇼크는 1982년 5월 4일 아르헨티나 해군의 반격을 의미한다.
- 이 사건은 해전사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래를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 아르헨티나군의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가 엑조세 미사일을 사용하여 영국 해군의 HMS 셰필드를 격침시켰다.
- 이 사건은 전투의 양상과 해군 작전의 전략적 접근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르헨티나의 공격 준비
- 아르헨티나 본토에서 출격한 SP-2H 넵튠 해상초계기는 영국 함대의 위치를 탐지하기 위해 생존자 수색 작전을 수행하였다.
- 이 초계기는 영국 해군의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 기만 작전을 사용하였다.
- 영국 해군은 세 시간 가까운 정찰 비행 동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이후 쉬페르 에탕다르 두 기가 영국 함대의 남서쪽에서 저공으로 침투하여 공격을 감행하였다.
엑조세 미사일의 발사
- 쉬페르 에탕다르는 수평선 아래에서 28해리 거리까지 접근한 후 레이더로 영국 함정의 위치를 파악하였다.
- 이 공격에서 엑조세 미사일 두 발이 발사되었으며, 영국 기동부대의 42형 구축함을 목표로 하였다.
- 글래스고와 코벤트리는 미사일 접근을 감지하고 채프를 살포하여 회피하였으나, 셰필드는 피해를 입었다.
- 미사일이 셰필드의 전투정보실에 명중하여 주요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셰필드의 피해와 구조 작업
- 이 공격으로 셰필드의 총원 281명 중 20명이 전사하고, 26~63명이 부상하였다.
- 다행히도 함 내 탄약고의 폭발은 피할 수 있었고, 배는 한동안 물 위에 떠 있었다.
- 부상자는 HMS 허미즈로 이송되었고, HMS 애로우와 HMS 야머스가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였다.
- 생존자들은 MV 브리티시 에스크호에 탑승하여 어센션 섬으로 이송되었다.
영국 해군의 조사와 결과
- 영국 해군은 피격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고, 주요 승조원들이 CIC에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 SCOT 위성 통신 장비의 신호가 레이더와 유사하여, ESM 장비 UAA-1이 잘못된 경고를 발생시켰다.
- 5월 4일 하루에만 3, 4번의 가짜 경보가 울렸고, 실제 공격 시에는 경고가 오보로 판단되었다.
- 작전실 근무 요원들은 피격 당시 전멸하였고, 조사 결과 대공전 장교가 책임을 지게 되었으나 정치적 이유로 군법회의 회부는 피하였다.
셰필드의 최종 침몰
- 셰필드는 영국으로 예인 중에 침수되어 5월 10일에 최종 침몰하였다.
- 이 사건은 영국 해군의 작전과 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셰필드의 침몰 사실은 아르헨티나가 영국 언론을 통해 알게 되었다.
- 아르헨티나군은 전쟁 초반에 장거리 정찰이 가능한 기종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 조종사들의 증언이 신뢰도가 낮아, 전투 결과를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아르헨티나의 정보 부족
- 아르헨티나군의 부족한 면모는 군대 조직이 남미 패권 다툼을 위해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 고속 장거리 전폭기와 재급유기가 부족하여, 국경 지역의 소규모 분쟁에 대비한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 아르헨티나가 보유한 쉬페르 에탕다르와 엑조세는 각각 5기와 5발에 불과하였다.
- 전황을 뒤집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원으로, 영국군의 상륙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엑조세 미사일의 군사적 영향
- 엑조세는 셰필드 격침 전과를 기록하며 대함 공격 수단으로 각광받았다.
- 기존의 방공함들은 저고도 방공능력이 취약하였고, 엑조세는 이 약점을 정확히 찌른 것이다.
- 이 사건은 시스키밍 대함 미사일의 위력을 보여주었으며, '셰필드 쇼크' 또는 **'엑조세 쇼크'**로 불리게 되었다.
- 이후 군함 건조에서 저고도 방공 능력과 CIWS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셰필드 쇼크의 의의
- 셰필드 쇼크는 해전의 전술적 변화와 해군 작전의 전략적 접근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이 사건은 군사적 기술 발전과 전투 전략의 재조명을 촉발하였다.
- 저고도 방공 능력의 필요성이 강조되었으며, 이는 이후 군사 작전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 Always Look on the Bright Side of Life의 가사를 부르며 침몰한 셰필드의 승조원들은 이 사건의 아이러니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폭풍전야의 전투 준비
- 전투 배경: 헤네랄 벨그라노와 셰필드의 격침 사건 이후, 양측은 5월 8일까지 기상 상황이 악화되면서 휴지기를 가졌다.
- 탐색전 재개: 5월 9일부터 영국의 포클랜드 공격에 대비하여 탐색전을 다시 시작하였다.
- 정보 수집 작전: 아르헨티나 해군의 정보수집함 나르왈이 영국 함대를 정찰하던 중 시해리어에 포착되어 격침당하였다.
- 공중 전투: 영국의 코벤트리-브로드소드 42-22 콤보가 아르헨티나의 스카이호크와 퓨마 헬기에 대해 미사일 공격을 가하여 퓨마 헬기를 격추하였다.
영국 해군의 정찰 작전
- 정찰 필요성: 5월 10일 밤, 영국 기동함대는 포클랜드 해안을 면밀히 정찰할 필요가 있었다.
- 명령의 위험성: HMS 얼래크리티에게 기뢰 여부를 확인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며, 이는 호위함의 격침 위험을 동반한 위험한 임무였다.
- 임무 수행: 얼래크리티는 기뢰 대신 아르헨티나 해군 수송함 이슬라 데 로스 에스타도스를 발견하고 포격하여 가라앉혔다.
- 전투의 긴장감: 이 임무는 지휘관 우드워드 제독의 결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상륙작전 수행을 위한 필수적인 조치였다.
아르헨티나 잠수함의 공격 실패
- 산 루이스의 매복: 5월 11일, 아르헨티나의 209급 잠수함 산 루이스가 영국 기동함대의 이동 경로에서 매복하고 있었다.
- 어뢰 발사 시도: 산 루이스는 SST-4 대수상함용 중어뢰 두 발을 발사하였으나, 기술적 문제로 인해 한 발은 발사되지 않았고 다른 한 발은 유도 와이어가 끊어졌다.
- 결과: 어뢰는 영국의 호위함 대신 닉시 예인기만을 타격하게 되었고, 영국 함정들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 임무의 혼란: 얼래크리티와 애로우는 본대로 돌아와서야 닉시가 사라진 사실을 깨달았다.
스카이호크와 영국 함정의 전투
- 공중 전투 발발: 5월 12일 새벽, 글래스고-브릴리언트의 42-22 콤보와 스카이호크 공격기 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 첫 번째 제파의 격추: 저공침투하는 스카이호크 세 대는 브릴리언트의 시울프 대공미사일에 의해 모두 격추되었다.
- 두 번째 제파의 공격: 두 번째 제파의 공격 시, 글래스고의 시다트가 기계고장으로 사격을 하지 못하였고, 브릴리언트의 시울프도 발사에 실패하였다.
- 결과: 두 함정은 스카이호크 네 대의 폭탄 공격을 받았으나, 다행히 글래스고는 불발탄 한 발만 관통당하였다.
SAS의 페블 섬 작전
- 야전비행장 개설: 아르헨티나 공군은 페블 섬에 야전비행장을 개설하고 푸카라 경공격기와 스카이밴 수송기를 운용하고 있었다.
- 위험 요소: 페블 섬은 상륙예정지점인 산카를로스와 가까워 공습의 위험이 컸다.
- SAS의 개입: SAS는 페블 섬 비행장을 파괴하기 위해 8명으로 구성된 정찰조를 침투시켰다.
- 작전 성공: 14일 밤-15일 새벽에 48명의 SAS 대원들이 비행장을 급습하여 푸카라 경공격기 6대와 스카이밴 수송기 1대, T-34C 훈련기 4대를 폭파하였다.
상륙전단의 포클랜드 합류
- 상륙전단 출발: 5월 18일, 어센션 섬에서 출발한 상륙전단이 포클랜드 해역에서 기동함대와 합류하였다.
- 해리어 부대의 합류: 영국 공군의 해리어 부대와 헬기를 실은 Ro-Ro 수송선 아틀란틱 컨베이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 작전 손실: 해리어 숫자가 17대까지 줄어들어 임무 수행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아틀란틱 컨베이어의 합류는 큰 도움이 되었다.
- 상륙 준비: SAS와 SBS 정찰대원들이 주요 관측지점에 투입되어 관측소를 구축하고, 지상군 병력도 수송함에 분승하여 상륙 준비를 마쳤다.
상륙작전 준비 완료
- 상륙작전의 중요성: 포클랜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상륙작전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 관측소 구축: SAS와 SBS 정찰대원들이 주요 관측지점에 투입되어 관측소를 구축하였다.
- 지상군 병력 수송: 지상군 병력도 수송함에 분승하여 상륙 준비를 완료하였다.
- 작전의 긴장감: 상륙작전의 성공 여부가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산 카를로스 만 상륙전 시작
- 상륙전 시작일: 5월 21일, 영국군이 동포클랜드 서북쪽의 산 카를로스만에 상륙함으로써 본격적인 지상전이 시작되었다.
- 목표: 영국 해병대 제3코만도 여단과 영국 육군 제5보병여단이 포트 스탠리를 목표로 하여 작전을 수행하였다.
- 상륙 작전의 중요성: 이 상륙작전은 포클랜드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영국군의 지상전 개시를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아덴트함 피격과 영국 해군의 전략
- 상륙 전략: 영국 기동부대는 엑조세 미사일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삼면이 구릉으로 둘러싸인 산 카를로스를 상륙해안으로 선택하였다.
- 피해 상황: 저공 비행하는 FAA 전투기들을 발견하지 못해, 해협 안으로 진입한 전투함 일곱 척 중 네 척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HMS 아덴트는 침몰하였다.
- 전략적 결과: 아르헨티나 조종사들이 상륙함 대신 호위함정에 공격을 집중함으로써, 상륙부대는 큰 피해 없이 해안 교두보를 형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포클랜드 대거와 공중전
- 아르헨티나의 대응: 영국 기동부대의 상륙 시도가 포착되자, 아르헨티나 공군과 해군항공대는 본토에서 63소티, 포클랜드에서 12소티를 발진하여 총 75소티로 대응하였다.
- 손실: 21일 하루에만 대거 5대, 스카이호크 5대, 푸카라 경공격기 2대를 잃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으며, 이후 이 날의 출격량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 무력화된 전투기: 게릴라 작전에는 유용한 푸카라와 아에르마키가 현대전에서는 무력하게 되었고, 블로우파이프 같은 휴대용 대공 미사일에 제압당하였다.
HMS 안텔로프의 폭발과 손실
- 기상 상황: 22일 하루 동안 소강상태를 보인 포클랜드 항공전은 23일부터 다시 격렬해졌다.
- 아르헨티나의 공격: 아르헨티나 공군은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격렬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이 과정에서 대거와 스카이호크 한 대씩을 잃었다.
- HMS 안텔로프의 폭발: 불발탄에 맞은 HMS 안텔로프가 폭탄 해체 시도 도중 신관이 작동하여 격침되었으며, 시해리어 한 대도 추락하였다.
- 손실 비교: 24일 아르헨티나군의 공습이 이어졌으나, 영국 해군의 손실은 전무한 반면 아르헨티나군은 대거 세 대와 스카이호크 한 대를 추가로 잃었다.
아르헨티나 독립기념일의 공격
- 기념일 공격: 5월 25일 아르헨티나 독립기념일을 맞아 아르헨티나군은 쉬페르 에탕다르를 동원하여 영국 함대 본진에 2발의 엑조세 미사일을 발사하였다.
- 영국군의 대응: 이번에는 영국군이 제대로 탐지하고 즉시 대응하였으며, 본대는 타격을 입지 않았으나 아틀란틱 컨베이어에 1발이 명중하였다.
- 결과: 아틀란틱 컨베이어는 적재된 헬기들과 함께 가라앉으면서 헬리콥터를 이용한 대규모 상륙작전이 힘들어졌고, 아르헨티나군은 심각한 보급난을 겪고 있었다.
코벤트리함의 격침
- 공격의 전개: 아르헨티나군의 공습이 계속되었고, 코벤트리-브로드소드 콤보가 공격을 받았다.
- 전투 시스템 오류: 브로드소드의 대공 레이더가 아르헨티나군 스카이호크를 잘못 인식하여 공격에 실패하였다.
- 격침 결과: 코벤트리는 1000파운드 폭탄 세 발을 맞고 침몰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19명이 사망하고 170명이 구조되었다.
- 영국 해군의 손실: 이는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 해군의 마지막 대형함 손실로 기록되었다.
구스 그린 전투와 영국군의 승리
- 전투 개시: 5월 28일, 제3코만도여단 주력이 포트 스탠리 서북쪽의 틸 인렛으로 기동하는 동안 제2공수대대는 구스 그린에서 아르헨티나군과 전투를 벌였다.
- 피해 상황: 영국군은 전사 18명, 부상 64명에 반해 아르헨티나군은 전사 45명, 부상자 121명, 961명이 포로로 잡혔다.
- 아르헨티나군의 항복: 아르헨티나 육군은 전투에서 패하고 지친 상태에서 구르카병들이 온다는 소문에 항복하였다.
- 전투력 문제: 구스 그린의 아르헨티나 육군 병사들은 신병들로 전투력과 사기가 의심스러웠으며, 쉽게 항복하였다.
아르헨티나군의 보급난과 전투력
- 제해권 장악: 영국이 제해권을 장악한 이상, 추가 지원이 없는 아르헨티나군은 질 수밖에 없었다.
- 보급 문제: 아르헨티나군은 포클랜드에 보병을 1만여 명 수송했으나, 제해권을 잃으면서 후속 보급이 매우 힘들어졌다.
- 탄약 부족: 개인 화기조차 탄약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이는 전투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보급의 중요성: 서경석 퇴역 장군은 보급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포클랜드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군의 방한 장비 부족을 사례로 들었다.
아르헨티나군 조종사들의 활약
- 조종사들의 임무: 아르헨티나군 수송부대 조종사들은 영국군이 제공권을 장악한 상황에서도 보급 및 부상자 후송 임무를 지속적으로 수행하였다.
- 위험한 비행: 조종사들은 한밤중에 악천후를 뚫고 호위기도 없이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이로 인해 영웅 칭호를 받을 만한 활약을 하였다.
- 격추 사례: 아르헨티나군의 C-130이 초계 중이던 해리어에게 격추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엑조세 미사일의 발사 시도
- 상황 설명: 아르헨티나군은 상륙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고 지상전에서도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 최후의 수단: 아르헨티나군은 전세를 되돌리기 위해 마지막 엑조세 미사일 1발을 사용하여 영국의 항공모함을 격침시키려 시도한다.
- 작전의 가능성: 엑조세 단 한 발로 항공모함을 가라앉히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이 강조된다.
- 공중 지원: 해군항공대의 스카이호크가 엑조세의 발사 궤적을 따라 공격하여 항공모함에 추가적인 타격을 가하는 작전이 수립된다.
공중 지원 작전의 계획
- 작전 계획: 5월 30일, 리오 그란데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쉬페르 에탕다르 2기가 공중급유를 받은 후 포클랜드 제도 남쪽으로 우회하여 영국 항모의 예상 위치로 접근한다.
- 타겟 선정: 레이더상에 나타난 세 척 중 가장 크게 보이는 표적을 향해 엑조세 한 발을 발사한다.
- 스카이호크의 역할: 스카이호크 4기 편대가 엑조세의 로켓모터 연기를 따라 영국 함대로 돌진하여 공격을 감행한다.
- 작전의 복잡성: 이 작전은 아르헨티나군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한 복잡한 계획이었음을 나타낸다.
영국 해군의 방어 전략
- 영국 해군의 배치: 아르헨티나군의 예상과 달리, 우드워드 제독은 항모 두 척을 완전봉쇄구역 한참 외곽에 배치하였다.
- 호위전대 구성: 영국 해군 함정들은 항공모함이 아니라 HMS 엑세터, HMS 안드로메다, HMS 어벤저로 이루어진 호위전대였다.
- 기동부대의 우위: 아르헨티나군은 여전히 기동부대에 비해 훨씬 대규모의 항공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영국 해군의 전략적 배치로 인해 공격이 어려워졌다.
- 정보의 중요성: 아르헨티나군은 영국 해군의 배치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군의 정보 부족
- 정찰기의 상태: 아르헨티나군의 SP-2H 넵튠 해상초계기는 심한 노후화로 인해 비행 중 공중분해될 우려가 있어 5월 하순부로 비행 임무에서 해제되었다.
- 정보 수집의 실패: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군은 영국 해군의 실제 배치 상황을 알아챌 방법이 없었다.
- 전략적 실수: 정보 부족은 아르헨티나군의 공격 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나타낸다.
- 결과의 중요성: 정보의 부족은 전투의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엑조세 미사일의 실패
- 영국 해군의 대응: 영국 해군 호위전대는 레이더 탐지를 위해 잠시 상승한 쉬페르 에탕다르를 포착하고 즉시 채프를 살포하여 기만 및 회피 작전을 수행하였다.
- 엑조세의 실패: 엑조세는 채프에 속아 아무 피해도 입히지 못하고 먼 수평선을 향해 사라졌다.
- 공격의 결과: 아르헨티나군의 절박한 시도는 아무 전과도 올리지 못한 채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 전투의 교훈: 이 사건은 전투에서의 정보와 기만 작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스카이호크의 공습 시도
- 공습의 시도: 엑조세 공격에 뒤이어 스카이호크 4기 편대가 기동부대를 공습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날아들었다.
- 격추 사건: HMS 엑세터에게 두 기가 격추당하고 남은 두 기가 투하한 폭탄도 모두 빗나갔다.
- 영국 해군의 방어 능력: HMS 엑세터는 1022형 대공레이더를 탑재하고 있어 저공목표 탐지능력이 향상되었다.
- 결과의 분석: 아르헨티나군의 공격은 영국 해군의 방어 능력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아르헨티나군의 허위 주장
- 주장 내용: 아르헨티나군은 "이번에 발사한 엑조세가 인빈시블에 명중했다!"라고 발표하였다.
- 영국의 반응: 영국은 즉시 아르헨티나군의 주장을 일축하였으나, 작전보안상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 정보의 왜곡: 이로 인해 한동안 아르헨티나 측의 발표대로 인빈시블이 손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 언론의 침묵: 아르헨티나군이 처음 엑조세 공격의 성공을 보도했던 영국 언론은 이번에는 침묵하였다.
앤드루 왕자의 위험한 상황
- 왕자의 임무: 마지막 공격 당시에 시킹 헬리콥터 조종사로 근무 중이던 앤드루 왕자가 엑조세 기만용 채프 살포 임무를 받고 인빈시블의 갑판 위에 있었다.
- 위험 요소: 만약 공격이 실제로 성공했다면 앤드루 왕자는 생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 전투의 인물: 앤드루 왕자의 존재는 전투의 긴박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 역사적 맥락: 이 사건은 전투의 개인적 측면을 강조하며, 전투의 결과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영국군의 포클랜드 전투 시작
- 전투 시작일: 5월 31일, 영국군은 포트 스탠리를 내려다보는 켄트 산을 탈취하였다.
- 전략적 목표: 아르헨티나 지상군 주력을 포위할 준비를 갖추었다.
- 방어군 이동: 이 지역을 방어하던 12보병연대 병력 대부분이 구스 그린으로 이동한 후, 방비가 허술하다는 보고가 있었다.
- 영국 해병의 작전: SAS 정찰대원들의 보고를 바탕으로 영국 해병 42코만도 K중대가 헬기로 강습하여 아르헨티나군의 허를 찌른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국제적 고립
- UN의 제안: UN은 아르헨티나군에게 포클랜드에서 철수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아르헨티나는 이를 거부하였다.
- 아르헨티나의 인식: 아르헨티나는 자신들을 남미가 아닌 서방 백인 국가로 생각하고 있었다.
- 지원 요청: 전세가 기울자 아르헨티나는 다른 중남미 국가들의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대부분의 국가들은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제도 침공을 비난하거나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 칠레의 태도: 아르헨티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칠레는 영국에 영공을 통과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영국군의 상륙 작전과 피해
- 상륙 작전 날짜: 6월 8일, 영국 육군 웨일스 근위연대 1대대가 상륙 작전을 펼쳤다.
- 항공 호위 부족: 상륙 작전 당시 항공 호위가 부실한 상태였다.
- 피해 상황: 상륙함 (LSL) 2척이 아르헨티나의 A-4 공격기에 의해 심한 피해를 입었다.
- 특정 상륙함 피해: 3천톤급 RFA 서 갤러해드는 탄약 유폭으로 전소되어 18일 후 침몰하였다.
아르헨티나군의 전술과 대응
- 민항기 사용: 아르헨티나군은 급히 차출한 민항기로 이루어진 미끼 부대를 사용하여 영국의 해리어들을 농락하였다.
- 오인 공격: 민항기를 영국제 B-108 캔버라 폭격기로 오인하게 만들어, 아르헨티나의 A-4 공격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 후속 공격: 아르헨티나 공군은 후속 편대를 발진시켜 추가 공격을 실시하였으나, 2차 공격대의 A-4는 영국군 해리어들에게 AIM-9L 미사일에 맞고 격추당하였다.
- 전술적 효과: 민항기를 이용한 전술은 피로도를 쌓는 효과가 있었고, 저공 침투하는 A-4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영국군의 최후 공세와 전투
- 공세 시작일: 6월 11일, 영국군의 최후 공세가 개시되었다.
- 칠레 영공 활용: 영국군은 개방된 칠레 영공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며 작전을 수행하였다.
- 아르헨티나의 방어선: 아르헨티나군은 포트 스탠리의 4개 방어선, 특히 롱돈(Longdon) 산에서 의외로 분투하였다.
- 롱돈 방어선의 붕괴: 6월 12일, 롱돈 방어선이 뚫리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롱돈 산 전투와 아르헨티나의 패배
- 마지막 방어선: 아르헨티나군의 마지막 방어선은 텀블다운 산과 와이어리스 능선이었다.
- 전투 기간: 6월 13일~14일 이틀 동안 텀블다운 산과 그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 영국군의 전투 배치: 5보병여단과 3코만도여단이 투입되었으며, 스코츠 가드가 주공을 맡았다.
- 아르헨티나군의 저항: 아르헨티나 제5해병대대는 잘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였다.
전쟁의 종결과 영국군의 승리
- 항복일: 아르헨티나군은 텀블다운이 함락된 날인 6월 14일 항복하였다.
- 전쟁 결과: 포클랜드 전쟁은 영국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 전후 상황: 전쟁이 끝난 후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의 많은 장비를 노획하였다.
- 장비 목록: 영국군은 사용 가능한 퓨마 헬리콥터와 경비함정 등을 포함한 다양한 장비를 확보하였다.
전후 아르헨티나 군 장비 노획
- 노획 장비 목록: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의 다양한 군사 장비를 노획하였다.
- 트럭: 메르세데스-벤츠 MB 1112/13/14 트럭 100대
- 장갑차: 파나르 AML-90 수색정찰장갑차 12대
- 미사일 발사대: 롤랜드 지대공미사일 발사대 1기, 타이거캣 지대공미사일 발사대 3기
- 헬리콥터: UH-1H 8기, CH-47 치누크 1기
- 탄약 및 화기: 7.62 mm 탄약 400만발, 개인화기 11,000정 등 다양한 무기와 탄약을 확보하였다.
알헤시라스 작전 개요
- 작전의 비밀성: 알헤시라스 작전은 1급 기밀로 분류되어 있었으나, 2003년에 공개되었다.
- 작전의 목적: 아르헨티나 특수부대는 지브롤터에 있는 영국 함대를 폭파시키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 작전의 배경: 1982년 4월, 아르헨티나 해군은 영국 군함을 폭파하여 포클랜드 해협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 작전의 실행: 호르헤 아나야 제독의 지휘 아래, 아르헨티나 공작조는 위조 여권을 사용하여 스페인의 알헤시라스에 잠입하였다.
작전 계획과 실행
- 작전의 세부 계획: 아르헨티나 해군은 영국 군함을 폭파하기 위해 특수작전을 세웠다.
- 잠입 작전: 공작조는 지브롤터와 마주하고 있는 스페인 지역에 거점을 설치하였다.
- 작전의 방법: 다이버들이 이탈리아산 흡착기뢰를 군함에 설치하고 빠져나오는 방식으로 작전을 계획하였다.
- 초기 목표: 처음에는 유조선을 폭파하려 했으나, 환경 오염과 스페인의 반발을 우려하여 계획이 변경되었다.
작전 중의 문제점
- 기회 포착의 실패: 아르헨티나 공작조는 지브롤터를 오가는 함대를 보고 기회를 엿보았으나, 본국의 지령에 따라 시간을 낭비하였다.
- 스페인 정부의 반응: 스페인 총리는 아르헨티나 공작조의 작전이 외교적 분쟁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였다.
- 부주의한 행동: 공작조는 렌터카와 호텔을 자주 바꾸며 부주의하게 행동하여 마을 사람들의 의심을 샀다.
- 정보 노출: 영국 정보부는 아르헨티나 대사관의 통신량 증가를 도청하여 작전이 노출되었다.
스페인 정부의 반응
- 스페인의 외교적 입장: 스페인은 아르헨티나를 버리고 영국 편을 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 사태 처리 결정: 스페인 정부는 경찰을 동원하여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기로 결심하였다.
- 민주화 과정: 당시 스페인 총리는 민주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며, 영국의 협조가 필요하였다.
- 외교적 우려: 스페인은 1982 FIFA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외교 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체포와 그 후의 처리
- 체포 사건: 아르헨티나 공작조원 페르난데스 해군 대위는 자신이 전쟁포로라고 주장하였으나, 스페인 경찰은 이를 믿지 않았다.
- 경찰의 반응: 경찰은 그를 조롱하며, 아르헨티나 해군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 내무부의 지령: 체포 후, 스페인 경찰은 아르헨티나 공작조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우호적으로 대처하였다.
- 사건의 은폐: 스페인 정부는 사건을 절대 노출하지 말고 조용히 처리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사건의 은폐와 결과
- 추방 처리: 체포된 아르헨티나 공작조는 재판이나 심문 없이 아르헨티나로 추방되었다.
- 기록의 파기: 관련 기록은 모두 파기되었고, 남은 자료는 기밀로 남았다.
- 후속 공개: 훗날 관련 자료가 공개되었으나,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 스페인 정부의 결정: 사건을 묻어버리고 싶었던 스페인 정부의 결정이 사건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키홀 작전 개요
- 분쟁 지역: 포클랜드 제도, 사우스 조지아 제도, 사우스 샌드위치 제도는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분쟁 지역이었다.
- 기상관측소 건설: 1955년 툴레 섬에 기상관측소를 건설하였으나, 화산 폭발로 철수하였다.
- 아르헨티나의 군사적 행동: 포클랜드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군은 사우스 샌드위치 제도를 점령하고 군기지를 건설하였다.
- 군기지의 목적: 이 군기지는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기 위한 시설을 포함하였다.
아르헨티나의 군기지 건설
- 군기지의 구성: '코르베타 우루과이'라는 군기지는 라디오 기지, 기상관측소, 헬리패드 등을 포함하였다.
- 주둔군의 배치: 아르헨티나 군은 해당 기지에 상주하며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였다.
- 영국의 반응: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가 패전한 후, 영국은 키홀 작전을 개시하였다.
- 작전의 목표: 키홀 작전은 툴레 제도의 재탈환 및 아르헨티나의 영향력 소거를 목표로 하였다.
키홀 작전의 목표와 실행
- 작전의 실행: 6월 14일 아르헨티나가 항복을 선언한 후에도 기지의 주둔군은 철수하지 않았다.
- 영국 해병대의 작전: 제42코만도가 헬리콥터로 툴레 섬에 상륙하여 주둔군을 무장해제시켰다.
- 작전의 결과: 주둔군은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이동 후 아르헨티나 본토로 추방되었다.
- 기지의 상태: 기지는 버려졌으나, 국기 게양대에 아르헨티나 국기가 다시 게양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기지의 국기 교체 사건
- 국기 교체의 발견: HMS 헤카테가 지역을 정찰하던 중, 기지의 국기가 아르헨티나 국기로 교체된 것을 발견하였다.
- 교체의 불확실성: 누가 국기를 교체했는지는 불분명하였다.
- 영국의 대응: 아르헨티나가 이를 영유권 주장에 사용할 것을 우려하여 HMS 아리아드네를 파견하였다.
- 기지 철거: 영국은 기지를 철거하여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차단하였다.
포클랜드 전쟁 개요
- 전쟁 발발일: 1982년 7월 21일
- 영국 시민들의 반응: 영국 남부 포츠머스 항으로 개선하는 원정 기동 함대 기함 HMS 허미스에 대해 열렬한 환대가 있었다.
- 전쟁 기간: 3개월간의 단기전으로, 영국의 군사적 존재감을 알리는 중요한 전쟁이었다.
전사자 및 민간인 피해
- 전사자 수:
- 영국 측: 255명
- 아르헨티나 측: 649명
- 자살자 수: 21세기까지 양측 참전 용사 중 자살자가 전사자를 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영국 국방부에 따르면 포클랜드 참전 군인의 7%, 즉 95명이 자살과 관련된 죽음을 맞았다.
- 민간인 피해:
- 영국군의 오폭으로 사망한 포클랜드의 영국인 주민 3명
- 아르헨티나 해군에 동원된 민간인 선원 16명 사망
갈티에리 대통령의 패배
- 전쟁의 목적: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은 불만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 선전 내용: 전쟁 내내 이기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결과적으로 역대급 참패를 당했다.
- 항복 후 연설: 갈티에리는 아르헨티나의 패배를 인정하는 치욕적인 대국민 연설을 하였으며, 문맥을 통해 패배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 시민 반응: 시민들이 패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으나,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혼란
- 대통령 권좌 이양: 갈티에리는 6월 18일 레이날도 비그노네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 정치적 불안정: 비그노네 역시 1983년 여러 반정부 세력의 공격을 받아 몰락하였다.
- 정권의 변화: 이 기간 동안 아르헨티나의 국가수반부는 완전히 혼란스러웠으며, 2년 동안 대통령이 4명이나 바뀌었다.
- 독재 정권의 붕괴: 1976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은 붕괴되었고, 이후 라울 알폰신을 대통령으로 삼은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영국의 전쟁 비용과 피해
- 전비와 사상자: 영국은 막대한 전비를 썼고 사상자도 발생했으나, 미국의 베트남 전쟁과 비교할 수는 없다.
- 전쟁 기간: 포클랜드 전쟁은 3개월간 벌어진 단기전이다.
- 전사자 수: 영국군 전사자는 255명, 부상자는 775명에 불과하다.
- 전쟁의 결과: 포클랜드 전쟁은 영국의 명백한 승리로, 보수당 정권을 연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 경제의 변화
- 70년대 경제 상황:
- 오일 쇼크로 연평균 20% 이상의 인플레이션 발생
- 낮은 생산성과 평균 10.1%의 실업률로 재정 악화
- 연간 2.8%의 저성장 기록, 1인당 GDP가 세계 18위로 하락
- 1980년대 경제 회복: 1980년대 후반부터 경제가 다시 살아나 2016년 기준으로 세계 13위에 올랐다.
- 농업 기계화: 1980년대 이후 영국의 농업은 성공적으로 기계화되어 2000년에는 2%의 노동력으로 국내 필요량의 **60%**를 생산하였다.
- 전쟁의 영향: 전쟁으로 인해 영국 경제가 살아났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전쟁으로 경제를 망치지는 않았다는 점이 강조된다.
신자유주의의 확산
- 신자유주의의 역할: 포클랜드 전쟁이 신자유주의가 전세계를 휩쓰는 방아쇠가 되었다고 주장된다.
-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 레이건 대통령만으로는 신자유주의화가 어려웠으나, 대처가 승리에 힘입어 재집권함으로써 신자유주의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 1982년 실업률: 전쟁 발발 직전 영국의 실업률은 10%, 실업자 수는 300만명에 달했다.
- 대처의 경제 정책: 대처는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으며, 감세, 규제 완화, 정부 지출 축소, 공기업 민영화 등의 조치가 영국 경제 회복에 기여하였다.
대처 총리의 경제 정책
- 정권의 위기: 당시 영국 정권은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며, 대처는 체임벌린과 함께 가장 무능한 수상으로 평가받았다.
- 전쟁 승리의 영향: 포클랜드 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대처는 재집권하였고, 이후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 정책의 벤치마킹: 다른 나라들도 대처의 경제 정책을 자국의 실정에 맞추어 벤치마킹하기 시작하였다.
- 대처의 유산: 대처는 전쟁의 승리로 인해 최고 지지율 **98%**를 기록하였으나, 그녀의 사망 시기에는 대처의 정책이 남긴 유산이 영국 서민들을 괴롭혔다는 비판이 있었다.
신자유주의의 긍정적 및 부정적 평가
- 경제 호황 기여: 신자유주의화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내내 이어지던 경제 호황에 크게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다.
- 경제적 양극화: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경제적 양극화를 더욱 강화하고 대침체의 발생에 일조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존재한다.
프랑스의 무기 판매와 루머
- 프랑스의 무기 판매: 아르헨티나에 엑조세와 쉬페르 에탕다르 조합을 판매한 프랑스에 대한 루머가 존재한다.
- 정보 유출 주장: 일부에서는 프랑스가 영국에 엑조세의 정보를 넘겨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 루머의 근거: 이러한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프랑스는 아르헨티나의 기습 공격 이후 즉각적으로 무기 인도를 중지하였다.
- 결론: 이 주장은 논할 가치가 없는 억지 주장으로, 프랑스는 고객과 동맹국 모두의 의리를 지켰던 것이다.
프랑스의 무기 수출 중단
- 무기 인도 중단: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기습하자 프랑스는 엑조세와 쉬페르 에탕다르의 인도를 중지하였다.
- 정보 비공유: 프랑스는 영국에도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
- 영국의 상황: 영국은 이미 70년대부터 엑조세를 도입해 운용 중이었기 때문에 추가 정보가 필요하지 않았다.
- 결론: 프랑스의 결정은 고객과 동맹국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전쟁 준비 부족
- 아르헨티나의 전쟁 발발: 아르헨티나는 단 5발의 대함 미사일만으로 급하게 전쟁을 일으켰다.
- 주문 물품 미수령: 아르헨티나는 주문한 무기를 모두 받지 못한 상태였다.
- 비정상적인 전쟁 발발: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킨 아르헨티나의 결정은 이상한 것으로 평가된다.
- 비판적 시각: 아르헨티나의 전쟁 준비 부족은 전반적인 전략적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
프랑스의 무기 수출 금지
- 무기 수출 금지 조치: 아르헨티나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는 프랑스의 독단이 아니라 유럽 전체의 결정이었다.
- 독일의 행동: 독일 또한 아르헨티나에 구축함의 인도를 전쟁 동안 보류하였다.
- 유럽의 일관된 정책: 이러한 조치는 유럽 국가들이 아르헨티나의 군사적 행동에 대해 일관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결론: 프랑스의 무기 수출 금지는 국제적인 협력의 일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쟁 후의 무기 인도
- 전쟁 종료 후 약속 이행: 프랑스는 전쟁이 끝난 후 약속을 지켜 주문한 물건을 정확히 넘겨주었다.
- 프랑스의 신뢰성: 이는 프랑스가 고객과의 신뢰를 중시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 무기 인도의 중요성: 전쟁 후에도 무기 인도를 이행하는 것은 국제 관계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 결론: 프랑스는 전쟁 중에도 고객에 대한 의리를 지켰던 것이다.
합동 훈련과 정보 제공
- 합동 훈련의 배경: 프랑스와 영국은 포클랜드 전쟁 이전부터 정기적으로 합동 훈련을 실시하였다.
- 훈련의 내용: 이 훈련에서 프랑스 공군은 미라지 전투기를 사용하였다.
- 영국 조종사의 참여: 훈련에 참가했던 영국 조종사들은 포클랜드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 정보 제공의 한계: 뉴질랜드 공군이 제공한 정보는 미국제 A-4 스카이호크 공격기에 대한 것이었으며, 아르헨티나군이 사용하던 모델에 대한 정보는 불확실하였다.
미라지의 정보 유출 논란
- 정보 유출 주장: 일부에서는 프랑스가 영국에 아르헨티나의 주력기인 미라지의 비행 성능과 정보를 넘겨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 기종의 노후화: 미라지는 배치된 지 30년이 지나고 수출까지 이루어진 기종으로, 정보 유출이 전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은 비정상적이다.
- 정보의 중요성: 전투기와 같은 군사 장비의 정보는 전쟁의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 결론: 정보 유출 주장은 사실과 다르며, 훈련의 성격을 고려할 때 과장된 측면이 있다.
아르헨티나의 기술적 한계
- 엑조세 운용의 어려움: 아르헨티나는 기술적으로 매우 진보된 엑조세를 자력으로 운용하지 못하였다.
- 기술 장벽: A-4 스카이호크와 비유도 폭장만 사용하던 아르헨티나는 상당한 기술 장벽에 직면하였다.
- 기술 지원의 필요성: 프랑스에서 파견한 기술진들이 포클랜드 전쟁 시에도 남아 셋업을 도와주었다.
- 결론: 아르헨티나의 기술적 한계는 전쟁 수행 능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방산업체의 입장
- 방산업체의 본질: 방산업체는 전쟁을 통해 무기를 판매하는 것이 본질이다.
- 비판에 대한 반론: 방산업체와 군대의 존재를 비판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 프랑스의 경제 상황: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프라가 파괴된 프랑스는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 방산업체를 지원하였다.
- 결론: 방산업체의 발언은 방위산업의 본질과 당시 프랑스인의 솔직한 마음을 반영하고 있다.
전후 양국의 외교 관계
- 전후 양국의 단교 상태: 전후 아르헨티나와 영국은 단교 상태였다.
- 재수교 날짜: 1990년 2월 5일에 재수교가 이루어졌다.
- 영토 주장: 양국은 여전히 포클랜드 제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 아르헨티나의 교육: 아르헨티나는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이를 공교육에 포함시켜 국민들에게 중요하게 가르친다.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
- 영유권 주장 지속: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 국민 교육의 중요성: 영유권 주장을 공교육에 포함시켜 국민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 경제적 어려움: 아르헨티나는 경제가 어렵고 군 현대화 상황도 힘들다.
- 전쟁 가능성 평가: 단기적으로 제2차 포클랜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평가된다.
전사자 유골 반환 문제
- 전사자 유골 반환 요청: 전후 아르헨티나 전사자 중 섬에 남겨진 시신 236구를 영국에서 가져가라고 요청하였다.
- 아르헨티나 정부의 입장: 아르헨티나 정부는 그들이 이미 '고국'에 있다고 주장하며, 영국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포클랜드의 영국 주권을 인정하게 된다고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 유골의 현재 상태: 아르헨티나 전사자 유골은 포클랜드 다윈 묘지의 아르헨티나 전사자 구역에 묻혀 있다.
- DNA 검사 합의: 2016년에 신원불명의 유골들의 DNA 검사를 마치기로 합의하고, 2017년에 최종보고서를 작성하였으나, 여전히 유골 반환에 대한 아르헨티나 내부의 이견이 존재한다.
지뢰 처리와 전후 상황
- 지뢰의 수: 포클랜드 전쟁 당시 2만개의 지뢰가 깔렸다.
- 지뢰 처리의 어려움: 전후에도 지뢰 처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 최종 지뢰 해체: 2020년에 마지막 지뢰를 해체하고, 드디어 지뢰가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선포하였다.
- 안전 문제: 지뢰 처리 문제는 전후 상황에서 중요한 안전 문제로 대두되었다.
언론의 역할과 전쟁 보도
- 영국 언론의 보도: 포클랜드 전쟁 당시 영국 언론의 무분별한 전황 보도가 아르헨티나의 전쟁 수행에 도움이 되었다.
- 언론 통제: 언론에서 자체적으로 통제한 내용을 다루는 정훈 교육 자료가 존재한다.
- BBC의 중립성: 당시 BBC는 언론의 중립을 유지하면서 '아군'이 아닌 '영국군'이라고 불렀다.
- 군사 기밀 누설: 영국군은 종전 후 군사기밀 누설을 이유로 BBC에 고소장을 제출하였다.
영국의 군사 지원과 오판
- 아르헨티나 군부의 오판: 아르헨티나 군부는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이 영국을 돕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 실제 군사 지원: 호주와 캐나다는 영국에 여러 군사적 지원을 제안하였고, 뉴질랜드는 아르헨티나군의 장비 정보를 넘기는 것은 물론 군함을 보내겠다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 전력 공백 메우기: 전쟁 발발 후 인도양에 배치된 영국 해군이 포클랜드 전장으로 출동하자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이 전력 공백을 메워주었다.
- 외교적 압박: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호주, 뉴질랜드는 아르헨티나와 수교를 끊거나 경제 제재를 가하는 외교적 경제적 압박을 병행하였다.
무기와 전투 장비의 유사성
- 제식 소총의 유사성: 당시 영국군과 아르헨티나군은 제식 소총이 동일하여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의 탄약을 사용하였다.
- 소총의 종류: 아르헨티나군은 벨기에제 FN FAL로, 영국군은 FN FAL의 라이센스 버전인 L1A1로 무장하였다.
- 반자동 사격의 차이: 영국군의 L1A1은 반자동 사격만 가능하여, 아르헨티나 군의 FN FAL을 노획하여 완전자동 사격이 가능한 제식 소총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였다.
- 전투에서의 전략적 이점: 이러한 무기 유사성은 전투에서 전략적 이점을 제공하였다.
SA80 소총 개발의 어려움
- SA80 소총 개발 필요성: 북아일랜드 분쟁에서 영국은 L1A1을 대체할 새로운 돌격소총을 개발할 필요성을 느꼈다.
- 예산 삭감의 영향: IMF 경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대처 내각이 예산을 삭감하였고, 포클랜드 전쟁까지 치르면서 영국 국방부는 주머니가 텅텅 빈 상황에서 SA80을 개발하게 되었다.
- 조병창 민영화: 국립 조병창을 민영화하여 상당수가 해체되거나 대량 해고로 대규모 축소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 SA80의 초기 문제점: 개발진들은 XL64E5를 5.56mm NATO 탄을 쓸 수 있도록 한 XL70E3을 내놓았으나, 조악한 재료로 안전성이나 신뢰성이 극악이었다.
전후 해군의 전투 경험
- A-4 공격기 격추: 영국 해군이 아르헨티나 공군의 A-4 공격기를 보포스 포로 격추하였다.
- 사격통제장치의 중요성: 컴퓨터로 작동하는 사격통제장치가 여전히 강력하다는 것이 검증되었다.
- 대공포의 운용 변화: 대공포로 사용하던 보포스 40mm 포가 중소형 전투함에서 주력으로 운용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 함정의 무기 배치 변화: 이후 전함들은 100mm 이상급의 거대주포보다는 대공포나 부포로 쓰이던 40mm, 75mm 급을 주포로 채용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인 교포의 포클랜드 전쟁 지지
- 한국인 교포의 시위: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간 한국인 교포들이 아르헨티나에서 겪은 일들을 묶어서 펴낸 <아르헨티나 코리안 문학 선집: 소설>에는 포클랜드 전쟁 당시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 군사 정부의 지시: 아르헨티나 군사 정부는 전국의 모든 노동조합에게 포클랜드 전쟁을 지지하는 시위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 시위의 내용: 한국인 교포들은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후에라 포클랜드(떠나라 포클랜드), 볼베레 말비나스(돌아오라 말비나스)!"라는 구호를 외치며 전쟁을 지지하였다.
- 영국의 반응: 이 장면이 아르헨티나 방송국 TV를 통해 생중계되자, 주한 영국대사가 한국 외무부 장관에게 항의하였다.
전쟁의 교훈과 현대적 해석
- 예비군 정신교육의 소재: 과거에는 예비군 정신교육의 단골 소재로 사용되었다.
- 전쟁의 결과: 아르헨티나가 무리하게 영국과 싸우다가 참패하여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직면한 반면, 승전국인 영국은 지금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 시간의 흐름: 시간이 흐르면서 보다 최신 버전의 다른 사례도 많아져서 잘 쓰이지 않게 되었다.
- 교훈의 현대적 적용: 전쟁의 교훈은 현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전쟁 40주년 기념 행사
- 4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2022년 4월 아르헨티나는 전쟁 종결 40주년을 맞이하여 당시 참전용사들을 인터뷰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다.
- 전사자 추모식: 전사자 추모식이 열렸다.
- 대통령의 발언: 아르헨티나 대통령 알베르토 페르난데스는 영토 보전을 회복하는 것이 절대 우선순위라고 천명하였다.
- 영국의 추모식: 2022년 6월 영국에서도 보리스 존슨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전쟁 종결 40주년 추모식이 열렸다.
영국의 추모식과 아르헨티나의 반발
- 영국의 기념 행사: 11월 전쟁 승전 40주년 기념으로 프린세스 로열 앤이 섬을 직접 찾아 추모비에 헌화하였다.
- 아르헨티나의 반발: 아르헨티나 정부는 영국의 행동에 불쾌감을 표시하며 맹반발하였다.
- 국제적 긴장: 이러한 사건은 양국 간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 역사적 맥락: 전쟁 40주년 기념 행사는 역사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명칭 문제와 포클랜드 전쟁
- 한국의 명칭 사용: 한국에서는 서방의 보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포클랜드 전쟁'**이라고 칭하고 있다.
- 아르헨티나의 명칭 사용: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 제도'**라고 부르며, 이로 인해 포클랜드 전쟁/분쟁에서 아르헨티나 편을 드는 나라들은 **'말비나스 전쟁'**이라고 부른다.
- 영국의 승리: 영국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포클랜드 제도는 포클랜드 제도로 남게 되었고, 이는 널리 알려져 있어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판단된다.
- 대화 시 주의사항: 아르헨티나인과 대화할 때는 기분 나빠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영국의 포클랜드 전쟁 승리
- 전쟁 결과: 영국이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포클랜드 제도는 포클랜드 제도로 남게 되었다.
- 사회적 인식: 이 결과는 널리 알려져 있어,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여겨진다.
- 명칭의 중요성: 전쟁의 명칭이 국가 간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명칭 사용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
한국의 명칭 사용에 대한 입장
- 대화 시 주의: 아르헨티나인과의 대화에서 기분 나빠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 명칭의 다양성: 한국 정부는 포클랜드 전쟁이라는 명칭만 인정할 것이 아니라, **'말비나스'**라는 명칭도 병행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 여론의 변화: 이러한 입장은 여론이 일기도 했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독도 문제와 한국 정부의 입장
- 독도 문제: 한일 간의 독도 문제와 관련하여, 영국 정부는 **일본의 편에서 '일본해'와 '다케시마'**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 한국 정부의 대응: 한국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포클랜드 전쟁의 명칭을 **'말비나스'**로 병행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사회적 논의: 이와 같은 입장은 여론이 일기도 했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 내에서의 논의가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중국의 포클랜드 전쟁 입장
- 중국의 공식 입장: 중국은 포클랜드 영유권 분쟁에서 아르헨티나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 명칭 사용: 이로 인해 포클랜드 전쟁을 **'마도 전쟁'(马岛战争)**으로 표기하고 있다.
- 정치적 맥락: 중국의 이러한 입장은 정치적 맥락에서 아르헨티나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홍콩과 마카오에 대한 중국의 시각
- 지배 기반 완성: 최근 홍콩과 마카오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 기반을 완성한 중국은, 포클랜드 전쟁을 아르헨티나가 고유 영토를 되찾기 위한 정당한 전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 정당성의 연관성: 이러한 경향은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 정당성을 중국이 홍콩과 마카오를 가져간 정당성과 연관짓는 것으로 나타난다.
- 정치적 메시지: 이는 중국의 정치적 메시지로, 자국의 영토 문제에 대한 정당성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당성의 비교
- 정당성의 연관성: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 정당성=중국이 홍콩과 마카오를 가져간 정당성"으로 간주되고 있다.
- 정치적 논리: 이러한 비교는 정치적 논리에 기반하여, 각국의 영토 문제에 대한 정당성을 서로 연결짓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 국제 관계의 복잡성: 이는 국제 관계에서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반영하며, 각국의 입장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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