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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전쟁 개요

  • 포클랜드 전쟁은 1982년 4월 2일에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전쟁이다.
  • 이 전쟁은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군사적 충돌로, 두 나라의 주권 문제가 핵심 쟁점이었다.
  • 전쟁의 발발은 국제 정치 군사 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의 군사 작전에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하였다.
  • 포클랜드 전쟁은 냉전 시대의 군사적 긴장 속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군사적 개입의 필요성과 그 결과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였다.

현대 해전의 사례

  • 포클랜드 전쟁은 21세기 현대까지도 미사일 시대를 대표하는 해전의 교과서적 사례로 평가된다.
  • 이 전쟁은 현대 해전의 전술과 전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 특히, 공중전 해상전의 조화로운 운영이 두드러지며, 이는 현대 군사 작전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다.
  • 포클랜드 전쟁의 사례는 군사 훈련 전략 개발에 있어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정규군 해전의 변화

  • 포클랜드 전쟁 이후, 정규군 해군 간의 대규모 해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 이는 군사 전술의 변화와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음을 시사한다.
  • 현대의 군사 작전은 비대칭 전쟁 소규모 충돌로 전환되었으며, 이는 전통적인 해전의 개념을 변화시켰다.
  • 이러한 변화는 군사 자원의 배치 전략적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비핵보유국의 선제공격

  • 포클랜드 전쟁은 4차 중동전쟁과 함께 비핵보유국 핵보유국을 상대로 선제공격을 한 전쟁으로도 평가된다.
  • 이는 국제 관계에서의 군사적 불균형 전략적 선택의 복잡성을 드러낸다.
  • 비핵보유국의 선제공격은 군사적 억제력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 이러한 사례는 국제 정치에서의 군사적 결정 외교적 대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 역사

  • 포클랜드 제도는 영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지역이다.
  • 아르헨티나는 1950년대부터 영유권을 주장해왔다.
  • 이로 인해 1960년대와 70년대에 여러 차례 영유권 협상이 있었으나,
    • 영국 측의 거부
    • 지역 주민들의 아르헨티나 귀속 반대 여론으로 인해 모두 결렬되었다.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의 경제 정책

  • 1976년 쿠데타로 세워진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 오일 쇼크로 인한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자본과 외채를 대규모로 도입하였다.
  • 그러나 1980년 금리 인상으로 이자율이 급상승하였고,
    • 기업 채무를 국가에서 갚도록 하는 정책을 펴면서 재정난이 심각해졌다.

경제 위기와 사회적 불만

  • 아르헨티나 정부는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 재정지출을 대폭 줄이는 정책을 도입하였다.
  • 이로 인해 외채는 더욱 증가하였고,
    • 사회 복지 정책의 실종으로 빈부격차가 심화되었다.

국민의 관심 전환 전략

  • 심각하게 악화된 경제 상황 때문에 국민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 이를 위해 1978년 월드컵을 개최하고,
    • 자국 팀을 우승시키기 위한 무리수를 두었다.

전쟁의 배경과 군사적 계산

  • 당시 아르헨티나 군부는 내부적 불만을 외부의 적으로 돌려 단결을 꾀하자는 안을 제시하였다.
  • 브라질, 칠레 등 주변 남미 국가들이 거론되었으나,
    • 최종적으로 포클랜드 제도의 영국군이 대상이 되었다.
  • 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의 앞마당과 같았으며,
    • 영국 본토는 지구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다.

아르헨티나 군의 군사력

  • 아르헨티나군은 전쟁 당시 군 현대화를 거쳤으며,
    • 프랑스에서 수입한 쉬페르 에탕다르 엑조세 대함미사일 등을 장비하고 있었다.
  • 또한, 미국산 CH-47 치누크, 독일제 209급 잠수함, 소련제 스트렐라 지대공 미사일 등 다양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 이러한 군사력은 아르헨티나군의 자부심을 높였을 것이다.

영국의 군사적 약점

  • 영국은 1970년대에 미국과 소련의 양강 구도에서 밀려난 한물 간 나라로 여겨졌다.
  • 제2차 중동전쟁에서 굴욕을 당한 경험이 있으며,
    • 더 이상 옛날의 대영제국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 영국 해군의 마지막 정규 항공모함인 오데이셔스급 아크로열이 퇴역하여
    • 유사시 장거리 항공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워졌다.

전쟁 발발의 복합적 요인

  • 여러 개전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포클랜드 제도는 본국으로 통하는 항공편이 없었고,
    • 의료 서비스조차 본국이 아닌 아르헨티나에 의존해야 했다.

포클랜드 영유권 분쟁의 배경

  • 정기적인 회담: 아르헨티나와 영국은 포클랜드의 영유권 문제를 주제로 정기적인 회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 회담 종료: 1982년 2월 27일의 회담을 마지막으로, 3월 1일 아르헨티나는 영국에 **'영유권 문제 해결 의사가 없다면 교섭을 중단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향후 모든 수단을 취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 영국의 예측 부족: 아르헨티나의 성명에 대해 영국은 그 '수단'이 포클랜드 무력 점령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아르헨티나의 강경한 입장

  • 강경한 태도: 아르헨티나는 영유권 문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며, 이는 군부 정권의 정치적 필요와 관련이 있다.
  • 교섭 중단: 아르헨티나의 성명은 교섭 중단을 의미하며, 이는 양국 간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 국내 여론: 아르헨티나의 군부는 국내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해 강경한 조치를 취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고철 수집상의 포클랜드 침입

  • 콘스탄티노 다비도프: 1982년 3월 19일, 아르헨티나의 고철 수집상인 콘스탄티노 다비도프가 포클랜드 제도로 들어왔다.
  • 불법 상륙: 이들은 마땅한 해상편이 없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 해군 수송함에 탑승하여 아르헨티나 국기를 게양한 채 사우스조지아 섬에 도착하였다.
  • 입국 절차 문제: 이들은 영국 정부로부터 방치된 포경 공장의 해체권을 주장했으나, 입국 절차에 문제가 있어 불법 상륙으로 간주되었다.

영국의 반응과 갈등의 시작

  • 영국의 발견: 아르헨티나 국기를 게양한 상황에서 상륙한 이들을 영국의 남극관측대원이 발견하고 항의하였다.
  • 상황 악화: 이로 인해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었으며, 아르헨티나의 민간 시설이 공격받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 강경한 주민 반응: 강경한 주민들이 아르헨티나의 민간 시설을 공격하고 "대영제국 만세", "까불면 코피 터질 줄 알아라!" 같은 낙서를 남겼다.

아르헨티나 군의 전쟁 준비

  • 전쟁 준비: 당시 아르헨티나는 해군참모총장 호르헤 이사악 아나야 제독을 중심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 개전 시점: 아르헨티나는 개전 시점을 8~9월로 잡고 있었으나, 예상보다 빠른 전개에 당황하였다.
  • 전략적 계산: 아르헨티나는 영국의 군함 퇴역과 남반구의 겨울 날씨를 고려하여 전략적으로 개전 시점을 조정하고 있었다.

경제난과 군부의 침공 결정

  • 경제난 심화: 3~4월에 아르헨티나에서 경제난이 심화되었고,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었다.
  • 군부의 결정: 다급해진 군부 정권은 국내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해 침공을 서둘렀다.
  • 정치적 필요성: 군부는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전쟁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이는 국가의 안정과 정권 유지와 관련이 있다.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침공 시작

  • 침공 시작일: 4월 2일
  • 참여 군대: 아르헨티나 해병대 및 특수부대 소속의 지상군 4,000명
  • 지원군: 해군의 지원을 받음
  • 전쟁의 시작: 포클랜드 제도를 기습 침공하면서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임.

영국군의 미미한 저항

  • 영국군의 규모: 현장에 있는 영국군은 고작 100여명의 해병대 코만도로 구성됨.
  • 충돌의 결과: 아르헨티나군과의 미미한 충돌 후, 영국군은 즉시 항복함.
  • 항복의 이유: 아르헨티나군의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인해 저항이 불가능했음.

포로의 굴욕적인 상황

  • 포로 상황: 포로로 잡힌 해병들의 굴욕적인 사진이 영국인들의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침.
  • 사진의 내용: 포로들은 범죄자처럼 엎드리게 해놓은 상태로 촬영됨.
  • 여론의 반응: 이러한 사진은 영국 내에서 큰 논란을 일으키고, 여론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음.

총독 렉스 헌트의 항복

  • 총독의 지시: 렉스 헌트 경은 영국군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지시를 내림.
  • 아르헨티나 사령관에게 요구: 영국 영토를 무단으로 침입하고 있으니 즉각 퇴거할 것을 요구함.
  • 체포 및 추방: 아르헨티나 군대는 헌트 경을 체포하여 우루과이로 추방함.

헌트 경의 복귀

  • 전쟁 종료 후: 헌트 경은 포클랜드 전쟁이 끝난 후에 다시 총독으로 부임함.
  • 복귀의 의미: 그의 복귀는 전쟁의 결과와 영국의 입장을 반영하는 중요한 사건임.

아르헨티나의 전략적 계산

  • 전략적 판단: 아르헨티나는 무력으로 강경하게 실효점유를 시작하면 영국이 협상에 임할 것이라고 생각함.
  • 영국의 반응 예측: 영국이 포클랜드를 수복하기 위해 재정적 소모를 감수하기보다는 협상에 나설 것이라는 판단을 내림.

국제사회의 예측

  • 국제사회의 관측: 국제사회에서도 영국이 외교적인 항의 정도만 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음.
  • 전반적인 반응: 이러한 예측은 아르헨티나의 침공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을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임.

영국의 각료들의 전쟁 반응

  • 회의 분위기: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열린 회의에서 일부 각료들은 아르헨티나와의 ‘협상’을 원했다.
  • 국방장관의 입장: 심지어 국방장관조차 전쟁을 원치 않았고, 사직하겠다고 밝혔다.
  • 미국의 태도: 영국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인 미국 역시 전쟁을 바라지 않았다.
    • 당시 미국은 남미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여러 독재 정권들을 보호하고 있었으며, 아르헨티나의 군사 정권도 그 중 하나였다.
  • 대처 총리의 반응: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대처 총리에게 직접 전화를 해 전쟁을 만류했으나, 대처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 인용: "다음에 미국이 알래스카를 침공당하거든 내가 그대로 말해주리다."

미국의 중재 노력

  • 미국의 외교적 입장: 미국은 아르헨티나의 군사 정권을 지원하고 있었으며, 자국의 동맹과 또 다른 동맹이 싸우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 전쟁 회피의 필요성: 미국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영국의 강경한 입장으로 인해 상황은 복잡해졌다.
  • 전략적 고려: 미국은 남미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아르헨티나의 군사 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영국 해군의 강경 입장

  • 해군참모총장의 입장: 영국 해군참모총장 헨리 리치 제독은 “반드시 탈환해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 경고의 내용: 리치는 “우리가 질질 끌며 조심조심하다 보면, 몇 달 내에 우리는 우리 말이 안 먹히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 군사적 긴장: 해군의 강경한 입장은 영국 정부의 전반적인 군사적 긴장감을 반영하고 있다.

마거릿 대처의 결단

  • 대처 총리의 성향: 당시 영국 총리는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마거릿 대처였다. 그녀는 보수당의 매파로 강경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 영토 방어의 의지: 대처는 자국의 영토가 잠식되고 대외 영향력이 침해당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 군에 명령: 즉시 포클랜드를 탈환할 것을 군에 명령하였다.

영국 국민의 분노와 반응

  • 국민의 감정: 아르헨티나의 일방적인 침공으로 자국 군인들이 굴욕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소식에 영국 국민들은 분노하였다.
  • 전국적인 반응: 결국 영국 전역이 아르헨티나를 응징하자고 부르짖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 경제적 위기: 당시 영국은 경제난과 내적 혼란이라는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으며, 영토 손실이 국민 정서와 국가 안정성에 미치는 영향이 우려되었다.

포클랜드 제도의 지정학적 중요성

  • 지정학적 위치: 포클랜드 제도와 사우스 조지아 섬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 남극 탐사 경로: 남극 탐사는 보통 칠레를 통해 접근하는데, 이 두 섬은 남미의 협조 없이도 남극 탐사를 가능하게 해준다.
  • 전략적 가치: 이 섬들은 영국의 군사적 및 경제적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해협 통제의 전략적 가치

  • 드레이크 해협의 중요성: 영국은 이 섬들 덕분에 칠레나 아르헨티나처럼 드레이크 해협을 오가는 선박들을 통제할 수 있다.
  • 대체 항로의 가치: 드레이크 해협은 파나마 운하가 차단될 경우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대체 항로의 가치를 지닌다.
  • 역사적 사례: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 동양함대가 영국 함대를 격파한 사건이 포클랜드 해전으로 이어졌다.

포클랜드 전쟁의 역사적 배경

  • 전쟁의 발단: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중국 산동 반도에 배치된 독일 동양함대가 본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태평양을 횡단하였다.
  • 영국의 군사적 대응: 영국은 순양전함 2척을 포클랜드로 급파하였고, 결국 포클랜드 해전에서 독일 함대를 격파하였다.
  • 군사적 역사: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포클랜드 전쟁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포클랜드의 석유 자원 개발

  • 자원 개발의 중요성: 1970년대 이후로 개발하고 있는 포클랜드 인근의 석유 자원은 영국에게 중요한 경제적 이익을 제공할 수 있다.
  • 전략적 자원: 석유 자원은 영국의 군사적 및 경제적 전략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영국의 강경 대응 이유

  • 침공의 선례: 포클랜드 침공을 그대로 놔두면, 각 지역에 가시처럼 알박아놓은 섬들을 상대 국가들이 무력으로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선례가 될 것이다.
  • 강경 대응의 필요성: 영국 입장에서는 강경 대응할 이유가 충분하였으며, 이는 국가의 안전과 영토 방어를 위한 필수적인 조치로 여겨졌다.

대처의 전쟁 선택

  • 협상에 대한 오해: 레오폴도 갈티에리는 영국 측에서 협상을 청하여 자신에게 설설 길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마거릿 대처의 선택은 전쟁뿐이었다.
  • 전쟁의 불가피성: 대처는 상황을 고려할 때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였다.

 

전쟁 발발과 영국의 결정

  • 대처 총리의 개전 결정: 대처 총리는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을 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 외교관계 단절: 영국은 아르헨티나와의 외교관계를 즉시 단절하였다.
  • 전쟁 승인: 상원과 하원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전쟁이 승인되었다.
  • 작전 명칭: 포클랜드 탈환작전은 "코퍼레이트 작전(Operation Corporate)"으로 명명되었다.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군사력 비교

  • 영국군의 회의적 반응: 영국군 내에서도 원정 거리 등의 이유로 전쟁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이 있었다.
  • 아르헨티나 공군의 전력: 1982년 당시 아르헨티나 공군은 미라주 III 전투기 20대, 전폭기 30대, A-4 스카이호크 공격기 60대를 포함하여 약 200여 대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 해군의 현대적 전력 부족: 아르헨티나 해군은 현대적인 전력을 갖추지 못했으나, 영국 기동부대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 영국 해군의 전투기 부족: 영국 해군은 경항공모함 두 척에서 발진하는 시해리어 수직이착륙 전투기 20여 대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 해군의 전투기 부족

  • 전투기 수의 한계: 영국 해군은 아르헨티나군의 공습에서 상륙부대를 보호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
  • F-4 팬텀 II와 중형 항모: 중형 항모 아크 로열이 있었더라면 아르헨티나 공군의 위협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이 있었다.
  • 아크 로열의 퇴역: 1979년 아크 로열의 퇴역으로 인해 영국의 함재기 대다수가 일선에서 물러나 아르헨티나가 영국을 우습게 보기 시작한 것이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 대처 총리의 위기감: 대처 총리는 전쟁 개시 시 여러 척의 호위함정과 경항모의 손실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다.

전쟁 준비와 외교적 노력

  • 철저한 준비 필요성: 대규모 원정을 위해 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 정치적 목적: "정치적인 목적에서라도 포클랜드 탈환은 필요하며, 할 수 있다"는 제1해군경 헨리 리치 대장의 조언이 있었다.
  • 전투함 동원: 본토와 지브롤터에 있는 전투함을 모두 동원하고 상선까지 징발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 단기전의 전략적 유리성: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점령이 길어질수록 불리해질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국제 사회의 지지 확보

  • 외교전 전개: 대처 총리는 국제 사회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외교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 UN 안보리 결의안: 아르헨티나의 침공 다음날, UN 안보리에서 아르헨티나를 침략자로 규정하며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 유럽 국가들의 수출 금지 조치: 유럽 국가들에게 대(對) 아르헨티나 수출 금지 조치를 유도하였다.
  • 미국의 지지 확보: 대처 총리는 미국의 지지를 얻어냈으며, 이는 아르헨티나와 영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미국의 중재와 아르헨티나의 반응

  • 미국의 동맹 관계: 미국은 영국과 아르헨티나 모두와 동맹이었으며, 갈등이 전쟁으로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 알렉산더 메이그스 헤이그 2세의 중재: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알렉산더 메이그스 헤이그 2세가 중재를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런던을 오갔다.
  • 중재안의 무산: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중재안인 '아르헨티나군이 철수한 후, 포클랜드 현지 주민들의 주민 투표로 귀속 국가를 결정한다'는 제안을 거부하였다.
  • 국민의 반응 우려: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철수 시 국민들이 외압에 굴복하는 것으로 여길까 우려하였다.

전쟁의 정당성과 국제적 반응

  • 아르헨티나의 침략 행위: 아르헨티나의 행동은 명백한 침략 행위로 간주되었다.
  • 국제 사회의 지원: 아르헨티나의 침략 행위로 인해 영국은 국제 사회의 지원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 남미계 원주민의 거주지 아님: 포클랜드는 원래 남미계 원주민들이 사는 섬이 아니었으며, 아르헨티나의 무단 점령은 정당성을 결여하였다.
  • 영국의 동조: 제2차 중동전쟁과 같은 구린 구석이 없었기에 모든 국가가 영국에 동조하였다.

원정의 시작과 군사 행동

  • 원정의 거리: 북대서양의 영국에서 남대서양의 포클랜드까지의 원정은 거의 지구 반바퀴를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 모든 선박과 항공기 동원: 4월 중순에서 하순에 걸쳐 긁어모을 수 있는 모든 선박과 항공기가 동원되었다.
  • 호화 여객선의 징발: RMS 퀸 엘리자베스 2와 같은 호화 여객선까지 징발하여 병력을 수송하였다.
  • 군사 행동의 시작: 1956년 수에즈 전쟁 이후 오랜만에 본격적인 군사 행동에 나선 것이다.

영국군 편제 개요

  • 제3코만도여단 상륙 이전: 영국군의 편제와 관련된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다.
  • 기동부대 및 전대: 다양한 기동부대와 전대의 명칭이 언급되며, 이들은 전투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제317기동부대: Task Force 317
    • 제317.0기동전대: Task Group 317.0
    • 제317.1기동전대: Task Group 317.1
    • 제317.8기동전대: Task Group 317.8
    • 제317.9기동전대: Task Group 317.9
    • 제324.3기동전대: Task Group 324.3

기동부대 및 전대 구성

  • 상륙 이후의 영국군 편제: 제5보병여단의 상륙 이후 영국군의 편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설명한다.
  • 기동부대의 재편성: 상륙 작전 이후에도 기동부대와 전대의 역할이 지속적으로 중요함을 강조한다.
  • 전투 준비 상태: 각 기동부대는 전투 준비 상태를 유지하며, 작전 수행을 위한 훈련과 전략을 수립한다.

영국 지상군 및 해군

  • 영국 지상군: 영국의 지상군 편제와 그 역할에 대한 설명이 포함된다.
  • 영국 해군: 해군의 작전 및 지원 역할이 강조된다.
  • 전략적 협력: 지상군과 해군 간의 협력 관계가 전투에서의 성공에 기여함을 나타낸다.

영국 공군의 역할

  • 영국 공군: 공군의 작전 및 지원 역할에 대한 설명이 포함된다.
  • 항공 지원: 공군은 지상군과 해군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항공 작전을 수행한다.
  • 전략적 중요성: 공군의 역할은 전투의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양국의 전략적 차이

  • 전략적 접근의 차이: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전략적 접근 방식의 차이를 설명한다.
  • 아르헨티나의 전략: 아르헨티나 대통령 레오폴도 갈티에리의 전쟁 전략이 언급된다.
    • 승리의 기대: 갈티에리는 승리할 경우 국가 영웅이 될 것이라 기대하였다.
    • 언론 통제: 패배하더라도 언론을 통제하여 국민을 속일 계획을 세웠다.
  • 영국의 현실적 접근: 영국은 전쟁을 진행하면서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아르헨티나의 전쟁 전략

  • 갈티에리의 기대: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의 이점을 강조하였다.
  • 언론 통제 계획: 패배하더라도 언론을 통해 국민을 속일 계획을 세웠다.
  • 외교적 무관심: 아르헨티나는 전쟁의 여파가 외교에 미칠 악영향을 고려하지 않았다.

영국의 외교적 대응

  • 대처 총리의 외교 노력: 마가렛 대처 총리는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설득하기 위해 직접 방문하였다.
  • 전쟁의 정당성 설명: 대처는 영국의 상황과 전쟁의 정당성을 설명하며 피노체트를 설득하였다.
  • 영공 배치 허락: 피노체트로부터 칠레 영공에 영국 항공기를 배치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대처의 외교적 노력

  • 우방국 설득: 대처는 미국을 포함한 우방국들을 돌며 아르헨티나의 기습 침공을 강조하였다.
  • 국제 사회의 반응: 주요 국가들은 영국 편을 들거나 중립을 지키게 되었다.
  • 아르헨티나의 고립: 최소한 아르헨티나 편을 들지 않도록 국제 사회의 반응이 형성되었다.

패러켓 작전 개시

  • 영국군의 반격 개시: 4월 말에 영국군이 반격을 개시하였다.
  • 작전 명칭: 이 작전은 "패러켓 작전(Operation Paraquet)"으로 명명되었으며, 사우스조지아 섬 탈환이 목표였다.
  • 군사적 의미: 군사적 의미는 크지 않지만, 상징적 의미에서 중요한 임무로 결정되었다.
  • SAS의 정찰 계획: 본격적인 작전 개시 전, SAS를 파견하여 아르헨티나군의 규모를 정찰할 계획이 수립되었다.

SAS의 초기 작전과 실패

  • 정찰 방법: SAS 대원들은 해군 대잠용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포투나 빙하에 상륙할 계획이었다.
  • 아르헨티나군의 예측: 이 작전의 이유는 아르헨티나군이 빙하를 가로질러 침투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조종사들의 반응: 해군 조종사들은 작전 내용을 듣고 비아냥거림을 보였으며, "차라리 폴라리스 미사일을 날리는 게 더 빠를걸요"라고 말했다.
  • 작전 실패: SAS 대원들은 4월 21일에 빙하에 도착했으나, 악천후로 인해 22일에 임무를 포기하고 귀환을 요청하였다.

헬리콥터 사고와 구조 작전

  • 헬리콥터 손실: 귀환 헬리콥터 중 2기가 악천후로 인해 눈밭에서 굴러 손실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 구조의 필요성: SAS 대원들과 승무원들이 밤새 얼어죽을 위험에 처하였기 때문에 구조가 필요하였다.
  • 이언 스탠리 소령의 활약: 유일하게 남은 웨식스 대잠헬기 조종사인 이언 스탠리 소령이 영웅적인 활약을 펼쳤다.
    • 세 번의 시도 끝에 날이 저물기 직전 포투나에 착륙하였다.
    • 제한 중량을 1,000kg 초과하여 모든 대원들을 태우고 귀환에 성공하였다.
  • 수훈장 수여: 스탠리 소령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전후 수훈장(DSO)**을 받았다.

영국군의 재침투와 관측소 설치

  • 재침투 작전: 하루 뒤, SAS와 SBS는 보트를 타고 다시 사우스조지아 섬에 침투하였다.
  • 관측소 설치: 이번에는 아르헨티나군이 주둔 중인 리스 인근에 관측소를 설치하였다.
  • 아르헨티나군의 규모: 관측된 아르헨티나 수비대는 소규모로, 탈환작전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 잠수함의 위협: 영국군은 아르헨티나 해군의 구형 발라오급 잠수함 산타페가 사우스조지아로 향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산타페 잠수함의 위협

  • 산타페의 동향 추적: 영국 해군은 산타페의 동향을 추적하기로 결정하고, 작전을 연기하였다.
  • 입항 가능성 판단: 모든 정보를 취합한 결과, 산타페가 아르헨티나군이 주둔 중인 그리트비켄이나 리스 중 하나로 입항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 헬기 수색 작전: 24일부터 그리트비켄을 헬기로 샅샅이 훑기 시작하였다.
  • 잠수함 포착: 25일 아침, 웨식스 헬기의 레이더로 잠수함을 포착한 이언 스탠리 소령은 폭뢰공격을 가하였다.

산타페 공격과 영국군의 승리

  • 산타페의 피해: 폭뢰공격으로 산타페의 밸러스트 탱크가 모두 파괴되어 잠항능력을 상실하였다.
  • 영국군의 공격: 영국군 헬기들이 기관총탄과 대전차미사일을 날려대며 산타페를 공격하였다.
  • 좌초 사건: 산타페는 최후의 수단으로 그리트비켄 항구로 돌진하여 해안에 좌초하였다.
  • 항복: 영국 해병대와 특수부대가 함포사격을 등에 업고 그리트비켄으로 쫓아오자, 산타페의 수비대원들은 항복하였다.

사우스조지아 섬 탈환

  • 항복 문서 서명: 317.9 전단 지휘관 브라이언 영 대령은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다.
  • 영국 국기 게양: "사우스 조지아의 그리트비켄에 영국 국기와 해군기가 펄럭이고 있음을 여왕폐하께 아룁니다."라는 전문을 본국에 보내 낭보를 알렸다.
  • 리스의 항복: 다음날, 리스의 아르헨티나군이 교전 없이 항복하면서 아르헨티나군의 짧았던 사우스조지아 지배는 영국군의 무혈점령으로 끝났다.

블랙 벅 작전의 시작

  • 전쟁의 시작: 본격적인 전쟁은 5월 1일에 시작되었다.
  • 작전 목표: 이날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의 비행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활주로에 폭격을 가하는 "블랙 벅 작전(Operation Black Buck)"을 시행하였다.
  • 작전 단계:
    1. 1단계: 아브로 벌컨 폭격기가 동원되었다.
    2. 2단계: 함재기 시해리어가 동원되었다.
    3. 3단계: 함포사격이 대미를 장식하였다.
  • 장거리 비행 기록: 대서양 어센션 섬에서 발진한 벌컨 폭격기가 왕복 7천km를 날아갔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블랙 벅 작전의 전투 결과

  • 폭격 목표: 블랙벅 작전의 구체적인 목표는 활주로 중앙을 폭격하여 일시적으로 파괴하는 것이었다.
  • 명중률 계획: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폭격 코스를 활주로와 비스듬한 방향으로 잡았다.
  • 폭탄 투하 결과: 투하한 폭탄들은 대부분 빗나가거나 활주로 가장자리에 떨어졌지만, 1발이 명중하였다.
  • 아르헨티나군의 심리적 영향: 블랙벅 작전은 아르헨티나군의 심리를 강타하여, 아르헨티나군이 미라주 III 전투기들을 본토 방공 임무로 전환하게 만들었다.

원자력 잠수함과 해상 교전

  • 날짜 및 사건: 1982년 5월 2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초의 극적인 해상 교전이 발생하였다.
  • 주요 군함: 영국 해군의 HMS 컨커러가 아르헨티나 해군의 헤네랄 벨그라노를 Mk 8 어뢰로 격침하였다.
  • 교전의 중요성: 이 사건은 원자력 잠수함의 실전 격침 첫 사례로 기록되며, 이후의 해상 전투에 큰 영향을 미쳤다.

HMS 컨커러의 배경

  • 함선 정보: HMS 컨커러는 처칠급 원자력 잠수함의 3번함으로, 1969년 진수되고 1971년 취역하였다.
  • 기능 및 역할: 이 잠수함은 영국 해군의 중요한 공격 원잠으로, 해상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헤네랄 벨그라노의 역사

  • 함선 정보: 헤네랄 벨그라노는 미국의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USS 피닉스(CL-46)**에서 파생된 군함이다.
  • 전후 배경: 이 군함은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국과 남미 국가 간의 상호 방어 지원 프로그램에 따라 아르헨티나 해군에 인도되었다.

교전 전개와 전략적 상황

  • 발견 및 추적: HMS 컨커러는 1982년 4월 30일 포클랜드 섬 남서쪽 바다에서 헤네랄 벨그라노를 발견하고 조용히 추적하였다.
  • 위험 요소: 당시 아르헨티나의 유일한 항공모함인 베인티싱코 데 마요가 포클랜드 섬 북쪽에서 접근하고 있었으므로, 영국 함대는 남북으로 협공당할 위험이 있었다.
  • 기상 문제: 아르헨티나 항공모함은 기상 문제로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하였고, 이로 인해 헤네랄 벨그라노도 공격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우드워드 제독의 명령

  • 명령 발신: GMT 5월 2일 0710시경, 우드워드 제독은 영국 본토의 잠수함사령부를 무시하고 **"발신 317.8기동전대 사령관, 수신 컨커러, 긴급 – 벨그라노 전단을 공격하라."**라는 전문을 통신위성에 업로드하였다.
  • 명령 삭제: 해군본부는 이 명령이 월권행위임을 인지하고 즉각 전문을 삭제하였으나, 우드워드 제독의 의도를 파악하였다.

벨그라노의 격침과 결과

  • 격침 시점: 컨커러는 GMT 17:00시에 잠망경 심도로 부상하여 변경된 교전수칙을 수신한 후, 5월 2일 오후 6시경 헤네랄 벨그라노에 어뢰를 발사하였다.
  • 격침 결과: 헤네랄 벨그라노는 두 발의 어뢰에 피격되어 20분 만에 침몰하였고, 323명의 승조원이 전사하였다.
  • 구조 작전: 침몰 당시 기상 악화로 인해 구조 신호를 받지 못한 호위 구축함들이 있었다.

벨그라노의 역사적 의의

  • 해군 전력의 변화: 아르헨티나 해군의 대부분이 포클랜드 해역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영국은 제해권과 제공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 전투의 결과: 이 사건으로 인해 영국은 포클랜드 섬을 공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아르헨티나군은 영국 해군에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정치적 논란과 여파

  • 논란의 시작: 영국 정부의 결정은 정치적 논란을 일으켰으며, Tam Dalyell 의원은 공격이 의도적으로 사태를 확전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대처 총리의 반응: 마거릿 대처 총리는 공격 명령에 대한 비난에 대해 **"우리 해군 애들을 지키기 위해서 함대에 위협이 되는 적함을 격침시켰다고 총리가 비난을 받는 나라는 영국뿐일 것 같다."**고 반박하였다.

결론과 후속 논의

  • 논쟁의 종결: 벨그라노 격침은 현장 지휘관의 의사와 총리의 군사 조언가의 권고를 수용한 결과로, 아르헨티나 정부도 이 사건이 적법한 전시행위임을 인정하였다.
  • 후속 연구: 이 사건은 군사 역사에서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으며, 원자력 잠수함의 실전 격침 사례로 여전히 주목받고 있다.

현재까지의 의미

  • 유일한 사례: 컨커러의 헤네랄 벨그라노 격침은 2023년 현재까지도 교전 상황에서 원자력 잠수함이 어뢰로 군함을 격침한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다.

셰필드 쇼크의 배경

  • 셰필드 쇼크는 1982년 5월 4일 아르헨티나 해군의 반격을 의미한다.
  • 이 사건은 해전사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래를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 아르헨티나군의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 엑조세 미사일을 사용하여 영국 해군의 HMS 셰필드를 격침시켰다.
  • 이 사건은 전투의 양상과 해군 작전의 전략적 접근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르헨티나의 공격 준비

  • 아르헨티나 본토에서 출격한 SP-2H 넵튠 해상초계기는 영국 함대의 위치를 탐지하기 위해 생존자 수색 작전을 수행하였다.
  • 이 초계기는 영국 해군의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 기만 작전을 사용하였다.
  • 영국 해군은 세 시간 가까운 정찰 비행 동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이후 쉬페르 에탕다르 두 기가 영국 함대의 남서쪽에서 저공으로 침투하여 공격을 감행하였다.

엑조세 미사일의 발사

  • 쉬페르 에탕다르는 수평선 아래에서 28해리 거리까지 접근한 후 레이더로 영국 함정의 위치를 파악하였다.
  • 이 공격에서 엑조세 미사일 두 발이 발사되었으며, 영국 기동부대의 42형 구축함을 목표로 하였다.
  • 글래스고 코벤트리는 미사일 접근을 감지하고 채프를 살포하여 회피하였으나, 셰필드는 피해를 입었다.
  • 미사일이 셰필드의 전투정보실에 명중하여 주요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셰필드의 피해와 구조 작업

  • 이 공격으로 셰필드의 총원 281명 중 20명이 전사하고, 26~63명이 부상하였다.
  • 다행히도 함 내 탄약고의 폭발은 피할 수 있었고, 배는 한동안 물 위에 떠 있었다.
  • 부상자는 HMS 허미즈로 이송되었고, HMS 애로우 HMS 야머스가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였다.
  • 생존자들은 MV 브리티시 에스크호에 탑승하여 어센션 섬으로 이송되었다.

영국 해군의 조사와 결과

  • 영국 해군은 피격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고, 주요 승조원들이 CIC에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 SCOT 위성 통신 장비의 신호가 레이더와 유사하여, ESM 장비 UAA-1이 잘못된 경고를 발생시켰다.
  • 5월 4일 하루에만 3, 4번의 가짜 경보가 울렸고, 실제 공격 시에는 경고가 오보로 판단되었다.
  • 작전실 근무 요원들은 피격 당시 전멸하였고, 조사 결과 대공전 장교가 책임을 지게 되었으나 정치적 이유로 군법회의 회부는 피하였다.

셰필드의 최종 침몰

  • 셰필드는 영국으로 예인 중에 침수되어 5월 10일에 최종 침몰하였다.
  • 이 사건은 영국 해군의 작전과 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셰필드의 침몰 사실은 아르헨티나가 영국 언론을 통해 알게 되었다.
  • 아르헨티나군은 전쟁 초반에 장거리 정찰이 가능한 기종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 조종사들의 증언이 신뢰도가 낮아, 전투 결과를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아르헨티나의 정보 부족

  • 아르헨티나군의 부족한 면모는 군대 조직이 남미 패권 다툼을 위해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 고속 장거리 전폭기 재급유기가 부족하여, 국경 지역의 소규모 분쟁에 대비한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 아르헨티나가 보유한 쉬페르 에탕다르 엑조세는 각각 5기와 5발에 불과하였다.
  • 전황을 뒤집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원으로, 영국군의 상륙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엑조세 미사일의 군사적 영향

  • 엑조세는 셰필드 격침 전과를 기록하며 대함 공격 수단으로 각광받았다.
  • 기존의 방공함들은 저고도 방공능력이 취약하였고, 엑조세는 이 약점을 정확히 찌른 것이다.
  • 이 사건은 시스키밍 대함 미사일의 위력을 보여주었으며, '셰필드 쇼크' 또는 **'엑조세 쇼크'**로 불리게 되었다.
  • 이후 군함 건조에서 저고도 방공 능력 CIWS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셰필드 쇼크의 의의

  • 셰필드 쇼크는 해전의 전술적 변화와 해군 작전의 전략적 접근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이 사건은 군사적 기술 발전과 전투 전략의 재조명을 촉발하였다.
  • 저고도 방공 능력의 필요성이 강조되었으며, 이는 이후 군사 작전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 Always Look on the Bright Side of Life의 가사를 부르며 침몰한 셰필드의 승조원들은 이 사건의 아이러니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폭풍전야의 전투 준비

  • 전투 배경: 헤네랄 벨그라노와 셰필드의 격침 사건 이후, 양측은 5월 8일까지 기상 상황이 악화되면서 휴지기를 가졌다.
  • 탐색전 재개: 5월 9일부터 영국의 포클랜드 공격에 대비하여 탐색전을 다시 시작하였다.
  • 정보 수집 작전: 아르헨티나 해군의 정보수집함 나르왈이 영국 함대를 정찰하던 중 시해리어에 포착되어 격침당하였다.
  • 공중 전투: 영국의 코벤트리-브로드소드 42-22 콤보가 아르헨티나의 스카이호크와 퓨마 헬기에 대해 미사일 공격을 가하여 퓨마 헬기를 격추하였다.

영국 해군의 정찰 작전

  • 정찰 필요성: 5월 10일 밤, 영국 기동함대는 포클랜드 해안을 면밀히 정찰할 필요가 있었다.
  • 명령의 위험성: HMS 얼래크리티에게 기뢰 여부를 확인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며, 이는 호위함의 격침 위험을 동반한 위험한 임무였다.
  • 임무 수행: 얼래크리티는 기뢰 대신 아르헨티나 해군 수송함 이슬라 데 로스 에스타도스를 발견하고 포격하여 가라앉혔다.
  • 전투의 긴장감: 이 임무는 지휘관 우드워드 제독의 결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상륙작전 수행을 위한 필수적인 조치였다.

아르헨티나 잠수함의 공격 실패

  • 산 루이스의 매복: 5월 11일, 아르헨티나의 209급 잠수함 산 루이스가 영국 기동함대의 이동 경로에서 매복하고 있었다.
  • 어뢰 발사 시도: 산 루이스는 SST-4 대수상함용 중어뢰 두 발을 발사하였으나, 기술적 문제로 인해 한 발은 발사되지 않았고 다른 한 발은 유도 와이어가 끊어졌다.
  • 결과: 어뢰는 영국의 호위함 대신 닉시 예인기만을 타격하게 되었고, 영국 함정들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 임무의 혼란: 얼래크리티와 애로우는 본대로 돌아와서야 닉시가 사라진 사실을 깨달았다.

스카이호크와 영국 함정의 전투

  • 공중 전투 발발: 5월 12일 새벽, 글래스고-브릴리언트의 42-22 콤보와 스카이호크 공격기 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 첫 번째 제파의 격추: 저공침투하는 스카이호크 세 대는 브릴리언트의 시울프 대공미사일에 의해 모두 격추되었다.
  • 두 번째 제파의 공격: 두 번째 제파의 공격 시, 글래스고의 시다트가 기계고장으로 사격을 하지 못하였고, 브릴리언트의 시울프도 발사에 실패하였다.
  • 결과: 두 함정은 스카이호크 네 대의 폭탄 공격을 받았으나, 다행히 글래스고는 불발탄 한 발만 관통당하였다.

SAS의 페블 섬 작전

  • 야전비행장 개설: 아르헨티나 공군은 페블 섬에 야전비행장을 개설하고 푸카라 경공격기와 스카이밴 수송기를 운용하고 있었다.
  • 위험 요소: 페블 섬은 상륙예정지점인 산카를로스와 가까워 공습의 위험이 컸다.
  • SAS의 개입: SAS는 페블 섬 비행장을 파괴하기 위해 8명으로 구성된 정찰조를 침투시켰다.
  • 작전 성공: 14일 밤-15일 새벽에 48명의 SAS 대원들이 비행장을 급습하여 푸카라 경공격기 6대와 스카이밴 수송기 1대, T-34C 훈련기 4대를 폭파하였다.

상륙전단의 포클랜드 합류

  • 상륙전단 출발: 5월 18일, 어센션 섬에서 출발한 상륙전단이 포클랜드 해역에서 기동함대와 합류하였다.
  • 해리어 부대의 합류: 영국 공군의 해리어 부대와 헬기를 실은 Ro-Ro 수송선 아틀란틱 컨베이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 작전 손실: 해리어 숫자가 17대까지 줄어들어 임무 수행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아틀란틱 컨베이어의 합류는 큰 도움이 되었다.
  • 상륙 준비: SAS와 SBS 정찰대원들이 주요 관측지점에 투입되어 관측소를 구축하고, 지상군 병력도 수송함에 분승하여 상륙 준비를 마쳤다.

상륙작전 준비 완료

  • 상륙작전의 중요성: 포클랜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상륙작전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 관측소 구축: SAS와 SBS 정찰대원들이 주요 관측지점에 투입되어 관측소를 구축하였다.
  • 지상군 병력 수송: 지상군 병력도 수송함에 분승하여 상륙 준비를 완료하였다.
  • 작전의 긴장감: 상륙작전의 성공 여부가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산 카를로스 만 상륙전 시작

  • 상륙전 시작일: 5월 21일, 영국군이 동포클랜드 서북쪽의 산 카를로스만에 상륙함으로써 본격적인 지상전이 시작되었다.
  • 목표: 영국 해병대 제3코만도 여단과 영국 육군 제5보병여단이 포트 스탠리를 목표로 하여 작전을 수행하였다.
  • 상륙 작전의 중요성: 이 상륙작전은 포클랜드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영국군의 지상전 개시를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아덴트함 피격과 영국 해군의 전략

  • 상륙 전략: 영국 기동부대는 엑조세 미사일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삼면이 구릉으로 둘러싸인 산 카를로스를 상륙해안으로 선택하였다.
  • 피해 상황: 저공 비행하는 FAA 전투기들을 발견하지 못해, 해협 안으로 진입한 전투함 일곱 척 중 네 척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HMS 아덴트는 침몰하였다.
  • 전략적 결과: 아르헨티나 조종사들이 상륙함 대신 호위함정에 공격을 집중함으로써, 상륙부대는 큰 피해 없이 해안 교두보를 형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포클랜드 대거와 공중전

  • 아르헨티나의 대응: 영국 기동부대의 상륙 시도가 포착되자, 아르헨티나 공군과 해군항공대는 본토에서 63소티, 포클랜드에서 12소티를 발진하여 총 75소티로 대응하였다.
  • 손실: 21일 하루에만 대거 5대, 스카이호크 5대, 푸카라 경공격기 2대를 잃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으며, 이후 이 날의 출격량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 무력화된 전투기: 게릴라 작전에는 유용한 푸카라와 아에르마키가 현대전에서는 무력하게 되었고, 블로우파이프 같은 휴대용 대공 미사일에 제압당하였다.

HMS 안텔로프의 폭발과 손실

  • 기상 상황: 22일 하루 동안 소강상태를 보인 포클랜드 항공전은 23일부터 다시 격렬해졌다.
  • 아르헨티나의 공격: 아르헨티나 공군은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격렬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이 과정에서 대거와 스카이호크 한 대씩을 잃었다.
  • HMS 안텔로프의 폭발: 불발탄에 맞은 HMS 안텔로프가 폭탄 해체 시도 도중 신관이 작동하여 격침되었으며, 시해리어 한 대도 추락하였다.
  • 손실 비교: 24일 아르헨티나군의 공습이 이어졌으나, 영국 해군의 손실은 전무한 반면 아르헨티나군은 대거 세 대와 스카이호크 한 대를 추가로 잃었다.

아르헨티나 독립기념일의 공격

  • 기념일 공격: 5월 25일 아르헨티나 독립기념일을 맞아 아르헨티나군은 쉬페르 에탕다르를 동원하여 영국 함대 본진에 2발의 엑조세 미사일을 발사하였다.
  • 영국군의 대응: 이번에는 영국군이 제대로 탐지하고 즉시 대응하였으며, 본대는 타격을 입지 않았으나 아틀란틱 컨베이어에 1발이 명중하였다.
  • 결과: 아틀란틱 컨베이어는 적재된 헬기들과 함께 가라앉으면서 헬리콥터를 이용한 대규모 상륙작전이 힘들어졌고, 아르헨티나군은 심각한 보급난을 겪고 있었다.

코벤트리함의 격침

  • 공격의 전개: 아르헨티나군의 공습이 계속되었고, 코벤트리-브로드소드 콤보가 공격을 받았다.
  • 전투 시스템 오류: 브로드소드의 대공 레이더가 아르헨티나군 스카이호크를 잘못 인식하여 공격에 실패하였다.
  • 격침 결과: 코벤트리는 1000파운드 폭탄 세 발을 맞고 침몰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19명이 사망하고 170명이 구조되었다.
  • 영국 해군의 손실: 이는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 해군의 마지막 대형함 손실로 기록되었다.

구스 그린 전투와 영국군의 승리

  • 전투 개시: 5월 28일, 제3코만도여단 주력이 포트 스탠리 서북쪽의 틸 인렛으로 기동하는 동안 제2공수대대는 구스 그린에서 아르헨티나군과 전투를 벌였다.
  • 피해 상황: 영국군은 전사 18명, 부상 64명에 반해 아르헨티나군은 전사 45명, 부상자 121명, 961명이 포로로 잡혔다.
  • 아르헨티나군의 항복: 아르헨티나 육군은 전투에서 패하고 지친 상태에서 구르카병들이 온다는 소문에 항복하였다.
  • 전투력 문제: 구스 그린의 아르헨티나 육군 병사들은 신병들로 전투력과 사기가 의심스러웠으며, 쉽게 항복하였다.

아르헨티나군의 보급난과 전투력

  • 제해권 장악: 영국이 제해권을 장악한 이상, 추가 지원이 없는 아르헨티나군은 질 수밖에 없었다.
  • 보급 문제: 아르헨티나군은 포클랜드에 보병을 1만여 명 수송했으나, 제해권을 잃으면서 후속 보급이 매우 힘들어졌다.
  • 탄약 부족: 개인 화기조차 탄약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이는 전투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보급의 중요성: 서경석 퇴역 장군은 보급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포클랜드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군의 방한 장비 부족을 사례로 들었다.

아르헨티나군 조종사들의 활약

  • 조종사들의 임무: 아르헨티나군 수송부대 조종사들은 영국군이 제공권을 장악한 상황에서도 보급 및 부상자 후송 임무를 지속적으로 수행하였다.
  • 위험한 비행: 조종사들은 한밤중에 악천후를 뚫고 호위기도 없이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이로 인해 영웅 칭호를 받을 만한 활약을 하였다.
  • 격추 사례: 아르헨티나군의 C-130이 초계 중이던 해리어에게 격추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엑조세 미사일의 발사 시도

  • 상황 설명: 아르헨티나군은 상륙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고 지상전에서도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 최후의 수단: 아르헨티나군은 전세를 되돌리기 위해 마지막 엑조세 미사일 1발을 사용하여 영국의 항공모함을 격침시키려 시도한다.
  • 작전의 가능성: 엑조세 단 한 발로 항공모함을 가라앉히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이 강조된다.
  • 공중 지원: 해군항공대의 스카이호크가 엑조세의 발사 궤적을 따라 공격하여 항공모함에 추가적인 타격을 가하는 작전이 수립된다.

공중 지원 작전의 계획

  • 작전 계획: 5월 30일, 리오 그란데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쉬페르 에탕다르 2기가 공중급유를 받은 후 포클랜드 제도 남쪽으로 우회하여 영국 항모의 예상 위치로 접근한다.
  • 타겟 선정: 레이더상에 나타난 세 척 중 가장 크게 보이는 표적을 향해 엑조세 한 발을 발사한다.
  • 스카이호크의 역할: 스카이호크 4기 편대가 엑조세의 로켓모터 연기를 따라 영국 함대로 돌진하여 공격을 감행한다.
  • 작전의 복잡성: 이 작전은 아르헨티나군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한 복잡한 계획이었음을 나타낸다.

영국 해군의 방어 전략

  • 영국 해군의 배치: 아르헨티나군의 예상과 달리, 우드워드 제독은 항모 두 척을 완전봉쇄구역 한참 외곽에 배치하였다.
  • 호위전대 구성: 영국 해군 함정들은 항공모함이 아니라 HMS 엑세터, HMS 안드로메다, HMS 어벤저로 이루어진 호위전대였다.
  • 기동부대의 우위: 아르헨티나군은 여전히 기동부대에 비해 훨씬 대규모의 항공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영국 해군의 전략적 배치로 인해 공격이 어려워졌다.
  • 정보의 중요성: 아르헨티나군은 영국 해군의 배치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군의 정보 부족

  • 정찰기의 상태: 아르헨티나군의 SP-2H 넵튠 해상초계기는 심한 노후화로 인해 비행 중 공중분해될 우려가 있어 5월 하순부로 비행 임무에서 해제되었다.
  • 정보 수집의 실패: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군은 영국 해군의 실제 배치 상황을 알아챌 방법이 없었다.
  • 전략적 실수: 정보 부족은 아르헨티나군의 공격 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나타낸다.
  • 결과의 중요성: 정보의 부족은 전투의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엑조세 미사일의 실패

  • 영국 해군의 대응: 영국 해군 호위전대는 레이더 탐지를 위해 잠시 상승한 쉬페르 에탕다르를 포착하고 즉시 채프를 살포하여 기만 및 회피 작전을 수행하였다.
  • 엑조세의 실패: 엑조세는 채프에 속아 아무 피해도 입히지 못하고 먼 수평선을 향해 사라졌다.
  • 공격의 결과: 아르헨티나군의 절박한 시도는 아무 전과도 올리지 못한 채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 전투의 교훈: 이 사건은 전투에서의 정보와 기만 작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스카이호크의 공습 시도

  • 공습의 시도: 엑조세 공격에 뒤이어 스카이호크 4기 편대가 기동부대를 공습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날아들었다.
  • 격추 사건: HMS 엑세터에게 두 기가 격추당하고 남은 두 기가 투하한 폭탄도 모두 빗나갔다.
  • 영국 해군의 방어 능력: HMS 엑세터는 1022형 대공레이더를 탑재하고 있어 저공목표 탐지능력이 향상되었다.
  • 결과의 분석: 아르헨티나군의 공격은 영국 해군의 방어 능력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아르헨티나군의 허위 주장

  • 주장 내용: 아르헨티나군은 "이번에 발사한 엑조세가 인빈시블에 명중했다!"라고 발표하였다.
  • 영국의 반응: 영국은 즉시 아르헨티나군의 주장을 일축하였으나, 작전보안상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 정보의 왜곡: 이로 인해 한동안 아르헨티나 측의 발표대로 인빈시블이 손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 언론의 침묵: 아르헨티나군이 처음 엑조세 공격의 성공을 보도했던 영국 언론은 이번에는 침묵하였다.

앤드루 왕자의 위험한 상황

  • 왕자의 임무: 마지막 공격 당시에 시킹 헬리콥터 조종사로 근무 중이던 앤드루 왕자가 엑조세 기만용 채프 살포 임무를 받고 인빈시블의 갑판 위에 있었다.
  • 위험 요소: 만약 공격이 실제로 성공했다면 앤드루 왕자는 생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 전투의 인물: 앤드루 왕자의 존재는 전투의 긴박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 역사적 맥락: 이 사건은 전투의 개인적 측면을 강조하며, 전투의 결과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영국군의 포클랜드 전투 시작

  • 전투 시작일: 5월 31일, 영국군은 포트 스탠리를 내려다보는 켄트 산을 탈취하였다.
  • 전략적 목표: 아르헨티나 지상군 주력을 포위할 준비를 갖추었다.
  • 방어군 이동: 이 지역을 방어하던 12보병연대 병력 대부분이 구스 그린으로 이동한 후, 방비가 허술하다는 보고가 있었다.
  • 영국 해병의 작전: SAS 정찰대원들의 보고를 바탕으로 영국 해병 42코만도 K중대가 헬기로 강습하여 아르헨티나군의 허를 찌른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국제적 고립

  • UN의 제안: UN은 아르헨티나군에게 포클랜드에서 철수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아르헨티나는 이를 거부하였다.
  • 아르헨티나의 인식: 아르헨티나는 자신들을 남미가 아닌 서방 백인 국가로 생각하고 있었다.
  • 지원 요청: 전세가 기울자 아르헨티나는 다른 중남미 국가들의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대부분의 국가들은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제도 침공을 비난하거나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 칠레의 태도: 아르헨티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칠레는 영국에 영공을 통과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영국군의 상륙 작전과 피해

  • 상륙 작전 날짜: 6월 8일, 영국 육군 웨일스 근위연대 1대대가 상륙 작전을 펼쳤다.
  • 항공 호위 부족: 상륙 작전 당시 항공 호위가 부실한 상태였다.
  • 피해 상황: 상륙함 (LSL) 2척이 아르헨티나의 A-4 공격기에 의해 심한 피해를 입었다.
  • 특정 상륙함 피해: 3천톤급 RFA 서 갤러해드는 탄약 유폭으로 전소되어 18일 후 침몰하였다.

아르헨티나군의 전술과 대응

  • 민항기 사용: 아르헨티나군은 급히 차출한 민항기로 이루어진 미끼 부대를 사용하여 영국의 해리어들을 농락하였다.
  • 오인 공격: 민항기를 영국제 B-108 캔버라 폭격기로 오인하게 만들어, 아르헨티나의 A-4 공격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 후속 공격: 아르헨티나 공군은 후속 편대를 발진시켜 추가 공격을 실시하였으나, 2차 공격대의 A-4는 영국군 해리어들에게 AIM-9L 미사일에 맞고 격추당하였다.
  • 전술적 효과: 민항기를 이용한 전술은 피로도를 쌓는 효과가 있었고, 저공 침투하는 A-4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영국군의 최후 공세와 전투

  • 공세 시작일: 6월 11일, 영국군의 최후 공세가 개시되었다.
  • 칠레 영공 활용: 영국군은 개방된 칠레 영공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며 작전을 수행하였다.
  • 아르헨티나의 방어선: 아르헨티나군은 포트 스탠리의 4개 방어선, 특히 롱돈(Longdon) 산에서 의외로 분투하였다.
  • 롱돈 방어선의 붕괴: 6월 12일, 롱돈 방어선이 뚫리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롱돈 산 전투와 아르헨티나의 패배

  • 마지막 방어선: 아르헨티나군의 마지막 방어선은 텀블다운 산 와이어리스 능선이었다.
  • 전투 기간: 6월 13일~14일 이틀 동안 텀블다운 산과 그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 영국군의 전투 배치: 5보병여단과 3코만도여단이 투입되었으며, 스코츠 가드가 주공을 맡았다.
  • 아르헨티나군의 저항: 아르헨티나 제5해병대대는 잘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였다.

전쟁의 종결과 영국군의 승리

  • 항복일: 아르헨티나군은 텀블다운이 함락된 날인 6월 14일 항복하였다.
  • 전쟁 결과: 포클랜드 전쟁은 영국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 전후 상황: 전쟁이 끝난 후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의 많은 장비를 노획하였다.
  • 장비 목록: 영국군은 사용 가능한 퓨마 헬리콥터 경비함정 등을 포함한 다양한 장비를 확보하였다.

전후 아르헨티나 군 장비 노획

  • 노획 장비 목록: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의 다양한 군사 장비를 노획하였다.
    • 트럭: 메르세데스-벤츠 MB 1112/13/14 트럭 100대
    • 장갑차: 파나르 AML-90 수색정찰장갑차 12대
    • 미사일 발사대: 롤랜드 지대공미사일 발사대 1기, 타이거캣 지대공미사일 발사대 3기
    • 헬리콥터: UH-1H 8기, CH-47 치누크 1기
  • 탄약 및 화기: 7.62 mm 탄약 400만발, 개인화기 11,000정 등 다양한 무기와 탄약을 확보하였다.

알헤시라스 작전 개요

  • 작전의 비밀성: 알헤시라스 작전은 1급 기밀로 분류되어 있었으나, 2003년에 공개되었다.
  • 작전의 목적: 아르헨티나 특수부대는 지브롤터에 있는 영국 함대를 폭파시키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 작전의 배경: 1982년 4월, 아르헨티나 해군은 영국 군함을 폭파하여 포클랜드 해협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 작전의 실행: 호르헤 아나야 제독의 지휘 아래, 아르헨티나 공작조는 위조 여권을 사용하여 스페인의 알헤시라스에 잠입하였다.

작전 계획과 실행

  • 작전의 세부 계획: 아르헨티나 해군은 영국 군함을 폭파하기 위해 특수작전을 세웠다.
  • 잠입 작전: 공작조는 지브롤터와 마주하고 있는 스페인 지역에 거점을 설치하였다.
  • 작전의 방법: 다이버들이 이탈리아산 흡착기뢰를 군함에 설치하고 빠져나오는 방식으로 작전을 계획하였다.
  • 초기 목표: 처음에는 유조선을 폭파하려 했으나, 환경 오염과 스페인의 반발을 우려하여 계획이 변경되었다.

작전 중의 문제점

  • 기회 포착의 실패: 아르헨티나 공작조는 지브롤터를 오가는 함대를 보고 기회를 엿보았으나, 본국의 지령에 따라 시간을 낭비하였다.
  • 스페인 정부의 반응: 스페인 총리는 아르헨티나 공작조의 작전이 외교적 분쟁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였다.
  • 부주의한 행동: 공작조는 렌터카와 호텔을 자주 바꾸며 부주의하게 행동하여 마을 사람들의 의심을 샀다.
  • 정보 노출: 영국 정보부는 아르헨티나 대사관의 통신량 증가를 도청하여 작전이 노출되었다.

스페인 정부의 반응

  • 스페인의 외교적 입장: 스페인은 아르헨티나를 버리고 영국 편을 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 사태 처리 결정: 스페인 정부는 경찰을 동원하여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기로 결심하였다.
  • 민주화 과정: 당시 스페인 총리는 민주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며, 영국의 협조가 필요하였다.
  • 외교적 우려: 스페인은 1982 FIFA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외교 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체포와 그 후의 처리

  • 체포 사건: 아르헨티나 공작조원 페르난데스 해군 대위는 자신이 전쟁포로라고 주장하였으나, 스페인 경찰은 이를 믿지 않았다.
  • 경찰의 반응: 경찰은 그를 조롱하며, 아르헨티나 해군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 내무부의 지령: 체포 후, 스페인 경찰은 아르헨티나 공작조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우호적으로 대처하였다.
  • 사건의 은폐: 스페인 정부는 사건을 절대 노출하지 말고 조용히 처리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사건의 은폐와 결과

  • 추방 처리: 체포된 아르헨티나 공작조는 재판이나 심문 없이 아르헨티나로 추방되었다.
  • 기록의 파기: 관련 기록은 모두 파기되었고, 남은 자료는 기밀로 남았다.
  • 후속 공개: 훗날 관련 자료가 공개되었으나,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 스페인 정부의 결정: 사건을 묻어버리고 싶었던 스페인 정부의 결정이 사건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키홀 작전 개요

  • 분쟁 지역: 포클랜드 제도, 사우스 조지아 제도, 사우스 샌드위치 제도는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분쟁 지역이었다.
  • 기상관측소 건설: 1955년 툴레 섬에 기상관측소를 건설하였으나, 화산 폭발로 철수하였다.
  • 아르헨티나의 군사적 행동: 포클랜드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군은 사우스 샌드위치 제도를 점령하고 군기지를 건설하였다.
  • 군기지의 목적: 이 군기지는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기 위한 시설을 포함하였다.

아르헨티나의 군기지 건설

  • 군기지의 구성: '코르베타 우루과이'라는 군기지는 라디오 기지, 기상관측소, 헬리패드 등을 포함하였다.
  • 주둔군의 배치: 아르헨티나 군은 해당 기지에 상주하며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였다.
  • 영국의 반응: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가 패전한 후, 영국은 키홀 작전을 개시하였다.
  • 작전의 목표: 키홀 작전은 툴레 제도의 재탈환 및 아르헨티나의 영향력 소거를 목표로 하였다.

키홀 작전의 목표와 실행

  • 작전의 실행: 6월 14일 아르헨티나가 항복을 선언한 후에도 기지의 주둔군은 철수하지 않았다.
  • 영국 해병대의 작전: 제42코만도가 헬리콥터로 툴레 섬에 상륙하여 주둔군을 무장해제시켰다.
  • 작전의 결과: 주둔군은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이동 후 아르헨티나 본토로 추방되었다.
  • 기지의 상태: 기지는 버려졌으나, 국기 게양대에 아르헨티나 국기가 다시 게양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기지의 국기 교체 사건

  • 국기 교체의 발견: HMS 헤카테가 지역을 정찰하던 중, 기지의 국기가 아르헨티나 국기로 교체된 것을 발견하였다.
  • 교체의 불확실성: 누가 국기를 교체했는지는 불분명하였다.
  • 영국의 대응: 아르헨티나가 이를 영유권 주장에 사용할 것을 우려하여 HMS 아리아드네를 파견하였다.
  • 기지 철거: 영국은 기지를 철거하여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차단하였다.

포클랜드 전쟁 개요

  • 전쟁 발발일: 1982년 7월 21일
  • 영국 시민들의 반응: 영국 남부 포츠머스 항으로 개선하는 원정 기동 함대 기함 HMS 허미스에 대해 열렬한 환대가 있었다.
  • 전쟁 기간: 3개월간의 단기전으로, 영국의 군사적 존재감을 알리는 중요한 전쟁이었다.

전사자 및 민간인 피해

  • 전사자 수:
    • 영국 측: 255명
    • 아르헨티나 측: 649명
  • 자살자 수: 21세기까지 양측 참전 용사 중 자살자가 전사자를 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영국 국방부에 따르면 포클랜드 참전 군인의 7%, 즉 95명이 자살과 관련된 죽음을 맞았다.
  • 민간인 피해:
    • 영국군의 오폭으로 사망한 포클랜드의 영국인 주민 3명
    • 아르헨티나 해군에 동원된 민간인 선원 16명 사망

갈티에리 대통령의 패배

  • 전쟁의 목적: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은 불만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 선전 내용: 전쟁 내내 이기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결과적으로 역대급 참패를 당했다.
  • 항복 후 연설: 갈티에리는 아르헨티나의 패배를 인정하는 치욕적인 대국민 연설을 하였으며, 문맥을 통해 패배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 시민 반응: 시민들이 패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으나,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혼란

  • 대통령 권좌 이양: 갈티에리는 6월 18일 레이날도 비그노네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 정치적 불안정: 비그노네 역시 1983년 여러 반정부 세력의 공격을 받아 몰락하였다.
  • 정권의 변화: 이 기간 동안 아르헨티나의 국가수반부는 완전히 혼란스러웠으며, 2년 동안 대통령이 4명이나 바뀌었다.
  • 독재 정권의 붕괴: 1976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은 붕괴되었고, 이후 라울 알폰신을 대통령으로 삼은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영국의 전쟁 비용과 피해

  • 전비와 사상자: 영국은 막대한 전비를 썼고 사상자도 발생했으나, 미국의 베트남 전쟁과 비교할 수는 없다.
  • 전쟁 기간: 포클랜드 전쟁은 3개월간 벌어진 단기전이다.
  • 전사자 수: 영국군 전사자는 255명, 부상자는 775명에 불과하다.
  • 전쟁의 결과: 포클랜드 전쟁은 영국의 명백한 승리로, 보수당 정권을 연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 경제의 변화

  • 70년대 경제 상황:
    • 오일 쇼크로 연평균 20% 이상의 인플레이션 발생
    • 낮은 생산성과 평균 10.1%의 실업률로 재정 악화
    • 연간 2.8%의 저성장 기록, 1인당 GDP가 세계 18위로 하락
  • 1980년대 경제 회복: 1980년대 후반부터 경제가 다시 살아나 2016년 기준으로 세계 13위에 올랐다.
  • 농업 기계화: 1980년대 이후 영국의 농업은 성공적으로 기계화되어 2000년에는 2%의 노동력으로 국내 필요량의 **60%**를 생산하였다.
  • 전쟁의 영향: 전쟁으로 인해 영국 경제가 살아났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전쟁으로 경제를 망치지는 않았다는 점이 강조된다.

신자유주의의 확산

  • 신자유주의의 역할: 포클랜드 전쟁이 신자유주의가 전세계를 휩쓰는 방아쇠가 되었다고 주장된다.
  •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 레이건 대통령만으로는 신자유주의화가 어려웠으나, 대처가 승리에 힘입어 재집권함으로써 신자유주의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 1982년 실업률: 전쟁 발발 직전 영국의 실업률은 10%, 실업자 수는 300만명에 달했다.
  • 대처의 경제 정책: 대처는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으며, 감세, 규제 완화, 정부 지출 축소, 공기업 민영화 등의 조치가 영국 경제 회복에 기여하였다.

대처 총리의 경제 정책

  • 정권의 위기: 당시 영국 정권은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며, 대처는 체임벌린과 함께 가장 무능한 수상으로 평가받았다.
  • 전쟁 승리의 영향: 포클랜드 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대처는 재집권하였고, 이후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 정책의 벤치마킹: 다른 나라들도 대처의 경제 정책을 자국의 실정에 맞추어 벤치마킹하기 시작하였다.
  • 대처의 유산: 대처는 전쟁의 승리로 인해 최고 지지율 **98%**를 기록하였으나, 그녀의 사망 시기에는 대처의 정책이 남긴 유산이 영국 서민들을 괴롭혔다는 비판이 있었다.

신자유주의의 긍정적 및 부정적 평가

  • 경제 호황 기여: 신자유주의화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내내 이어지던 경제 호황에 크게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다.
  • 경제적 양극화: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경제적 양극화를 더욱 강화하고 대침체의 발생에 일조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존재한다.

 

프랑스의 무기 판매와 루머

  • 프랑스의 무기 판매: 아르헨티나에 엑조세와 쉬페르 에탕다르 조합을 판매한 프랑스에 대한 루머가 존재한다.
  • 정보 유출 주장: 일부에서는 프랑스가 영국에 엑조세의 정보를 넘겨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 루머의 근거: 이러한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프랑스는 아르헨티나의 기습 공격 이후 즉각적으로 무기 인도를 중지하였다.
  • 결론: 이 주장은 논할 가치가 없는 억지 주장으로, 프랑스는 고객과 동맹국 모두의 의리를 지켰던 것이다.

프랑스의 무기 수출 중단

  • 무기 인도 중단: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기습하자 프랑스는 엑조세와 쉬페르 에탕다르의 인도를 중지하였다.
  • 정보 비공유: 프랑스는 영국에도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
  • 영국의 상황: 영국은 이미 70년대부터 엑조세를 도입해 운용 중이었기 때문에 추가 정보가 필요하지 않았다.
  • 결론: 프랑스의 결정은 고객과 동맹국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전쟁 준비 부족

  • 아르헨티나의 전쟁 발발: 아르헨티나는 단 5발의 대함 미사일만으로 급하게 전쟁을 일으켰다.
  • 주문 물품 미수령: 아르헨티나는 주문한 무기를 모두 받지 못한 상태였다.
  • 비정상적인 전쟁 발발: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킨 아르헨티나의 결정은 이상한 것으로 평가된다.
  • 비판적 시각: 아르헨티나의 전쟁 준비 부족은 전반적인 전략적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

프랑스의 무기 수출 금지

  • 무기 수출 금지 조치: 아르헨티나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는 프랑스의 독단이 아니라 유럽 전체의 결정이었다.
  • 독일의 행동: 독일 또한 아르헨티나에 구축함의 인도를 전쟁 동안 보류하였다.
  • 유럽의 일관된 정책: 이러한 조치는 유럽 국가들이 아르헨티나의 군사적 행동에 대해 일관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결론: 프랑스의 무기 수출 금지는 국제적인 협력의 일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쟁 후의 무기 인도

  • 전쟁 종료 후 약속 이행: 프랑스는 전쟁이 끝난 후 약속을 지켜 주문한 물건을 정확히 넘겨주었다.
  • 프랑스의 신뢰성: 이는 프랑스가 고객과의 신뢰를 중시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 무기 인도의 중요성: 전쟁 후에도 무기 인도를 이행하는 것은 국제 관계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 결론: 프랑스는 전쟁 중에도 고객에 대한 의리를 지켰던 것이다.

합동 훈련과 정보 제공

  • 합동 훈련의 배경: 프랑스와 영국은 포클랜드 전쟁 이전부터 정기적으로 합동 훈련을 실시하였다.
  • 훈련의 내용: 이 훈련에서 프랑스 공군은 미라지 전투기를 사용하였다.
  • 영국 조종사의 참여: 훈련에 참가했던 영국 조종사들은 포클랜드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 정보 제공의 한계: 뉴질랜드 공군이 제공한 정보는 미국제 A-4 스카이호크 공격기에 대한 것이었으며, 아르헨티나군이 사용하던 모델에 대한 정보는 불확실하였다.

미라지의 정보 유출 논란

  • 정보 유출 주장: 일부에서는 프랑스가 영국에 아르헨티나의 주력기인 미라지의 비행 성능과 정보를 넘겨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 기종의 노후화: 미라지는 배치된 지 30년이 지나고 수출까지 이루어진 기종으로, 정보 유출이 전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은 비정상적이다.
  • 정보의 중요성: 전투기와 같은 군사 장비의 정보는 전쟁의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 결론: 정보 유출 주장은 사실과 다르며, 훈련의 성격을 고려할 때 과장된 측면이 있다.

아르헨티나의 기술적 한계

  • 엑조세 운용의 어려움: 아르헨티나는 기술적으로 매우 진보된 엑조세를 자력으로 운용하지 못하였다.
  • 기술 장벽: A-4 스카이호크와 비유도 폭장만 사용하던 아르헨티나는 상당한 기술 장벽에 직면하였다.
  • 기술 지원의 필요성: 프랑스에서 파견한 기술진들이 포클랜드 전쟁 시에도 남아 셋업을 도와주었다.
  • 결론: 아르헨티나의 기술적 한계는 전쟁 수행 능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방산업체의 입장

  • 방산업체의 본질: 방산업체는 전쟁을 통해 무기를 판매하는 것이 본질이다.
  • 비판에 대한 반론: 방산업체와 군대의 존재를 비판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 프랑스의 경제 상황: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프라가 파괴된 프랑스는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 방산업체를 지원하였다.
  • 결론: 방산업체의 발언은 방위산업의 본질과 당시 프랑스인의 솔직한 마음을 반영하고 있다.

 

전후 양국의 외교 관계

  • 전후 양국의 단교 상태: 전후 아르헨티나와 영국은 단교 상태였다.
  • 재수교 날짜: 1990년 2월 5일에 재수교가 이루어졌다.
  • 영토 주장: 양국은 여전히 포클랜드 제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 아르헨티나의 교육: 아르헨티나는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이를 공교육에 포함시켜 국민들에게 중요하게 가르친다.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

  • 영유권 주장 지속: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 국민 교육의 중요성: 영유권 주장을 공교육에 포함시켜 국민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 경제적 어려움: 아르헨티나는 경제가 어렵고 군 현대화 상황도 힘들다.
  • 전쟁 가능성 평가: 단기적으로 제2차 포클랜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평가된다.

전사자 유골 반환 문제

  • 전사자 유골 반환 요청: 전후 아르헨티나 전사자 중 섬에 남겨진 시신 236구를 영국에서 가져가라고 요청하였다.
  • 아르헨티나 정부의 입장: 아르헨티나 정부는 그들이 이미 '고국'에 있다고 주장하며, 영국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포클랜드의 영국 주권을 인정하게 된다고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 유골의 현재 상태: 아르헨티나 전사자 유골은 포클랜드 다윈 묘지의 아르헨티나 전사자 구역에 묻혀 있다.
  • DNA 검사 합의: 2016년에 신원불명의 유골들의 DNA 검사를 마치기로 합의하고, 2017년에 최종보고서를 작성하였으나, 여전히 유골 반환에 대한 아르헨티나 내부의 이견이 존재한다.

지뢰 처리와 전후 상황

  • 지뢰의 수: 포클랜드 전쟁 당시 2만개의 지뢰가 깔렸다.
  • 지뢰 처리의 어려움: 전후에도 지뢰 처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 최종 지뢰 해체: 2020년에 마지막 지뢰를 해체하고, 드디어 지뢰가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선포하였다.
  • 안전 문제: 지뢰 처리 문제는 전후 상황에서 중요한 안전 문제로 대두되었다.

언론의 역할과 전쟁 보도

  • 영국 언론의 보도: 포클랜드 전쟁 당시 영국 언론의 무분별한 전황 보도가 아르헨티나의 전쟁 수행에 도움이 되었다.
  • 언론 통제: 언론에서 자체적으로 통제한 내용을 다루는 정훈 교육 자료가 존재한다.
  • BBC의 중립성: 당시 BBC는 언론의 중립을 유지하면서 '아군'이 아닌 '영국군'이라고 불렀다.
  • 군사 기밀 누설: 영국군은 종전 후 군사기밀 누설을 이유로 BBC에 고소장을 제출하였다.

영국의 군사 지원과 오판

  • 아르헨티나 군부의 오판: 아르헨티나 군부는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이 영국을 돕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 실제 군사 지원: 호주와 캐나다는 영국에 여러 군사적 지원을 제안하였고, 뉴질랜드는 아르헨티나군의 장비 정보를 넘기는 것은 물론 군함을 보내겠다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 전력 공백 메우기: 전쟁 발발 후 인도양에 배치된 영국 해군이 포클랜드 전장으로 출동하자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이 전력 공백을 메워주었다.
  • 외교적 압박: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호주, 뉴질랜드는 아르헨티나와 수교를 끊거나 경제 제재를 가하는 외교적 경제적 압박을 병행하였다.

무기와 전투 장비의 유사성

  • 제식 소총의 유사성: 당시 영국군과 아르헨티나군은 제식 소총이 동일하여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의 탄약을 사용하였다.
  • 소총의 종류: 아르헨티나군은 벨기에제 FN FAL로, 영국군은 FN FAL의 라이센스 버전인 L1A1로 무장하였다.
  • 반자동 사격의 차이: 영국군의 L1A1은 반자동 사격만 가능하여, 아르헨티나 군의 FN FAL을 노획하여 완전자동 사격이 가능한 제식 소총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였다.
  • 전투에서의 전략적 이점: 이러한 무기 유사성은 전투에서 전략적 이점을 제공하였다.

SA80 소총 개발의 어려움

  • SA80 소총 개발 필요성: 북아일랜드 분쟁에서 영국은 L1A1을 대체할 새로운 돌격소총을 개발할 필요성을 느꼈다.
  • 예산 삭감의 영향: IMF 경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대처 내각이 예산을 삭감하였고, 포클랜드 전쟁까지 치르면서 영국 국방부는 주머니가 텅텅 빈 상황에서 SA80을 개발하게 되었다.
  • 조병창 민영화: 국립 조병창을 민영화하여 상당수가 해체되거나 대량 해고로 대규모 축소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 SA80의 초기 문제점: 개발진들은 XL64E5를 5.56mm NATO 탄을 쓸 수 있도록 한 XL70E3을 내놓았으나, 조악한 재료로 안전성이나 신뢰성이 극악이었다.

전후 해군의 전투 경험

  • A-4 공격기 격추: 영국 해군이 아르헨티나 공군의 A-4 공격기를 보포스 포로 격추하였다.
  • 사격통제장치의 중요성: 컴퓨터로 작동하는 사격통제장치가 여전히 강력하다는 것이 검증되었다.
  • 대공포의 운용 변화: 대공포로 사용하던 보포스 40mm 포가 중소형 전투함에서 주력으로 운용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 함정의 무기 배치 변화: 이후 전함들은 100mm 이상급의 거대주포보다는 대공포나 부포로 쓰이던 40mm, 75mm 급을 주포로 채용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인 교포의 포클랜드 전쟁 지지

  • 한국인 교포의 시위: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간 한국인 교포들이 아르헨티나에서 겪은 일들을 묶어서 펴낸 <아르헨티나 코리안 문학 선집: 소설>에는 포클랜드 전쟁 당시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 군사 정부의 지시: 아르헨티나 군사 정부는 전국의 모든 노동조합에게 포클랜드 전쟁을 지지하는 시위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 시위의 내용: 한국인 교포들은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후에라 포클랜드(떠나라 포클랜드), 볼베레 말비나스(돌아오라 말비나스)!"라는 구호를 외치며 전쟁을 지지하였다.
  • 영국의 반응: 이 장면이 아르헨티나 방송국 TV를 통해 생중계되자, 주한 영국대사가 한국 외무부 장관에게 항의하였다.

전쟁의 교훈과 현대적 해석

  • 예비군 정신교육의 소재: 과거에는 예비군 정신교육의 단골 소재로 사용되었다.
  • 전쟁의 결과: 아르헨티나가 무리하게 영국과 싸우다가 참패하여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직면한 반면, 승전국인 영국은 지금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 시간의 흐름: 시간이 흐르면서 보다 최신 버전의 다른 사례도 많아져서 잘 쓰이지 않게 되었다.
  • 교훈의 현대적 적용: 전쟁의 교훈은 현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전쟁 40주년 기념 행사

  • 4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2022년 4월 아르헨티나는 전쟁 종결 40주년을 맞이하여 당시 참전용사들을 인터뷰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다.
  • 전사자 추모식: 전사자 추모식이 열렸다.
  • 대통령의 발언: 아르헨티나 대통령 알베르토 페르난데스는 영토 보전을 회복하는 것이 절대 우선순위라고 천명하였다.
  • 영국의 추모식: 2022년 6월 영국에서도 보리스 존슨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전쟁 종결 40주년 추모식이 열렸다.

영국의 추모식과 아르헨티나의 반발

  • 영국의 기념 행사: 11월 전쟁 승전 40주년 기념으로 프린세스 로열 앤이 섬을 직접 찾아 추모비에 헌화하였다.
  • 아르헨티나의 반발: 아르헨티나 정부는 영국의 행동에 불쾌감을 표시하며 맹반발하였다.
  • 국제적 긴장: 이러한 사건은 양국 간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 역사적 맥락: 전쟁 40주년 기념 행사는 역사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명칭 문제와 포클랜드 전쟁

  • 한국의 명칭 사용: 한국에서는 서방의 보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포클랜드 전쟁'**이라고 칭하고 있다.
  • 아르헨티나의 명칭 사용: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 제도'**라고 부르며, 이로 인해 포클랜드 전쟁/분쟁에서 아르헨티나 편을 드는 나라들은 **'말비나스 전쟁'**이라고 부른다.
  • 영국의 승리: 영국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포클랜드 제도는 포클랜드 제도로 남게 되었고, 이는 널리 알려져 있어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판단된다.
  • 대화 시 주의사항: 아르헨티나인과 대화할 때는 기분 나빠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영국의 포클랜드 전쟁 승리

  • 전쟁 결과: 영국이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포클랜드 제도는 포클랜드 제도로 남게 되었다.
  • 사회적 인식: 이 결과는 널리 알려져 있어,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여겨진다.
  • 명칭의 중요성: 전쟁의 명칭이 국가 간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명칭 사용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

한국의 명칭 사용에 대한 입장

  • 대화 시 주의: 아르헨티나인과의 대화에서 기분 나빠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 명칭의 다양성: 한국 정부는 포클랜드 전쟁이라는 명칭만 인정할 것이 아니라, **'말비나스'**라는 명칭도 병행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 여론의 변화: 이러한 입장은 여론이 일기도 했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독도 문제와 한국 정부의 입장

  • 독도 문제: 한일 간의 독도 문제와 관련하여, 영국 정부는 **일본의 편에서 '일본해'와 '다케시마'**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 한국 정부의 대응: 한국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포클랜드 전쟁의 명칭을 **'말비나스'**로 병행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사회적 논의: 이와 같은 입장은 여론이 일기도 했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 내에서의 논의가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중국의 포클랜드 전쟁 입장

  • 중국의 공식 입장: 중국은 포클랜드 영유권 분쟁에서 아르헨티나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 명칭 사용: 이로 인해 포클랜드 전쟁을 **'마도 전쟁'(马岛战争)**으로 표기하고 있다.
  • 정치적 맥락: 중국의 이러한 입장은 정치적 맥락에서 아르헨티나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홍콩과 마카오에 대한 중국의 시각

  • 지배 기반 완성: 최근 홍콩과 마카오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 기반을 완성한 중국은, 포클랜드 전쟁을 아르헨티나가 고유 영토를 되찾기 위한 정당한 전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 정당성의 연관성: 이러한 경향은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 정당성을 중국이 홍콩과 마카오를 가져간 정당성과 연관짓는 것으로 나타난다.
  • 정치적 메시지: 이는 중국의 정치적 메시지로, 자국의 영토 문제에 대한 정당성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당성의 비교

  • 정당성의 연관성: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 정당성=중국이 홍콩과 마카오를 가져간 정당성"으로 간주되고 있다.
  • 정치적 논리: 이러한 비교는 정치적 논리에 기반하여, 각국의 영토 문제에 대한 정당성을 서로 연결짓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 국제 관계의 복잡성: 이는 국제 관계에서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반영하며, 각국의 입장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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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투 개요 

  •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중요한 전투로, 1944년 12월 16일부터 1945년 1월 25일까지 서부전선에서 발생한 전투이다.
  • 독일 국방군의 최후의 대공세로, 겨울철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로 알려져 있다.
  • 이 전투는 아르덴 공세(Ardennes Offensive),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 또는 바스토뉴 공방전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 벌지(Bulge)라는 용어는 '돌출부'를 의미하며, 전략지도를 통해 독일군 전선이 서쪽으로 크게 돌출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벌지 전투의 명칭과 의미 

  • 벌지 전투는 여러 명칭으로 불리며, 이는 전투의 지리적 및 전략적 중요성을 반영한다.
  • 아르덴 공세는 독일군의 공격을 의미하며, 벌지 전투는 미국에서 주로 사용되는 명칭이다.
  • 바스토뉴 공방전은 특정 지역에서의 방어전을 강조하는 명칭으로, 전투의 다양한 측면을 나타낸다.
    벌지대전투 지옥의 사수작전

 

독일군의 전략과 목표

  • 독일군은 연합군의 제공권이 없을 경우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 기상 상황을 이용하여 연합군 공군이 뜰 수 없는 조건에서 전투를 감행한 회심의 반격이었다.
  • 이 전투는 독일군의 전략적 선택 결단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전투의 결과가 매우 중요하다.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 - 벌지전투

 

전투 결과와 영향

  • 벌지 전투의 결과, 독일군은 연합군에게 피해를 주며 연합군의 진격을 6주 늦추었다.
  • 그러나 이 전투는 동부전선의 병력을 대거 빼간 만큼 제3제국의 패망을 6개월 앞당겼다.
  • 전투의 결과로 인해 베를린에 서방 연합군 대신 소련군이 진입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 이러한 결과는 전략적 판단의 실패를 나타내며, 전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제1차 세계 대전과의 유사성

  • 벌지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춘계 공세(루덴도르프 대공세)의 재현으로 볼 수 있다.
    서부전선: 루덴도르프 공세] 독일제국의 마지막 도박
  • 처음 작전안이 제기된 후 장성급 지휘관들의 반대에 부딪히는 과정이 유사하다.
  • 이러한 유사성은 역사적 맥락에서 전투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킨다.

 

임팔 작전과의 비교

  • 벌지 전투는 임팔 작전과 유사한 점이 있으며, 두 전투 모두 국가의 패배를 앞당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 그러나 두 전투의 전개 과정 결과는 다르다.
  • 임팔 작전은 일본군이 상당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사례로, 독일군의 상황과는 차이가 있다.
  • 독일군은 프랑스 침공 당시의 지휘관들이 물러나거나 자살한 상황에서 전투를 치렀다.

 

전투 전개 과정의 차이점

  • 벌지 전투와 임팔 작전의 승패 결과는 유사하지만, 전개 과정에서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 임팔 작전은 일본군이 지원을 받았던 반면, 독일군은 동부전선의 지휘관들이 서부전선으로 전속되었으나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 이러한 차이는 전투의 성격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휘관의 전선 이동과 한계

  • **OKH(육군최고사령부)**는 동부전선의 지휘관들을 서부전선으로 전속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육군최고사령부
  • 그러나 유능한 지휘관이라 하더라도 기갑, 항공 부대의 연료와 병력 부족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 이러한 상황은 전투의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전략적 한계를 드러낸다.

 

전투 경험의 손실

  • 독일군은 정예 병력과 기계화 전력을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이후의 전투에서 상실하였다.
  • 풍부한 전투 경험이 있었던 병력의 손실은 전투의 결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이러한 손실은 독일군의 전략적 선택 결단력에 큰 제약을 주었다.

2. 배경

 

서부전선의 교착 상태

  • 연합군의 상황: 연합군은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발목이 잡혀 진흙탕 싸움에 말려들었다.
  • 마켓 가든 작전 실패: 마켓 가든 작전에서 독일군의 방어선을 밀어내지 못해 점령한 항구들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 보급 문제: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격을 멈춘 결과, 서부전선은 교착 상태에 돌입하였다.
  • 소련군의 진군 중단: 소련군도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보급 문제와 후방 정리 등의 이유로 진군을 멈춘 상태였다.

 

 

독일군의 방어와 반격 계획

  • 독일군의 전략: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군 병력을 집중시켜 아르덴 지방의 숲을 돌파하고 벨기에 지역의 연합군을 포위 섬멸하는 반격 작전을 구상하였다.
  • 목표: 서방 연합군이 보급 기지로 삼고 있는 벨기에의 안트베르펀을 점령하여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 전략적 중요성: 이 작전은 독일군의 방어를 강화하고 연합군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항구와 보급 문제

  • 항구 파괴: 독일군은 프랑스 북부에서 네덜란드에 이르는 항구와 필수 시설을 파괴하거나 사수하여 연합군의 항구 이용을 거부하고 있었다.
  • 항구 재가동: 독일군이 붙들고 있던 항구들은 독일군이 항복한 후에야 다시 가동될 수 있었다.
  • 마켓 가든 작전의 목적: 연합군은 네덜란드 강습을 통해 베네룩스 3국 연안의 항구 도시들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 안트베르펀의 중요성: 연합군이 확보한 안트베르펀은 사실상 유일한 최전방 보급 창구로, 이를 잃으면 보급선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연합군의 보급선 확보

  • 보급선의 위기: 안트베르펀을 잃으면 노르망디에서 보급품을 끌고 와야 하며, 이는 아프리카 군단과 비슷한 보급 거리를 초래할 것이다.
  • 전략적 계획: 서방 연합군이 독일과 평화 협상을 맺으면 독일군이 남은 병력을 소련군과 싸우기 위해 이동할 계획이었다.
  • 보급선의 중요성: 보급선의 확보는 연합군의 전투 지속 가능성에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히틀러의 전략적 오판

  • 연합군의 특성: 히틀러는 연합군이 각국 수뇌부의 협의를 거쳐야 부대를 배치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 기습 공격의 망상: 히틀러는 "기습 공격으로 우위를 장악한 뒤 영미 연합군의 대처가 이루어지지 않는 동안에 전부 섬멸해 버리면 된다"라는 망상을 가지고 있었다.
  • 전략적 오판의 결과: 이러한 판단은 독일군의 전략적 실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연합군의 효과적인 지휘 체계

  • 연합참모본부 구성: 서방 연합국은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연합참모본부(Combined Chiefs of Staff, CCS)를 구성하여 효과적인 의사결정을 하고 있었다.
    The Combined Chiefs of Staff
  • 아이젠하워의 역할: 유럽 대륙에 전개된 연합군은 아이젠하워를 사령관으로 하는 연합국 원정군 최고 사령부의 단일 지휘권 아래에 있었다.
  • 권한 부여: 연합국의 수반과 각국 군 수뇌부는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현장에서의 권한을 크게 부여하였다.
  • 신속한 대응: 덕분에 아르덴 대공세에서 아이젠하워는 독일군에게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독일군의 자원 부족 문제

  • 연료 부족: 독일군의 가장 큰 문제는 기갑부대를 움직일 연료의 부족이었다.
  • 병력 동원 문제: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동원 가능한 남성의 숫자가 바닥이 나서 동부전선의 병력을 빼다가 돌려막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 전황의 비관적 전망: 서부전선 총사령관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와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는 전황이 낙관적이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룬트슈테트의 반대 의견

  • 작전 목표의 비현실성: 룬트슈테트는 안트베르펀은 목표로 하기엔 너무 멀다고 주장하였다.
  • 작전 회의의 비효율성: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에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고, 참모장인 지크프리트 베스트팔 장군이 대리 참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 휴전 요구: 룬트슈테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줄기차게 휴전을 요구해왔으나, 히틀러는 이를 무시하였다.

 

연합군의 공세 불가능성

  • 병력 손실: 연합군은 독일군의 병력 손실이 심하여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 부대 분산: 대부분의 부대가 퍼져 있었고, 베테랑들은 후방으로 이동하여 재정비를 받고 있었다.
  • 정보 체계의 문제: 독일군의 보안 체계 강화로 인해 연합군은 독일군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독일군의 정보 보안 강화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 사건으로 독일군의 보안 체계가 강화되었고, 대부분의 명령이 유선을 통해 전달되었다.
  • 악화된 날씨: 12월 들어서는 날씨가 악화되어 항공 작전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 기밀 유지의 성공: 발터 모델은 르제프 퇴각 작전에서 기밀 유지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브래들리의 전투 예측

  • 브래들리의 생각: 오마 브래들리는 독일군이 서부방 벽의 요새선에서 한꺼번에 튀어나오는 것이 낫겠다고 지속적으로 피력하였다.
  • 독일군의 규모: 실제로 튀어나온 독일군의 규모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
  • 정보 참모의 해임: 아르덴 지역에서 공세를 예측하지 못한 정보 참모 에드윈 L. 시버트 준장은 해임되었다.

 

 


3. 작전 준비

작전 준비와 히틀러의 결정

  • 벌지전투 당시: 독일 측 사령관 발터 모델은 이길 가능성이 적은 도박으로 판단하였다.
  • 장성들의 반대: 여러 장성들이 가을 안개 작전에 부정적이었으나, 히틀러는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세부적인 작전 계획을 세우라고 명령하였다.
  • 히틀러의 개입: 히틀러는 작전 계획의 모든 세부 사항, 심지어 폭격 시간까지도 직접 결정하였다.
  • 결과: 이러한 결정은 작전의 성공 가능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모델과 만토이펠의 갈등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원로 장성들조차 히틀러의 눈치를 보며, 발터 모델과 핫소 폰 만토이펠은 '작은 해결책'을 마련하려 애썼다.
  • 갈등의 배경: 만토이펠은 1941년 모스크바 전투 당시 모델의 명령을 거부한 경험이 있었고, 이로 인해 군법 재판에 회부될 예정이었다.
  • 재회: 모델과 만토이펠은 오랜 갈등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나게 되었고, 서로의 갈등을 해명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다.
  • 임무의 중요성: 모델은 두 사람의 과거 불화를 언급하며, 현재의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모델과 만토이펠의 재회

  • 긴장감: 만토이펠이 모델에게 보고하러 갔을 때, 모델의 집무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 과거의 불화: 모델은 만토이펠과의 과거 불화를 언급하며, 이제는 그 이야기가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 임무의 필요성: 두 사람은 현재 주어진 임무를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 상황의 중대성: 이 재회는 작전 준비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작전명 변경과 준비 과정

  • 작전명 변경: 기존의 작전명인 '라인 강의 수비'는 '가을 안개'로 변경되었다.
  • 목표 설정: 만토이펠은 모델과 함께 뫼즈 강 도달을 목표로 하는 '작은 해결책'을 준비하였다.
  • 전략적 조정: 작전명 변경은 작전의 방향성을 새롭게 설정하는 중요한 결정이었다.
  • 협력의 중요성: 모델과 만토이펠의 협력은 작전 준비에 있어 필수적이었다.

 

 

독일군의 병력 동원

  • 병력 도착: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병력들이 속속 도착하였다.
  • 항공기 동원: 반격 작전을 위해 아껴두었던 항공기들을 모두 동원하였다.
  • 자원 확보: 마지막 남은 연료와 탄약까지 모아 작전 준비가 진행되었다.
  • 전력 강화: 이러한 준비는 독일군의 전력을 크게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기갑사단의 전력과 배치

  • 기갑사단 동원: SS 소속 5개 기갑사단과 국방군 소속 5개 기갑사단을 합쳐 총 10개 기갑사단이 동원되었다.
  • 전차 수: 이들 사단이 보유한 전차와 돌격포, 구축전차의 수는 1,000대 이상에 달하였다.
  • 각 사단의 전력:
    • 기갑교도사단: 4호 27대, 판터 30대, 구축전차 20대
    • 제2기갑사단: 4호 28대, 판터 64대, 돌격포 35대
    • 제9기갑사단: 4호 28대, 판터 60대, 돌격포 24대
    • 제11기갑사단: 4호 61대, 판터 47대, 돌격포/구축전차 19대
    • 제116기갑사단: 4호 26대, 판터 64대, 구축전차 25대
  • 전력의 중요성: 이러한 기갑사단의 전력은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작전 준비의 어려움

  • 병력과 장비 부족: 병력과 장비는 한참 모자랐고, 2~3선급 국민척탄병 부대들이 정예병들의 빈 자리를 채워야 했다.
  • 공수부대 문제: 루프트바페 공수부대의 집결에도 문제가 많았고, 보병처럼 흩어져 있었다.
  • 물자 부족: 공수부대를 태울 트럭에 기름이 없어 이동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 작전 준비의 복잡성: 이러한 문제들은 작전 준비의 복잡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작전 개시 전의 긴장감

  • 작전 개시일: 작전 개시일에서 고작 2주 전인 12월 2일, 모델과 만토이펠은 안트베르펀 점령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
  • 작전 목표 조정: 초기 작전 목표대로 공세를 시작하되, 진행 과정에서 목표를 전환할 수 있다는 점이 변경되었다.
  • 공세의 시간 조정: 공격 시간은 오전 11시에서 새벽 5시 30분으로 앞당겨졌다.
  • 작전의 중대성: 이러한 조정은 작전의 성공 여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작전의 최종 목표와 압박

  • 작전 실패의 결과: 독일은 이 작전이 실패하면 더 이상의 작전이 불가능할 만큼 여력을 쥐어짜고 있었다.
  • 공세 병력 집결: 초기 작전 지역의 미 육군을 압도하는 규모의 공세 병력을 집결시켰다.
  • 작전의 긴급성: 작전의 성공 여부는 독일군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 전략적 압박: 이러한 상황은 독일군에게 큰 압박으로 작용하였다.

4.전투 진행

작전 초기와 독일군의 공세

  • 전투 시작일: 12월 16일,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됨.
  • 미군 8군단의 상황: 해당 지역을 담당하던 미군 8군단은 참패를 면치 못함.
  • 핫소 폰 만토이펠의 전략:
    • 기습 시점을 새벽 5시 30분으로 변경.
    • 칠흑 같은 안개 속에서 적의 시야를 가려 효율적인 포격을 실시.
    • 고사포 진지에서 탐조등을 비추어 보병의 돌격로를 이끌어냄.
    • 일몰 후 전차를 투입하여 전과를 확대시키는 작전안을 편성함.
  • 훈련 및 준비: 제5기갑군을 철저하게 훈련시키고, 만토이펠 자신이 군복을 갈아입고 전투 지역을 미리 답사하는 등 준비를 완벽하게 마침.

미군의 불리한 상황

  • 미군의 배치: 4개 사단과 다수의 지원 부대가 주둔했으나, 8만 3천 명의 미군이 전부 일선에 있지 않음.
  • 일선 부대의 우려: 담당 구역이 너무 넓어 미군 내부에서도 우려가 있었음.
  • 항공 정찰의 무시: 포착한 이상 징후가 상급 사령부에서 무시됨.
  • 병사들의 수준과 사기: 평균 이하의 수준과 사기를 가진 병사들이 배치됨.

연합군의 지휘 공백

  • 지휘 공백 발생: 아르덴 대공세 직전 회의로 인해 18공수군단장과 101공수사단장이 미국 본토에 있었음.
  • 대행 지휘: 82공수사단장 제임스 가빈 소장과 101 공수사단 부사단장 앤서니 맥콜리프가 각각 군단장과 사단장 임무를 대행하여 공백을 막음.
  • 연합군의 대응: 허를 찔린 연합군은 충격과 공포에 빠져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함.

독일군의 교란 작전

  • 교란 작전의 효과: 오토 스코르체니 대령이 영어를 잘하는 병사들을 선발하여 미군 군복을 입고 허위정보를 퍼뜨림.
  • 검문 검색 강화: 미군이 독일군을 색출하기 위해 토박이 미국인만 알 수 있는 질문을 사용함.
    • 예시: "미키 마우스의 여자친구 이름은?" 등.
  • 혼란의 결과: 검문하는 병사들이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어, 정답을 말한 병사들이 스파이로 몰리거나 억류됨.

초기 독일군의 승리

  • 주도권 확보: 독일군은 초반 며칠 동안 주도권을 잡고 아르덴 각 지역을 공격함.
  • 발터 모델 원수의 역할: 직접 원수 지휘봉을 들고 교통 정리를 하여 독일 병사들에게 희망을 줌.
  • 독일 국민의 사기 진작: 독일군의 전과가 홍보되며 국민의 사기가 진작되고 국방군에 대한 신뢰도가 상승함.

정체된 공세와 연합군의 반격

  • 아이젠하워 원수의 재배치: 서부 유럽 전선 사령관인 아이젠하워 원수가 부대를 신속하게 재배치함.
  • 82사단과 101사단의 급파: 각각 생비트와 바스토뉴로 급파되어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됨.
  • 독일군의 진격 둔화: 연합군의 맹렬한 대응으로 독일군의 진격이 서서히 둔화됨.

바스토뉴 공방전

  • 스타벨롯과 생비트 공격: 독일군은 스타벨롯과 생비트를 공격하였으나 미군의 반격으로 실패함.
  • 바스토뉴 포위: 12월 21일, 독일군이 바스토뉴를 포위하였으나 미군의 저항이 계속됨.
    신화가 된 일주일간의 포위' 바스토뉴 공방전
  • 상황 보고: 101사단 참모 장교는 포위된 상황을 "도넛 구멍을 그려 보십시오. 그게 우리입니다."라고 보고함.

 

맥콜리프의 유명한 반응

  • 항복 요구: 독일군이 미군에게 명예로운 항복을 제안함.
  • 맥콜리프의 반응: "Nuts!"라는 유머러스한 답변을 하여 항복을 거부함.
  • 답신의 의미: 독일군은 이 답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함.

 

연합군의 반격과 기상 변화

  • 항공 작전 재개: 12월 23일, 날씨가 좋아지자 연합군의 항공 작전이 재개됨.
  • 고립된 병력 보급: 고립된 연합군 병력에게 보급이 이루어짐.
  • 연료 보급 문제: 독일군은 연료 부족으로 인해 공격이 한계에 다다름.

독일군의 공세 실패와 철수

  • 1월 1일 공세: 독일군은 다시 한번 공세를 가하였으나 연합군의 압도적인 항공력에 밀림.
  • 히틀러의 고집: 히틀러가 병력 철수를 수용하지 않음.
  • 전투 종료: 1월 27일, 전투가 마무리됨.

5. 공세의 여파

독일군의 공세와 연합군의 대응

  • 독일군의 공세: 예상치 못한 독일군의 공격으로 인해 연합군의 라인 강 진공 계획이 예정보다 6주 미뤄졌다.
  • 독일군의 자원 소모: 독일군은 본토에 배치된 전략 예비 부대와 동부전선의 정예 부대, 그리고 확보했던 물자들을 모두 소모하여 병력이 약체화되었다.
  • 연합군의 공격: 1945년 3월까지 연합군은 지연전으로 버티었으나, 3월 말에 미군이 레마겐의 철교를 확보하면서 독일군의 패주, 포위, 항복이 급증하였다.
  • 루르 포위전: 결국 4월 중순에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전투를 종료하게 된다.

소련군의 동부전선 공격

  • 처칠의 요청: 윈스턴 처칠은 소련군에게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소련의 붉은 군대는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를 1월 12일에 개시하였다.
  • 전선의 불리함: 양 전선의 전황이 독일군에 극도로 불리해지면서,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빼온 기갑 부대를 다시 동부전선으로 되돌려보내야 했다.
  • B집단군의 방어 전략: 마켓 가든 작전의 승리로 방어 전략을 구사했던 B집단군 사령부는 아르덴 대공세 후기에 완전히 수동적인 대처를 하게 되었다.

아르덴 대공세의 실패

  • 몽고메리의 기자회견: 아르덴 대공세가 실패로 끝날 무렵, 영국의 몽고메리 원수가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과 영국군의 역할을 부각시켰다.
  • 미군의 반발: 몽고메리의 발언은 아이젠하워를 비롯한 미군 측의 분노를 일으켰다.
  • 영국군의 기여: 몽고메리는 독일군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여 뫼즈 강의 다리를 사수함으로써 독일군의 공세를 막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 전황 파악의 우위: 잘 짜여진 통신체계를 통해 전황 파악이 미군에 비해 빨랐던 것도 사실이다.

몽고메리의 오만과 갈등

  • 독선적 태도: 몽고메리는 특유의 독선적이고 오만한 면 때문에 이탈리아 전선부터 미군 장성들과 마찰을 빚고 있었다.
  • 전사자 수의 차이: 벌지 전투에서 미군 전사자는 2만 명에 근접했으나, 영국군 사망자는 200명에 불과하였다.
  • 독일 진공 작전 지휘권: 몽고메리는 미군을 깔아뭉개고 자신의 전공만 내세우며 독일 진공 작전의 지휘권을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아이젠하워의 대응과 사과

  • 장군 임명 고민: 아이젠하워는 영국의 해롤드 알렉산더 장군을 몽고메리의 자리에 임명하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 몽고메리의 평판 하락: 오마 브래들리마저도 참았던 분통을 터뜨리며 몽고메리의 평판은 더욱 떨어졌다.
  • 참모진의 역할: 참모진은 미군 장성들을 설득하는 한편 몽고메리에게 현재 상황을 알려주었다.
  • 사과문 제출: 결국 몽고메리는 아이젠하워에게 사과문을 올려 사태가 진정되었다.

 

영국 의회의 중재 노력

  • 처칠의 개입: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미군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섰다.
  • 의회 연설 내용: 1945년 1월 중순 영국 의회의 연설에서, 벌지 전투에서 활약한 미군을 찬양하고 영국군의 전과 확대 해석을 경계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 전투의 중요성 강조: 처칠은 미군의 기여를 강조하며 영국군의 역할을 축소하는 발언을 하였다.

지크프리트 선의 돌파

  • 아르덴 대공세 종료 후 상황: 아르덴 대공세가 종료된 후 약 2달 후, 3월 23일에 조지 S. 패튼이 이끄는 미 제3군 병력이 지크프리트 선의 방어부대 간의 지경선을 뚫었다.
  • 라인 강 건너기 허용: 이후 라인 강을 건너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 지크프리트 선의 완전 돌파: 이로 인해 실질적인 지크프리트 선까지 완전히 돌파당하게 되었다.

 

 


6. 공세 실패의 원인

공세 실패의 원인

  • 푀글러는 이번 공격이 소련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동부 전선에서의 중압감을 덜기 위한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 알베르트 슈페어는 동부 전선의 상황을 고려할 때,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서쪽에서 밀려오는 적을 막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 1944년 10월 말의 대화에서, 히틀러는 민간인 관료조차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무모한 작전을 실시하였다.
  • 이로 인해 브래들리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공세 실패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교통 문제: 비좁은 도로망

  • 아르덴 지역은 산악 지대로 도로망이 빈약하여, 미군과 독일군 모두에게 큰 문제를 초래하였다.
  • 미군 부대들은 후퇴 과정에서 서로 엉켜 많은 혼란이 발생하였고, 일부 부대는 도로상에 장비를 유기하는 사례가 있었다.
  • 독일군은 버려진 장비를 유용하게 사용하여 공세 시간을 벌었으며, 이는 미군이 고전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다.
  • 의 유속이 빠르고 강행 도하를 할 만한 곳이 거의 없어, 다리가 파괴되면 진격이 어려운 상황이 자주 발생하였다.

교통 문제: 진흙탕 도로

  • 도로에 진흙으로 된 늪이 생기면서 자주포와 기갑척탄병의 제병 합동 공격에 큰 문제가 발생하였다.
  • 자주포가 늪에서 허우적대면서 기갑척탄병의 공격을 지원하지 못해, 기갑척탄병 부대가 대규모 피해를 입고 퇴각하는 사례가 여러 번 발생하였다.
  • 어떤 경우에는 정찰부대가 진흙탕에 갇혀 길을 잃고 작전을 수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 이러한 상황은 공세 초반에 연합군이 사태를 빨리 수습하고 반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통 문제: 공병의 역할

  • 연합군의 공병대는 이미 한 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리와 같은 모든 물체에 폭탄을 설치하고 독일 기갑 부대가 접근하면 폭파하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 요아힘 파이퍼는 미군 공병대의 작전 방식에 대해 "이런 죽일 놈들!"이라고 표현하며 찬사를 보냈다.
    요아힘 파이퍼(Joachim Peiper)
  • 마켓 가든 작전 이후 공병의 중요성이 증가하였고, 벌지 전투에서 미 공병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다.
  • 공병대는 교량 폭파 및 재설치 작업을 통해 독일군의 진공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보병과 기갑부대를 지원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병참 문제와 연료 수급

  • 독일군의 연료 수급 상황은 매우 열악하여, 목적지인 안트베르펀에 도달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 아르덴 삼림 지역에서부터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최소 120km로, 연료를 노획하지 않으면 전진이 불가능하였다.
  • 독일군은 새로 만들어진 기갑장비를 대거 투입하였으나, 티거 2와 같은 중장비는 연비가 최악이었다.
  • 이로 인해 많은 전차가 연료 부족으로 전진도 후퇴도 못하고 자폭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제공권 장악의 실패

  • 1940년 프랑스 침공 당시 독일군은 연합군보다 훨씬 많은 전투기를 공중전에 투입하여 제공권을 장악하였다.
  • 그러나 아르덴 대공세 당시에는 독일군을 도울 공군이 활동할 날씨가 아니었고, 연합군이 하늘을 장악한 상태였다.
  • 날씨가 좋아지자마자 독일군은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 알베르트 슈페어는 자서전에서 날씨가 갠 뒤 도로를 다니는 것이 자살 행위와 같다고 언급하였다.

 

연합군의 발빠른 대응

  • 1940년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 당시 연합군은 독일군의 진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 아이젠하워 장군은 병력 운용에서 전권을 보장받았고, 연합군 지휘부는 독일군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자원을 쏟아 부었다.
  • 미군의 조지 S. 패튼 중장은 독일군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대응 방안을 구상하였다.
  • 이러한 발빠른 대응은 아르덴 대공세에서 연합군의 성공적인 방어에 기여하였다.

 

독일군의 훈련 및 경험 부재

  • 독일군은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 훈련 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이후 훈련을 통해 질적 향상을 이루었다.
  • 그러나 아르덴 대공세 당시에는 숙련된 장교와 부대가 대부분 소모되었고, 훈련이 부족한 병력으로 대체되었다.
  • 급조된 부대는 훈련이 부족하여 전투 능력이 떨어졌고, 이는 공세의 실패로 이어졌다.
  • 팔슈름예거 부대는 심각한 피해를 입고, 경험이 부족한 병력으로 구성되어 전투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부실한 기계화와 전투력

  • 독일의 전투력은 1944년 서방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급격히 소모되었다.
  • 기갑사단의 상황이 심각하여, 독일군은 기계화 부대의 보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 독일군의 기계화율은 미군에 비해 현저히 낮아,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 연합군은 충분한 차량과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독일군과의 기계화율 차이는 전투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https://www.youtube.com/watch?v=sZa8UdP11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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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구역의 정의와 역사

  • 정의: 유대인이 모여 살도록 법으로 강제한 도시의 거리나 구역을 의미한다.
  • 유사 개념: 모로코의 멜라와 같은 유사한 지역이 존재하였으나, 게토보다 자유롭고 번화한 특징이 있다.🌹

멜라 (mellah, 아랍어: ملاح,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소금')는 모로코의 도시에서 유대인 거주 지역으로 분리된 구역으로서, 유럽의 게토와 흡사한 형식이다. 유대인들은 이 지역에 갇혀 15세기부터 살아야 했으며, 19세기 초부터 이런 형태가 더욱 널리 퍼졌다.

 

멜라는 벽으로 요새처럼 둘러싸여 있으며, 유대인 구역은 왕궁이나 고관의 거주지에 위치한다. 반발이나 모반을 바로 처리하기 위함이다. 도시의 경우 그렇지만 시골이나 지방의 경우에는 유대인이 사는 마을이 단독으로 따로 있다.


  • 역사적 배경:
    • 13세기 모로코에서 처음 등장하였으며,모로코인 거주 구역의 역사

예루살렘의 모로코인 거주 구역은 12세기 말에 설립되었다.

이는 살라흐 앗 딘의 장남 알 아프달 알리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모로코를 포함한 북서 아프리카와 안달루스의 무슬림들은 말리키파 법학파를 믿어 법 적용이 달랐다.

    • 14~15세기부터 유럽 전역에서도 거주 제한 규정이 생겨났다.
    • 게토라는 이름은 1516년경 베네치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게토의 기원과 목적

  • 원래 목적: 게토의 설계 목적은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 역사적 사건:
    • 1090년대 말 십자군의 공격으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고, 이에 따라 12세기 슈파이어의 주교가 유대인 주거지에 성벽을 두르고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 십자군은 주교궁에 숨은 유대인까지도 학살하였다.
  • 어원: 게토의 어원은 베네치아에서 유래하였으며, 최초의 게토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유대인 강제수용 지역이었다.

 

유대인 구역의 정의와 역사

  • 정의: 유대인이 모여 살도록 법으로 강제한 도시의 거리나 구역을 의미한다.
  • 유사 개념: 모로코의 멜라와 같은 유사한 지역이 존재하였으나, 게토보다 자유롭고 번화한 특징이 있다.
  • 역사적 배경:
    • 13세기 모로코에서 처음 등장하였으며, 14~15세기부터 유럽 전역에서도 거주 제한 규정이 생겨났다.
    • 게토라는 이름은 1516년경 베네치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게토의 구조와 생활 조건

  • 구조적 특징: 게토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바깥 사회와 격리되어 있었다.
  • 자치권: 유대인 공동체로서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하였으나, 시민권은 부여되지 않았다.
  • 출입 규제:
    • 게토를 나갈 때 유대인임을 증명하는 노란색 옷 챙달린 뾰족모자를 착용해야 하였다.
    • 해가 진 후에는 게토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기독교인들이 보초를 서며 감시하였다.
  • 거주 환경: 거주제한으로 인해 게토의 유대인들은 건물을 높이 지을 수밖에 없었으며, 19세기부터 서유럽에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동유럽의 유대인 거주 지역

  • 정주제한선: 러시아에서는 유대인 거주를 제한하기 위해 "정주제한선(Черта́ осе́длости)"을 설정하였다.
  • 슈테틀: 이 지역에는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마을들이 존재하였으며, 이를 이디시어로 **슈테틀(שטעטלעך)**이라고 하였다.
  • 인구 통계: '정주제한선' 안쪽에 거주하는 유대인 인구의 3/4가 슈테틀에 살았으나, 19세기 후반부터 경제적 어려움과 포그롬으로 인해 2백만 명이 동유럽을 떠났다.
  • 홀로코스트의 영향: 결정적으로 홀로코스트로 인해 슈테틀은 사라지게 되었다.

나치 독일의 게토 정책

  •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은 폴란드 총독부를 포함한 동유럽 점령지에서 유대인을 몰아넣기 위해 게토를 부활시켰다.
  • 주요 게토:
    • 바르샤바 게토는 수용인구가 45만 명에 달해 가장 컸으며, 우치에 20만, 르비우에 15만, 빌뉴스에 8만, 크라쿠프에 7만 명이 수용되었다.
  • 역사적 게토와의 차이:
    • 역사적 게토는 유대인들을 기독교도들과 분리하기 위해 설계된 반면, 나치가 부활시킨 게토는 홀로코스트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 인구 밀도와 사망률: 나치의 게토는 인구 밀도가 높고 비위생적이며,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게토의 비극적 현실

  • 아시아의 게토: 2차 대전 당시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도 게토가 존재하였다.
    From the Archive: Life in the 'Shanghai Ghetto' - Jewish Telegraphic Agency

 

Image of Jewish refugees in the ghetto of Shanghai, 1938 (b/w photo)
Shanghai Ghetto ❘ Homepage - Shanghai Ghetto
Where did 20,000 Jews hide from the Holocaust? In Shanghai
The Shanghai Ghetto, formally known as the Restricted Sector for Stateless Refugees
The Shanghai ghetto, formally known as the Restricted Sector for Stateless Refugees,
Restricted sector for jewish refugees hi-res stock photography and images

 

  • 상하이의 상황: 일본군의 점령 지역인 상하이에서도 유대인들이 게토에 강제로 수용되었으나, 그곳의 주거 환경은 유럽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 홀로코스트의 피해: 유대인들은 게토에서 굶어죽거나 병사하였으며, 대부분이 아우슈비츠 등의 절멸수용소로 끌려가 학살당하였다.
  • 저항의 시도: 나치 독일의 패망이 임박하자, 바르샤바의 유대인들은 봉기를 시도하였으나 진압당하였다.

 

유대인 저항과 영화의 묘사

  • 바르샤바 봉기: 유대인들은 바르샤바 봉기를 통해 무기를 밀수하여 나치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아쉽게도 진압당하였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

 

 

 

 

 

  • 영화 <피아니스트>:
    • 이 영화는 당시 폴란드의 저명한 피아니스트 슈필만이 게토에서 생활했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 영화 속 유대인들은 나치 군대의 핍박을 받으며, 서로의 음식을 훔쳐먹는 등 비참한 상황을 묘사하였다.
  • 영화 <쉰들러 리스트>:
    • 이 영화에서는 독일인 군수사업가 오스카 쉰들러와 열악한 환경에 내던져진 유대인들의 상황이 대비되어 있다.
    • 독일은 게토를 끝장내고 숨어있던 유대인들까지 철저히 학살하였다.

 

 

게토의 구조와 생활 조건

  • 구조적 특징: 게토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바깥 사회와 격리되어 있었다.
  • 자치권: 유대인 공동체로서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하였으나, 시민권은 부여되지 않았다.
  • 출입 규제:
    • 게토를 나갈 때 유대인임을 증명하는 노란색 옷 챙달린 뾰족모자를 착용해야 하였다.
    • 해가 진 후에는 게토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기독교인들이 보초를 서며 감시하였다.
  • 거주 환경: 거주제한으로 인해 게토의 유대인들은 건물을 높이 지을 수밖에 없었으며, 19세기부터 서유럽에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동유럽의 유대인 거주 지역

  • 정주제한선: 러시아에서는 유대인 거주를 제한하기 위해 "정주제한선(Черта́ осе́длости)"을 설정하였다.
  • 슈테틀: 이 지역에는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마을들이 존재하였으며, 이를 이디시어로 **슈테틀(שטעטלעך)**이라고 하였다.
  • 인구 통계: '정주제한선' 안쪽에 거주하는 유대인 인구의 3/4가 슈테틀에 살았으나, 19세기 후반부터 경제적 어려움과 포그롬으로 인해 2백만 명이 동유럽을 떠났다.
  • 홀로코스트의 영향: 결정적으로 홀로코스트로 인해 슈테틀은 사라지게 되었다.

 

 

나치 독일의 게토 정책

  •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은 폴란드 총독부를 포함한 동유럽 점령지에서 유대인을 몰아넣기 위해 게토를 부활시켰다.
  • 주요 게토:
    • 바르샤바 게토는 수용인구가 45만 명에 달해 가장 컸으며, 우치에 20만, 르비우에 15만, 빌뉴스에 8만, 크라쿠프에 7만 명이 수용되었다.
  • 역사적 게토와의 차이:
    • 역사적 게토는 유대인들을 기독교도들과 분리하기 위해 설계된 반면, 나치가 부활시킨 게토는 홀로코스트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 인구 밀도와 사망률: 나치의 게토는 인구 밀도가 높고 비위생적이며,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홀로코스트

게토의 비극적 현실

  • 아시아의 게토: 2차 대전 당시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도 게토가 존재하였다.
  • 상하이의 상황: 일본군의 점령 지역인 상하이에서도 유대인들이 게토에 강제로 수용되었으나, 그곳의 주거 환경은 유럽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 홀로코스트의 피해: 유대인들은 게토에서 굶어죽거나 병사하였으며, 대부분이 아우슈비츠 등의 절멸수용소로 끌려가 학살당하였다.
  • 저항의 시도: 나치 독일의 패망이 임박하자, 바르샤바의 유대인들은 봉기를 시도하였으나 진압당하였다.

유대인 저항과 영화의 묘사

  • 바르샤바 봉기: 유대인들은 바르샤바 봉기를 통해 무기를 밀수하여 나치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아쉽게도 진압당하였다.
  • 영화 <피아니스트>:
    • 이 영화는 당시 폴란드의 저명한 피아니스트 슈필만이 게토에서 생활했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 영화 속 유대인들은 나치 군대의 핍박을 받으며, 서로의 음식을 훔쳐먹는 등 비참한 상황을 묘사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nzMbwsVc6EQ&t=4s

 

 

  • 영화 <쉰들러 리스트>:
    • 이 영화에서는 독일인 군수사업가 오스카 쉰들러와 열악한 환경에 내던져진 유대인들의 상황이 대비되어 있다.
    • 독일은 게토를 끝장내고 숨어있던 유대인들까지 철저히 학살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FFxbzKq5MnI&t=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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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1 오후 10:46

제1차 세계 대전과 베르됭 전투 

  • 전투 기간: 1916년 2월 21일부터 12월까지.
  • 참여 세력: 독일 제국군과 프랑스 제3공화국의 프랑스군 간의 전투
    .

 

 

 

  • 유럽의 회색 지도 안에 독일 제국의 검은 평면 지도(1871–1918) 

독일제국 식민지
WW1 독일 제국군헬멧
독일 제국군

 

 

제1차 세계대전 컬러 기록사진

 

 

 

제1차세계대전 독일군 컬러 기록사진

 

 

 


독일 제국의 문제점 

 

지도자 빌헬름 2세


 

 

 

 


팁:

빌헬름 2세는 고종을 '왕' 아닌 '황제'로 칭했다
한일합방 부당' 98년 전 독일 정부문서 나왔다


 

  • 전투의 중요성:
    • 제1차 세계 대전의 가장 유명한 대전투 중 하나로, 소모전의 시초이자 참호전의 전형적인 양상을 나타냄.
    • 양측 모두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살육을 강요함.

참호전 : 땅 속의 일상

전투의 역사적 중요성

  • 전투의 위치: 베르됭 전투는 마른 전투와 솜 전투와 함께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투로 간주됨.
  • 전투의 특징:
    • 소모전의 성격을 띠며, 전투의 결과가 양측의 인명 피해에 큰 영향을 미침.
    • 전투의 결과는 전쟁의 전반적인 흐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침.

프랑스의 결의와 독일의 전략

  • 프랑스의 결의:
    • 프랑스 육군 중장 로베르 니벨의 유명한 구호인 "Verdun! on ne passe pas!"는 프랑스군의 결의를 상징함.

      "Verdun! On ne passe pas" - French WW1 Song
    • "Ils ne passeront pas."는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냄.

 

 

 

 

 

 

전선 재정비와 공세 전략

  • 전선 재정비:
    • 독일의 슐리펜 계획이 실패한 후, 에리히 폰 팔켄하인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됨.
    • 팔켄하인은 전선 재정비를 위해 공세를 지양하고 수세적으로 임함.
  • 전략적 판단:
    • 영국의 해상봉쇄로 인한 물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선의 요새화 필요성을 인식함.

 

소모전의 전술적 변화

  • 전투 방식의 변화:
    • 기존의 전투 방식은 승리한 쪽이 적의 거점을 공격하는 형태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참호와 기관총의 결합으로 인해 전투 양상이 변화함.
  • 전투의 결과:
    • 수십만의 인명 피해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계속 이어짐.
    • 참호전의 특성상, 전투의 결과는 단순한 영토 확보가 아닌 인명 피해에 중점을 두게 됨.

독일군의 새로운 목표 설정

  • 전략 수정:
    • 독일군은 전투를 통해 적군을 더 많이 죽이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삼음.
  • 전략적 요충지 점령:
    • 프랑스군의 영토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보다는, 전략적 요충지만 점령하고 방어하는 방식으로 전환함.

소모전의 효율성과 전략

  • 소모전의 장점:
    •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효과적인 교환비를 통해 아군은 덜 죽고, 적군은 많이 죽이는 전략이 안정적이고 효율적임.
  • 란체스터 법칙:
    • 전투의 규모가 질적인 우위를 무력화하는 데 유용하다는 점이 강조됨.

 

 

 

베르됭 요새의 선택

  • 작전 계획:
    • 독일 육군 참모본부는 프랑스군에게 최대한의 병력 손실을 강요할 장소로 베르됭을 선택함.

서부전선 이상없다!! 두오몽 요새

 

세계의 요새 III - 알카사르·두오몽


 

  • 피해 비율:
    • 작전은 적과 아군의 피해 비율이 5:2라는 극단적인 소모전으로 계획됨.

 


1915년 전역의 전략적 상황

  • 협상국의 전략: 1915년 전역에서 협상국은 서부전선에서의 공세와 동부전선에서의 수세 전략을 유지하였다.
  • 전황의 부진: 협상국의 전력과는 별개로 전황은 영 시원찮았다.
  • 서부전선의 상황: 프랑스가 중심이 되어 여러 차례 대규모 공세를 실시하였으나, 독일군의 방어에 막혀 모두 실패하였다.
  • 필리프 페탱의 진급: 대장으로 진급한 필리프 페탱은 유일하게 진격에 성공하였으나, 그 진격 거리는 3~4km에 불과하였다.

 

서부전선의 실패와 동부전선의 승리

  • 프랑스의 공세 실패: 1915년 서부전선에서 프랑스의 대규모 공세는 전략적 성과가 없었다.
  • 동부전선의 대승: 동부전선에서는 동맹군이 대규모 공세를 통해 러시아령 폴란드를 거의 쓸어버렸다.
  • 러시아군의 피해: 러시아군의 피해는 가공할 수준으로 치솟았다.
  • 전선의 변화: 동부전선에서의 승리는 협상국의 전략적 상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지중해 방면의 전황 변화

  • 불가리아 왕국의 가담: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 측에 가담하면서 세르비아 전역의 전황이 급격하게 변화하였다.
  • 세르비아 왕국의 상황: 몬테네그로 왕국은 항복하였고, 세르비아 왕국은 전 국토를 점령당하였다.
  • 영불 연합군의 개입: 영불 연합군은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그리스 북부 테살로니키에 상륙하였으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 갈리폴리 전투의 실패: 협상국의 회심의 수였던 갈리폴리 전투는 대실패로 끝나가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참전과 전선 변화

  • 이탈리아의 참전: 1915년에 이탈리아 왕국이 협상국으로 참전한 것이 유일한 긍정적 요소였다.
  • 캅카스 전선의 소식: 러시아군이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서아르메니아로 진격했다는 소식이 있었으나, 전체적인 전황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 연합국 간 회의: 1915년 말 연합국 간 회의를 통해 1916년에도 프랑스와 영국이 서부전선에서 대공세를 펼치기로 합의하였다.
  • 러시아의 방어 전념: 러시아는 방어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동맹국의 상황과 독일군의 전략

  • 동맹국의 어려움: 동맹국도 상황이 나쁘지 않았으며,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이탈리아의 중립 깨기: 이탈리아가 중립을 깨고 협상국 측으로 참전하면서 부담해야 할 전선이 늘어났다.
  • 동부전선의 승리: 동부전선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러시아의 평원은 너무 넓었다.
  • 독일군의 전략적 판단: 독일군 수뇌부는 동부전선에서의 결정적 승리를 허황된 것으로 치부하였다.

서부전선의 병력 밀도와 전략적 판단

  • 서부전선의 병력 밀도: 서부전선의 병력 밀도는 동부전선을 훨씬 상회하였다.
  • 프랑스의 병력 동원: 프랑스는 전국의 병력을 긁어모으고 식민지군까지 동원하여 전선에 투입하고 있었다.
  • 영국의 대륙원정군 증강: 영국의 대륙원정군도 시시각각 증강되고 있었다.
  • 동부전선의 기동전 제안: 동부전선에서 기동전으로 러시아군 주력을 포위섬멸하고 페트로그라드를 공략하자는 주장이 더 합리적이었다.

베르됭 전투의 준비와 실패

  • 독일군의 주목: 독일군 총참모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베르됭에 주목하게 되었다.
  • 베르됭의 역사적 중요성: 베르됭은 프랑스 육군 최고의 요새 지대로, 프랑스의 자존심이었다.
  • 프랑스군의 방어 준비 부족: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공격 시도를 포착할 기회를 놓쳤다.
  • 조프르의 집중: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는 새로운 공세 준비에 몰두하였고, 베르됭 지역을 무시하였다.
    조제프 조프르

 

드리앙 대령의 경고와 무시

  • 드리앙 대령의 보고: 드리앙 대령은 방어 준비가 허술하다고 보고하였으나 무시당했다.
  • 정치적 인맥 활용: 드리앙 대령은 자신의 정치권 인맥을 활용하여 조프르에게 대책 마련을 촉구하였다.
  • 조프르의 반응: 조프르는 "정식 지휘계통 외의 보고는 인정하지 않겠다!"며 전군에 엄명을 내렸다.
  • 방어력 강화 실패: 드리앙이 원했던 베르됭 방어력 강화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FRA788 / 프랑스 '56 1차대전 영웅 에밀드리앙 대령

 


독일 제국군의 대공세 시작

  • 독일의 작전 승인: 독일은 최종적으로 해당 지역을 선택하였고,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작전을 승인하였다.
  • 군사 배치:
    • 제5군: 9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5군이 14만 명의 병력과 1,200여 문의 야포를 투입하였다.
    • 예비대: 본토에 배치한 예비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 공세 시작: 1916년 2월 21일, 최정예 사단들이 투입되어 공세에 나섰으나, 포격만 진행하고 본격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
  • 작전 지휘의 문제:
    • 참모장 크노벨스도르프는 포탄만으로 프랑스군을 제거할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판단을 하였고, 작전 총사령관 빌헬름 황태자는 이를 칭찬하였다.
    • 이로 인해 독일군은 실질적인 성과 없이 뫼즈강 줄기를 따라 부아 도몽만을 점령하는 데 그쳤다.

초기 공격과 프랑스군 저항

  • 본격적인 공세: 포격 종료 후 독일군이 본격적인 공세에 돌입하였으나, 남은 프랑스군이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 드리앙 대령의 역할:
    • 드리앙 대령은 자신이 지휘하던 2개 대대를 이용해 필사의 지연전을 펼쳤다.
    • 독일군은 선 화력제압 후 진격 방식을 선택하여 신중히 진격하였다.
  • 전력 비율: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독일군이 뫼즈 강과 베르됭 요새까지 도달했어야 할 정도였으나, 실제로는 1차 목표선에 간신히 도달하였다.
  • 드리앙 대령의 전사: 드리앙 대령이 후퇴전을 지휘하며 아군을 엄호하다가 전사하였다.

두오몽 요새의 함락

  • 방어선 붕괴: 24일 방어선이 무너진 후, 25일에는 두오몽 요새가 독일 육군에 함락되었다.
  • 전술적 접근:
    • 독일군은 1,500여 문의 야포에서 30만 발을 쏟아부어 요새를 마비시켰다.
    • 그 뒤 보병이 진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 프랑스군의 피해: 이 과정에서 프랑스 육군은 10만 가까운 사상자를 입었다.
  • 전투의 결과: 독일군의 압도적인 포격과 진격으로 인해 프랑스군의 방어가 크게 약화되었다.

 


페탱의 방어 전략과 병력 보강

  • 카리의 철군 요청: 중부집단군 사령관 카리가 철군 명령을 요청하였으나, 조제프 조프르는 이를 거부하고 필리프 페탱을 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 전력 비율 인식: 페탱은 프랑스군과 독일군의 전력비가 1:3까지 벌어진 것을 인식하였다.
  • 최선의 판단: 독일군을 격퇴시키기 위해 최대한의 피해를 주어 스스로 물러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였다.
  • 병력 보강:
    • 페탱은 베르됭 남부 60km 지점에 위치한 바르르뒤크로 향하는 통로를 확보하여 군수물자와 병력을 보충하였다.
    • 보강된 병력을 전투에 투입하고, 지친 병력과 교대시키며 전투를 지속하였다.

니벨의 공격적 전술 변화

  • 조프르의 불만: 프랑스 총사령관 조프르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페탱의 방식에 불만을 가졌다.
  • 페탱의 승진: 조프르는 페탱을 중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승진시키고, 후임으로 로베르 니벨을 임명하였다.
  • 니벨의 명령: 니벨은 부임하자마자 무조건적인 공세를 명령하였다.
  • 참호전의 전개: 이후 철조망과 기관총, 포격으로 병력이 증발하는 전형적인 참호전이 벌어졌다.

전투의 환경 변화와 독일군의 어려움

  • 초기 성공과 환경 변화: 독일군의 공세는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으나, 폭우와 진창길로 인해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 포병 재배치의 어려움:
    • 화력지원을 위해 준비한 포병들은 아군 보병의 전진에 맞추어 재배치해야 했으나, 진창길로 인해 작업이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였다.
    • 이로 인해 독일군은 제때 포병대를 재배치하지 못하고, 프랑스군에게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주었다.
  • 작전 지속 여부 고민: 작전의 지지부진함으로 인해 팔켄하인은 작전 지속 여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 크노벨스도르프의 주장: 독일군 참모장 크노벨스도르프는 계속해서 공격을 외쳤고, 결국 작전은 계속되었다.

작전 지속 여부에 대한 논의

  • 조프르의 결정: 조프르는 페탱을 작전에서 제외시키고, 로베르 니벨을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 니벨의 공격 명령: 니벨은 즉시 무조건적인 공세를 명령하였고, 그 결과 전투는 더욱 격렬해졌다.
  • 전략적 의미 상실: 공세에 공세로 대응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더 이상의 전략적, 전술적인 의미가 없어졌다.
  • 전투의 지속: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전투는 계속되었고,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군의 반격과 요새 탈환 시도

  • 페탱의 승진: 5월 초, 페탱은 중앙집단군 사령관으로 승진하였고, 니벨이 베르됭 방어군 사령관이 되었다.
  • 니벨의 최우선 과제: 니벨의 최우선 과제는 두오몽 요새의 탈환이었다.
  • 프랑스 포병의 집중 포격: 5월 15일부터 프랑스 포병은 두오몽 요새에 대한 집중 포격을 시작하였다.
  • 요새 내부의 고통: 요새 안의 독일군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고, 통로가 매몰되고 물 공급이 부족하였다.

보 요새 전투와 독일군의 손실

  • 전투 전개: 6월 초의 전투는 보 요새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 독일군의 공격: 6월 2일부터 독일군은 연이어 요새를 공격하였으나, 매번 큰 손실을 입고 물러났다.
  • 요새 함락의 시간: 보 요새의 함락에는 6일이 걸렸으며, 이는 독일군의 전술적 성과였다.
  • 전선의 악화: 그러나 독일군의 입장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동부전선의 붕괴를 막기 위해 병력을 빼내야 했다.

전투 종료와 인명 손실

  • 전투의 종료: 10월 말, 니벨은 반격을 지시하여 두오몽 요새를 회복하였고, 12월 말까지 모든 지역을 회복하였다.
  • 최종 인명 손실: 최종적인 인명 손실은 독일 육군 43만 4000명, 프랑스 육군 55만 여명으로 추산된다.
  • 전투의 비극성: 이 전투는 프랑스군에 의해 분쇄기라고 불릴 정도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 전투의 역사적 의미: 베르됭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양측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전투 이후 손실 비율

  • 손실 비율: 베르됭 전투의 전체 양측 손실 비율은 5:4로 나타났다.
  • 전투 기간 동안의 손실: 초기 공세 기간의 급격한 손실을 제외하면, 프랑스와 독일 양측의 병력 손실 비율은 거의 1:1에 근접하게 된다.
  • 전투력 변화: 이는 프랑스군의 전투력이 독일군과 비등해졌음을 의미하며, 더 이상 독일군이 우월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프랑스군에 소모전을 강요할 수 없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 전후 독일군의 입장: 베르됭 전투 이후, 독일군은 솜 전투, 제2차 아라스 전투, 니벨 공세, 제2차 이프르 전투 등에서 수세적 입장으로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페탱 장군의 명성과 비극

  • 페탱 장군의 역할: 베르됭 방어전을 성공으로 이끈 페탱 장군은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 후일의 항복: 그러나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나치에게 항복하고, 괴뢰 정부인 비시 프랑스의 수반이 되어 그의 명성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 반역죄로의 연금: 전후에는 반역죄로 여생을 연금 상태로 마치게 된다.
  • 페탱 변호론: 페탱을 변호하는 측에서는 베르됭 전투 당시의 경험이 그로 하여금 비시 정부의 수반으로 활동하며 독일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취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페탱의 유화적 입장 논란

  • 전투의 충격: 베르됭 전투 당시 프랑스군이 입은 엄청난 피해가 페탱에게 큰 충격으로 남았다고 한다.
  • 희생에 대한 두려움: 그는 다시 그런 희생을 감수할 수 없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 전쟁 양상의 변화: 제2차 세계 대전이 전쟁 초반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주장의 설득력에 의문이 제기된다.
  • 프랑스의 승리를 위한 조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페탱이 내린 조치는 프랑스의 승리를 위한 것이었지, 병사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긴 것이 아니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전후 전쟁 분위기 변화

  • 전쟁 분위기 변화: 베르됭 전투는 전쟁을 대하는 각국의 분위기를 180도 바꿔 놓았다.
  • 종전 논의의 시작: 각국의 국민과 정계는 종전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 프랑스의 전시 거국내각: 프랑스의 전시 거국내각(Union Sacree)은 종전 여부를 논제로 분열되었다.
  • 독일의 군부 독재체제: 독일에서는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권력을 장악하여 군부 독재체제가 마련되었다.
    에리히 루덴도르프

 

러시아의 브루실로프 공세

  • 협상국 회담: 본래 협상국 주요 4개국(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 러시아 제국) 회담에서는 1915년에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를 배려하여 동부전선에서 현상 유지를 하고 나머지 3국이 일제히 서부전선에서 총공세를 펼치기로 합의되었다.
  • 독일의 선제 공격: 그러나 공세에 나서기도 전에 독일이 베르됭 전투로 선수를 쳤다.
  • 프랑스의 구원 요청: 상황이 급해진 프랑스는 기존의 합의를 제쳐두고 러시아에 급히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 러시아의 반응: 러시아가 이에 호응하여 벌어진 것이 러시아 제국 최후의 공세 작전인 브루실로프 공세이다.
    1차 세계대전 - 브루실로프 공세

 

베르됭 전투의 유산

  • 참호전의 참혹함: 베르됭 전투의 참호전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베르됭 일대의 지형은 포격으로 패인 흔적이 남아 있다.
  • 존 루주(Zone Rouge): 이 지역은 존 루주라고 부르며, 불발탄과 지뢰가 너무 많아 출입이 통제되는 장소가 있다.
  • 오염 문제: 비소, 납, 수은, 독가스 오염 문제도 심각하여 일부 지역은 현재까지도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 폭탄 제거 작업: 폭탄 제거반이 1년에 50여 톤의 불발탄을 수거하고 있지만, 이 속도로는 최대 300년이 더 걸릴 것으로 예측된다.

전투의 비극적 결말

  • 프랑스군의 비참한 결말: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비참한 끝을 맞이하였다.
  • 주역들의 운명: 전투의 주역들은 전후에 각기 다른 운명을 겪게 되었다.
  • 역사적 맥락: 이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프랑스군의 패배가 큰 영향을 미쳤다.
  • 전투의 결과: 전투의 결과는 프랑스군의 사기 저하와 전후 정치적 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필리프 페탱의 명성과 추락

  • 페탱의 초기 명성: 필리프 페탱은 전후 한동안 추앙받았으며, 특히 베르됭 전투에서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 기념물과 초상화: 베르됭 전투 수훈자 명단의 최상단에 페탱의 이름이 걸려 있었고, 전투를 기념하는 건물 안에는 그의 초상화가 가장 크게 걸려 있었다.
  • 명성의 변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페탱은 대독 부역혐의로 인해 모든 기념물이 철거되거나 그의 이름이 삭제되었다.
  • 사회적 반응: 이러한 변화는 프랑스 사회에서 페탱에 대한 인식이 급격히 변모했음을 나타낸다.

전후 페탱의 운명

  • 대독 부역혐의: 페탱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대독 부역혐의로 비난받았다.
  • 기념물 철거: 그의 이름이 적힌 명판과 초상화는 모두 철거되었고, 베르됭 전몰자 묘역의 장지도 비어있게 되었다.
  • 역사적 교훈: 이는 전후 역사에서 개인의 명성과 정치적 상황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 사회적 영향: 페탱의 추락은 프랑스 사회에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변할 수 있는지를 시사한다.

로베르 니벨의 지휘와 패배

  • 니벨의 지휘: 페탱이 경질된 이후, 로베르 니벨이 지휘를 맡아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 참패의 원인: 니벨의 지휘 아래에서 프랑스군은 1917년 1차 대전에서 최악의 참패를 경험하였다.
  • 전략적 실패: 이 참패는 프랑스군의 전략적 실패와 전투 준비 부족을 반영한다.
  • 군사적 영향: 니벨의 패배는 프랑스군의 전반적인 전투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군의 비극적 구출 작전

  • 고립된 프랑스군: 6월 초, 보 요새에서 고립된 프랑스군이 구원을 청하는 마지막 전서구를 보냈다.
  • 전서구의 기적적 도착: 이 전서구는 기적적으로 프랑스군 진영에 도착하였으나, 그들은 생을 마감하였다.
  • 레지옹 도뇌르 훈장: 프랑스 육군은 이 전서구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였다.
  • 기념 엽서와 전시: 전서구는 기념 엽서로 만들어져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보 요새의 대규모 공세 실패

  • 구출 작전의 비극: 전서구의 도착 이후, 프랑스군 지휘부는 고립된 아군을 구하기 위해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 공세의 실패: 그러나 이 공세는 모두 실패하였고, 최소 수천 명 이상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 고립된 병력: 보 요새에 고립되어 있던 병력은 최대 600여 명으로 추산된다.
  • 전투의 복잡성: 고립된 부대의 구출 요청과 지휘부의 대응은 복잡한 상황을 초래하였다.

두오몽 요새의 참사

  • 두오몽 요새 점령: 1916년 5월, 독일군 병사들이 두오몽 요새를 점령하였다.
  • 연쇄폭발 사고: 독일군 병사들이 화염방사기 연료로 불을 때우다가 연쇄폭발이 발생하여 600명이 즉사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하였다.
  • 폭발의 영향: 요새와 같은 견고한 공간에서의 폭발은 사망률을 약 600% 높였다.
  • 전투의 위험성: 이러한 사건은 전투 중의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

 

생존자에 대한 오해와 비극

  • 생존자의 비극: 몇몇 생존자들이 요새를 탈출했으나, 대폭발에 놀란 병사들이 그들을 오인하여 사살하였다.
  • 오해의 원인: 생존자들은 폭발로 인해 피부가 검댕으로 변해 있었고, 이는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 군대의 침투로 오해되었다.
  • 사살 사건의 결과: 이 사건은 전투 중의 혼란과 오해가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 프랑스 측의 대응: 프랑스 측은 이 폭발을 목격하고 두오몽을 재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개시하였으나 여러 번 실패하였다.

프랑스군의 참호에서 발견된 현상

  • 기이한 현상 발견: 전투 중 프랑스군은 탈환한 참호에서 기이한 현상을 발견하였다.
  • 참호의 매몰: 참호선이 통째로 매몰되어 있었고, 그 위로 총검들이 솟구쳐 있었다.
  • 생매장된 병사들: 발굴 결과, 총검 바로 아래에 수백여 명의 프랑스군 병사들이 생매장되어 있었다.
  • 전투의 비극적 상징: 이 현상은 전투의 비극적 상징으로 여겨지며, 전투 중의 희생을 기리는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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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사일 전력에 대한 리뷰 포스트

 

한국의 미사일 전력은 최근 몇 년간 급격히 발전해왔어요.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계속되는 가운데, 한국은 자국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미사일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한국의 미사일 전력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할게요.

 

한국의 미사일 전력은 단순한 군사적 수단을 넘어, 국가의 안전과 직결되는 중요한 요소예요.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 개발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한국은 효과적인 방어 체계를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에요. 이를 통해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고, 외부의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한국의 미사일 시스템 개요

한국의 미사일 시스템은 크게 탄도 미사일과 순항 미사일로 나눌 수 있어요. 탄도 미사일은 주로 적의 기지를 타격하는 데 사용되며, 순항 미사일은 정밀 타격을 위해 설계되었어요. 한국은 이러한 미사일 시스템을 통해 다양한 전투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주요 미사일 시스템 분석

한국의 주요 미사일 시스템으로는 현무 시리즈가 있어요. 현무-I, II, III는 각각의 발전 단계에 따라 다양한 사거리와 기능을 가지고 있어요. 특히, 현무-III는 800km 이상의 사거리를 자랑하며, 북한의 주요 군사 시설을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은 L-SAM, THAAD와 같은 미사일 방어 시스템도 운영하고 있어요. 이 시스템들은 적의 미사일 공격을 조기에 탐지하고, 요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사일 방어 체계

한국의 미사일 방어 체계는 다층적이에요. LAMD, PAC-3, 천궁-II와 같은 다양한 시스템이 서로 협력하여 공중에서의 위협을 차단하고 있어요. 이러한 방어 체계는 적의 미사일이 발사되기 전에 조기에 탐지하고, 요격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합니다.

미사일 개발의 역사적 배경

한국의 미사일 개발은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어요. 초기에는 기술적 한계로 인해 제한된 범위의 미사일만 개발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술이 발전하고, 미국과의 협력이 강화되면서 다양한 미사일 시스템이 등장하게 되었어요.

 

한미 미사일 지침과 협력

한국은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기술과 정보를 공유하고 있어요. 한미 미사일 지침은 한국의 미사일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한국은 자국의 방어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습니다.


한국형 미사일 방어 개요

  • **한국형 미사일 방어(KMD)**는 대한민국에서 구축하는 미사일 방어 체계이다.
  • KMD는 대한민국 공군이 운용하는 **KAMD(Korea Air and Missile Defense)**와 대한민국 육군이 운용하는 **LAMD(Low Altitude Missile Defense)**로 구성된다.

 

 

  • KMD는 북한의 핵위협에 대응하는 3축 체계 중 하나로 작동한다.

 

 

북한의 위협과 역사적 배경

  • 북한의 포격 및 미사일 위협은 김영삼 정부가 진행한 1994년 남북평화회담에서 시작되었다.
  • 박영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국장의 '서울 불바다 발언'이 이 위협의 시작점이다.
  • 당시 북측 대표단은 외교회담에서 협박에 가까운 발언을 하여 대한민국과 남측 대표단을 겁박하였고, 이로 인해 회담은 결렬되었다.
  • 북한은 이후에도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위협을 공식적으로 지속해왔다.

 

 

북한의 위협 발언과 회담 결렬

  • 북한은 공식적으로 무력 사용을 선언한 유일한 단체로, 이로 인해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주적으로 인식된다.
  • 북한의 위협 발언은 수많은 공식적인 논평을 통해 반복되었다.
  • 이러한 상황은 대한민국의 안보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TMD 제안과 한국의 반응

  • 1999년, 빌 클린턴 행정부는 전역 미사일 방어(Theater Missile Defense; TMD) 체계에 한국의 참여를 제안하였다.
  •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TMD가 북한 미사일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수단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 한국은 경제력과 기술력 부족으로 인해 TMD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 대신, 한국에 더 적합한 미사일 방어 체계를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한국형 미사일 방어 체계 구상

  • 초기에는 북한의 단거리 탄도탄인 스커드 미사일에 대한 위협만을 상정하였다.
  • 노무현 정부 시기에 한미 전시작전권 환수 논의가 시작되면서, 미국이 제공하던 지휘, 탐지, 타격 능력을 자체적으로 보유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 이로 인해 한국은 장기적 목표로 기술 개발을 시작하였다.

 

 

한미 전시작전권 환수 논의

  • 한미 전시작전권 환수 논의는 한국의 국방 전략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하였다.
  • 이 과정에서 한국은 자주 국방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 기술 개발은 KAMD의 기반 기술 확보와 관련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기술 개발과 국방부의 평가

  • 이명박 정부는 국방부의 장기소요에 따라 킬 체인과 KAMD의 기반 기술 확보가 가시화되자 관련 개발사업을 평가하고 진행하였다.
  • 이 과정에서 한국의 미사일 방어 체계는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 KAMD는 북한의 위협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 수단으로 자리 잡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미사일 전력의 미래 전망

앞으로 한국의 미사일 전력은 더욱 발전할 것으로 예상돼요.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계속되는 한, 한국은 지속적으로 미사일 시스템을 개선하고, 새로운 기술을 도입할 필요가 있어요. 이를 통해 한국은 더욱 강력한 방어력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마무리 및 개인적인 생각

한국의 미사일 전력은 국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어요. 앞으로도 지속적인 발전과 협력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한국은 더욱 안전한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번 포스트가 한국의 미사일 전력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도움이 되었길 바라요. 궁금한 점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


#미사일전력 #한국미사일 #현무미사일 #미사일방어 #한미협력 #국방력 #안전 #국가안보

 

이런 자료를 참고 했어요.

 

[1] 나무위키 - 현무 미사일

 

(https://namu.wiki/w/%ED%98%84%EB%AC%B4%20%EB%AF%B8%EC%82%AC%EC%9D%BC)

[2] 나무위키 -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 (https://namu.wiki/w/%ED%95%9C%EB%AF%B8%20%EB%AF%B8%EC%82%AC%EC%9D%BC%20%EC%82%AC%EA%B1%B0%EB%A6%AC%20%EC%A7%80%EC%B9%A8)

[3] 아산정책연구원 - 한미 미사일지침 개정과 한국의 국방력 발전 방향 (https://www.asaninst.org/contents/%ED%95%9C%EB%AF%B8-%EB%AF%B8%EC%82%AC%EC%9D%BC%EC%A7%80%EC%B9%A8-%EA%B0%9C%EC%A0%95%EA%B3%BC-%ED%95%9C%EA%B5%AD%EC%9D%98-%EA%B5%AD%EB%B0%A9%EB%A0%A5-%EB%B0%9C%EC%A0%84-%EB%B0%A9%ED%96%A5/)

[4] Wikipedia - 대한민국의 탄도 미사일 개발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_%ED%83%84%EB%8F%84_%EB%AF%B8%EC%82%AC%EC%9D%BC_%EA%B0%9C%EB%B0%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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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탑재형 105mm 자주포 개발 개요

  • 개발 배경: 2009년 삼성테크윈이 방사청에 제안한 차량탑재형 구경 105mm 자주포가 **신개념기술시범사업(ACTD)**에 채택됨.
  • 개발 시작: 2010년부터 삼성테크윈 주도로 개발이 진행되었으며, 2011년 시제품이 완성됨.
  • 시험평가: 2011년 시제품 완성 후 시험평가를 거쳐 2014~2015년 방위사업추진위원회에 상정됨.
  • 정식 사업화: 안건명이 105밀리 곡사포 성능개량사업으로 공식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함.

https://www.youtube.com/watch?v=fz4ejCanZmY

 

전투용 적합 판정 및 양산 결정

  • 판정 결과: 2017년 6월 28일 방위사업청에서 '전투용 적합' 판정을 받음.
  • 국군 제식장비: 대한민국 국군의 제식장비로 인가됨.
  • 양산 결정: 2018년 방위사업추진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양산하는 것으로 결정됨.
  • 전력화 현황: 2018년부터 약 850대가 전력화되고 있음.

개발 목적 및 명칭 변화

  • 개발 목적: 포병에서 도태되는 105mm 견인곡사포를 차량탑재형 자주포로 개조하여 기존 4.2인치 박격포를 대체하는 것이 목표임.
  • 명칭 변화: 기존에는 K105HT 등으로 불리다가 K105A1으로 제식 명칭이 부여됨.
  • 비교 대상: 한국 내 매니아 커뮤니티에서 네덜란드의 RDM Technology BV社의 MOBAT과 비교됨.
  • 기능적 대체: 155mm 자주포를 받지 못하는 부대의 105mm 견인포를 대체하여 대포병사격 생존성과 지원화력을 높임.

 

 

자주포의 주요 특징

  • 자주화: 105mm 견인포를 상당부분 대체하면서 자주화됨.
  • 운용 인원 감소: 운용 인원이 3명으로 감소하며, 총 인원은 5명이나 포 운용은 3명 이하로 가능함.
  • 사통장비: 유선단말기로 조작할 수 있는 사통장비가 있어 사격제원을 입력하면 자동 방열됨.
  • 기타 특징: K6 중기관총 장착, K-721 5톤 트럭 제독차 신품 사용, 기존 곡사포 중 양품 재활용 등.

연혁 및 주요 사건들

  • 2009년: 신개념기술시범사업(ACTD) 공모에 삼성테크윈이 제안한 차량탑재형 구경 105mm 자주포 선정됨.
  • 2010년: 삼성테크윈 개발 시작.
  • 2011년: 시제 1호기 공개됨.
  • 2014년: 105mm 자주포가 보병 쪽으로 사업이 진행 중임이 확인됨.
  • 2017년: 방위사업청에서 최종적으로 105mm 자주곡사포 개발 완료 발표.

도입 배경 및 필요성

  • 신규화포 수요: 한화테크윈(당시 삼성테크윈)은 K9 양산 종료 이후 신규화포 수요가 없자 구형화포 개량으로 사업을 다각화함.
  • 105mm 견인포 활용: 2009년 신개념기술시범사업에 차량탑재형 구경 105mm 자주포 제안이 채택됨.
  • 경쟁 관계: 120mm 자주박격포와의 경합으로 인해 양산 가능성이 확실치 않음.
  • 전력화 계획: 105mm 자주포는 보병부대 4.2인치 박격포 대체용으로 2018년부터 전력화될 예정임.

105mm 재고탄 활용 방안

  • 재고탄 현황: 포병화포가 155mm로 단일화되면서 105mm 견인포의 포탄 재고가 340만 발에 달함.
  • 비용 문제: 재고탄 폐기는 비용이 많이 들며, 신규 탄약 생산비용보다 1.2~3배의 비용이 발생함.
  • 과거 사례: 미국이 WRSA 협정으로 25만 톤에 이르는 포탄류를 증여한 이유도 폐기 비용 문제임.
  • 개발 타당성: 105mm 자주포 개발의 타당성 근거가 됨.

아프간 전훈과 105mm 자주포

  • 미군 화력: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군의 기본 화력은 120mm 박격포였음.
  • 운송 문제: 155mm는 도로망이 불비한 산악작전기지로의 운송이 어려움.
  • 105mm 활용: M119 105mm 견인포를 헬기로 공중수송하여 사용한 결과, 빠른 발사속도가 경무장한 게릴라를 제압하는 데 큰 위력을 발휘함.
  • 한국 지형: 아프가니스탄과 유사한 한국 산악지형에서 105mm의 활용 방안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됨.

북한군 대응 전략

  • 북한군 화력: 북한군은 보병연대 기준으로 75식 다연장로켓 9문과 다수의 120mm, 82mm 박격포를 편제하고 있음.
  • 국군 화력 문제: 기존 국군 보병연대급의 화력으로는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려움.
  • K105A1 운용: K105A1을 운용하는 포병대가 연대/여단 단위 제대에 편제됨.
  • 화기 중대 구성: 보병대대 화기중대에서는 4.2인치 박격포가 운용되고, 보병중대에서는 81mm 박격포가 운용됨.

비교
풍익 105mm 자주곡사포
비격 120mm 자주박격포
탑재차량
차륜형 트럭
궤도형 장갑차
방열
자동
자동
비산범위
155mm의 80%
105mm의 1.5~2배
탄위력
각주 참고[6]
105mm 곡사포 포탄의 2.6배[7]
탄종
구형재고탄
신형탄 개발
사거리
11km(고폭탄)[8]
8km(고폭탄) / 12km(RAP)
운용인원
5명
5명
운용제대
보병부대
기계화부대
제작사
한화테크윈
S&T중공업
전력화
2018년
2019년
생산량
1차 12문 / 2차 200여 문
?
계약금액
1문당 6억여 원 추정
약 30억 원 이상

120mm 자주박격포 개발 배경

  • 개발 시작: 120mm 자주박격포의 포체계는 2008년부터 현대위아 S&T중공업이 공동으로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2014년 3월에 S&T중공업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었다.
  • 개발 목표: 이 포체계는 현대적인 전투 환경에 적합한 화력 지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 기술적 발전: 자주박격포의 개발은 군의 전투력 향상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계약 체결 및 전력화 전망

  • 공급계약 체결: 2014년 6월 217억 원 상당의 공급계약이 체결되었다.
  • 장착 계획: 이 포체계는 두산DST의 궤도장갑차에 장착될 예정이다.
  • 전력화 일정: 2019년에 전력화될 전망으로, 이는 군의 전투력 증강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 전력화의 중요성: 전력화는 군의 작전 수행 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박격포와 곡사포의 이원화

  • 이원화의 필요성: 4.2인치 박격포의 대체를 위해 박격포와 곡사포로 이원화하고 있다.
  • 교육훈련의 변화: 이원화는 교육훈련 군수지원체계의 이원화를 초래하고 있다.
  • 군수지원체계: 군수지원체계의 이원화는 효율적인 자원 관리를 가능하게 한다.
  • 전략적 접근: 이원화는 군의 전략적 접근을 다양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120mm 박격포의 필요성

  • 화력의 중요성: 언젠가는 120mm 박격포 체계로 전환해야 하는 현실이 육군의 고민이다.
  • 화력덕후의 관점: 화력에 대한 열망이 강한 군에서 120mm 체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다.
  • 전투력 향상: 120mm 박격포는 정밀 운용을 통해 소수정예화에 기여할 수 있다.
  • 미래의 방향성: 군의 미래 전투력은 120mm 박격포 체계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다.

 

120mm와 105mm의 비교

  • 포구속도 비교: 120mm 박격포는 강선포이지만, 105mm 곡사포의 포구속도가 더 빠르다.
  • 정확도 차이: 실제로 군이 도입하려는 강선박격포는 살상범위에서 76m vs 25m의 차이를 보인다.
  • 오차각 차이: 6밀의 오차각 차이가 있으며, 사거리 10km를 전제로 할 때 m101 견인포의 오차범위 5밀을 커버할 수 있다.
  • 탄 중량: 장전 시 탄 중량은 두 포체계가 비슷하지만, 탄 위력은 155mm급으로 차이가 있다.

탄약의 위력과 도입 가능성

  • 포탄 용적: 120mm는 포탄 용적이 크고, 해외에서도 운용되고 있다.
  • 신형 포탄 도입: 유도포탄 등 신형 포탄을 도입하기 용이하다.
  • 비용 문제: 그러나 120mm 포탄은 비용이 비싸서 곡사포의 사거리 연장탄 이상으로 많이 도입하기 어렵다.
  • 화력 비교: 사거리 연장을 해도 105mm의 2배 화력을 제공할 수 있다.

예비군의 자주포병화 전망

  • 예비군 기동화: 이 체계는 예비군용으로 기동화될 예정이다.
  • 병력 감소: 현역병력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제대한 자주포병에게 자주포를 운용하게 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있다.
  • 부대 변화: 105mm 견인포병대는 전방에서 궤도형 자주포, 후방/예비군부대는 차륜형 자주포로 바뀌는 것으로 보인다.
  • 전략적 재편성: 이러한 변화는 군의 전략적 재편성을 반영하고 있다.

 

K105A1 자주포의 양산 시작

  • 양산 시작: K105A1 차륜형 자주포는 2018년 8월부터 12대 양산이 시작되었다.
  • 전력화 과정: 양산이 시작되면서 전력화가 진행되고 있다.
  • 방위산업추진위원회 통과: 9월 초순에 방위산업추진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통과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 군 현대화: K105A1의 양산은 군의 현대화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105mm 자주포와 120mm 자주박격포 도입

  • 도입 결정: 105mm 자주포와 한화디펜스의 120mm 자주박격포가 도입될 예정이다.
  • 목적: 이 두 무기는 보병사단의 화력 지원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기존 무기 대체: 105mm 자주포는 기존의 K242, BV206(K-532) M30 박격포 탑재버전, 4.2인치 KM30 및 M30 박격포, 105mm 견인포 일부를 대체할 예정이다.
  • 배치 계획: 120mm 자주박격포는 기계화사단 기갑여단 등 기계화된 부대에 배치될 것으로 예상된다.

보병사단의 화력 지원 변화

  • 화력 지원 변화: 105mm 차륜형 자주포는 보병사단의 연대지원화포로 사용될 예정이다.
  • 기존 화력 체계: 기존의 K242 및 BV206(K-532) M30 박격포와 4.2인치 KM30 박격포가 대체된다.
  • 기계화 부대 배치: 궤도식 120mm 자주박격포는 기계화된 부대에 배치될 것으로 보인다.
  • 보병연대의 4.2인치 박격포: 보병연대의 4.2인치 박격포는 없애지 않고 보병대대로 내려보낼 계획이 있다.

보병연대 개편과 포병대 배치

  • 차기 보병사단 계획: 2017년 6월에 공개된 계획에 따라 보병연대가 보병여단으로 개편된다.
  • 전투지원중대 변화: 연대본부 직할 전투지원중대에서 보병여단 예하 포병대로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 화력 배치: 105mm 차륜형 자주포가 보병여단에 배치되어 북한군의 연포군처럼 보병여단장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화력이 된다.
  • 퇴역 및 강화: 106mm 무반동총은 퇴역하고, 4.2인치 박격포는 보병대대의 화력 강화 차원에서 내려간다.

대량 양산 결정

  • 양산 확정: 2018년 방위사업추진위원회에서 105mm 자주포의 대량 양산이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
  • 전력 증강: 대량 양산을 통해 군의 전력을 증강할 계획이다.
  • 무기 체계의 현대화: 이 결정은 군의 무기 체계를 현대화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 전략적 필요성: 대량 양산은 군의 전략적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K105A1의 실사격 훈련

  • 훈련 영상 공개: 2021년 야전부대에 배치된 K105A1의 실사격 훈련 영상이 국방뉴스에 공개되었다.
  • 훈련의 중요성: 실사격 훈련은 무기의 성능을 검증하고, 실제 전투 상황에서의 활용 가능성을 높이는 데 중요하다.
  • 군의 준비 상태: 이러한 훈련은 군의 전투 준비 상태를 점검하는 데 기여한다.
  • 국방 뉴스의 역할: 국방뉴스는 군의 훈련과 작전 상황을 국민에게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포 사용과 국가 행사

  • 예포 사용 현황: 2020년경부터 105mm 견인포를 대체하여 예포로 국가 행사에서 사용되고 있다.
  • 특별 행사 사례: 2022년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서 21발의 예포가 발사되었다.
  • 상징적 의미: 예포의 사용은 국가 행사에서 군의 위엄과 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 군의 전통: 이러한 예포 사용은 군의 전통과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교훈

  • 무기의 양적 측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통해 무기의 양적 측면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 구형 무기의 가치: 구형이지만 충분한 전력을 유지할 수 있는 풍익의 가치가 재고되었다.
  • 포탄 수급 문제: 전투 유지력에 직결되는 포탄 수급 문제가 양측의 주요 과제로 존재한다.
  • 군의 방향성: 대량의 105mm 탄 재고를 쌓아두고 있는 군의 방향성이 점차 맞아들어가는 상황이다.

정찰드론과 포병전의 발전

  • 정찰드론의 효과: 정찰드론과 단거리 대포의 조합은 현대 전투에서 매우 유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정밀 포병전 가능성: 105mm 자주포는 적을 제압하는 엄호 포격뿐만 아니라 구체적 목표를 정조준하는 정밀 포병전이 가능하다.
  • 전투 거리의 변화: 정찰드론으로 인해 보병 전투의 교전 거리가 비가시거리로 멀어져, 직시거리로 한정된 전차포보다 더 유용할 수 있다.
  • 현대 야전의 필요성: 이러한 발전은 현대 야전에서 대대급 화력 지원 무기로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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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공동 어뢰: 미래의 수중 전투 기술

 

초공동 어뢰는 현대 해양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혁신적인 무기 시스템이에요. 이 어뢰는 물속에서의 마찰을 최소화하여 매우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요.

 

 

 

초공동 현상(supercavitation)을 이용해 물속에서 기포를 형성하고, 이 기포 안에서 이동함으로써 저항을 줄이고 속도를 높이는 방식이에요. 이 기술은 기존의 어뢰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를 자랑하며, 최대 시속 800km에 달할 수 있어요.

 

초공동 어뢰의 기술적 특징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흥미로운 요소들이 있어요.

 

첫째, 무장 시스템은 고성능의 유도 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어, 적의 잠수함이나 수상함을 정밀하게 타격할 수 있어요.

둘째, 톤수는 일반 어뢰보다 크지만, 그만큼 더 많은 연료와 무장을 장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셋째, 레이다 시스템은 최신 기술이 적용되어 있어, 적의 탐지를 피하면서도 정확한 타격이 가능해요.

 

이러한 기술적 세부 사항들은 초공동 어뢰가 현대 해양 전투에서 얼마나 중요한 무기인지 잘 보여줘요.


세종대왕함과 비교해보면, 초공동 어뢰는 그 성능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데요. 세종대왕함은 강력한 방어 시스템과 다양한 무장을 갖춘 현대적인 구축함이지만, 초공동 어뢰는 그 속도와 기동성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어요. 세종대왕함이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중점을 둔다면, 초공동 어뢰는 적의 방어를 뚫고 신속하게 타격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이러한 차이는 현대 전장에서의 전략적 접근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초공동 어뢰의 군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어요. 이 어뢰는 적의 잠수함이나 수상함을 신속하게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해양 전투에서의 전술적 우위를 제공해요. 또한, 초공동 어뢰의 도입은 해양 방어 체계를 강화하고, 적의 해양 작전 능력을 저하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어요. 이러한 점에서 초공동 어뢰는 현대 전쟁에서 필수적인 무기 시스템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아요.

 

미래의 전망을 살펴보면, 초공동 어뢰 기술은 계속해서 발전할 것으로 예상돼요. 현재의 기술을 바탕으로 더욱 정교한 유도 시스템과 고성능의 추진 시스템이 개발될 것이고, 이는 초공동 어뢰의 성능을 더욱 향상시킬 거예요. 또한, 다양한 군사적 요구에 맞춰 다양한 형태의 초공동 어뢰가 개발될 가능성도 높아요. 이러한 발전은 해양 전투의 양상을 크게 변화시킬 것으로 기대돼요.

초공동 어뢰는 단순한 무기를 넘어, 현대 해양 전투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요. 앞으로의 기술 발전과 함께 이 어뢰가 어떻게 진화할지 기대가 되네요.

 

미래의 수중 전투 기술을 상징하는 초공동 어뢰의 모습입니다.

 

초공동 어뢰의 내부 구조를 보여주는 이미지로, 각 부품의 기능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잠수함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는 장면으로, 초공동 어뢰의 군사적 맥락을 잘 보여줍니다.

최신 기술이 적용된 잠수함과 초공동 어뢰의 작동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해양 전시회에서 공개된 초공동 어뢰의 모습으로, 그 디자인과 기술적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초공동 기술의 개요

  • 초공동(Supercavitation) 기술은 수중에서의 마찰과 저항을 최소화하여 고속으로 항주할 수 있는 기술이다.
  • 이 기술은 박재현 해군본부 비서실 소속의 음향공학 석사에 의해 분석되었다.
  • 역사적 배경: 미국 남북전쟁 중 북부군 제독 **페러것(Farragut)**의 유명한 발언인 “Damn torpedo, full speed ahead”는 수중 공격 무기에 대한 두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 기술의 중요성: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면서 수중무기의 위력과 중요성이 증가하였으며, 현재도 많은 국가가 더 은밀하고 강력한 수중무기를 개발하고 있다.

 

 

초공동의 원리

  • 마찰과 저항: 물체가 매질 안에서 운동할 때 발생하는 마찰과 저항은 매질의 밀도가 높을수록 증가한다.
    • 해수의 밀도는 공기보다 800배 이상 높아 잠수함이나 어뢰의 고속 항주에 제한을 준다.
  • 공동현상: 외부의 힘으로 물의 압력이 포화증기압보다 낮아지면 물이 기화하여 수증기 방울이 생기며, 이를 공동(Cavitation) 현상이라고 한다.
    • 초공동(Supercavitation) 단계에서는 수중체 전체가 공동으로 덮여 해수와의 접촉이 차단된다.
  • 케비테이터(Cavitator): 초공동을 유발하기 위해 수중체 앞쪽에 설치되는 장치로, 공동을 형성하여 마찰과 저항을 최소화한다.
  • 추진 방식: 초공동 수중체는 로켓 추진 방식을 주로 사용하며, 기존의 스크류 추진기는 해수와 접촉할 수 없어 사용이 제한된다.

 

 

초공동 수중무기 개발 사례

  • VA-111 쉬크발(Shkval) 어뢰: 구 소련에서 개발된 최초의 초공동 기술을 적용한 어뢰로, 현재까지도 러시아에서 운용되고 있다.
    • 속도: 200kts(370km/h) 이상의 속도로 항주 가능하다.
    • 구조: 앞쪽에 케비테이터, 중간에 압축공기 탱크, 뒤쪽에 로켓엔진이 설치되어 있다.
     
  • 성능 개량: 러시아는 2016년에 쉬크발 어뢰의 성능을 개량하였다.
  • 기술적 특징: 로켓의 뜨거운 배기를 통해 물을 기화시켜 공동을 형성하는 방식이다.
  • 전략적 중요성: 초공동 기술은 수중전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의 초공동 무기

  • 벨고로드(Belgorod)함: 2019년 4월 23일에 진수된 특수목적 핵추진 잠수함으로, 초공동 기술을 접목한 수중 드론 **포세이돈(Poseidon)**을 탑재한다.

    • 포세이돈의 크기: 직경 1.8m 이상, 길이 약 24m로, 약 2메가톤의 재래식 또는 핵 무장을 탑재할 수 있다.
    • 속도와 항속거리: 최대속력은 약 56노트, 항속거리는 약 10,000km로 기존 어뢰들의 능력을 뛰어넘는다.

  • 전략적 평가: 포세이돈은 ‘수중 ICBM’ 또는 ‘쓰나미 대파괴 Apocalypse 어뢰’로 불리며, 기지파괴 또는 해안시설 파괴의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러, 히로시마 원폭 6250배 위력 핵어뢰 실전배치

  • 기술적 의혹: 포세이돈의 대형 몸체를 공동으로 덮을 수 있는 초공동 기술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실험 결과 부족: 러시아의 초공동 무기의 실효성을 입증할 수 있는 실험 결과가 공개되지 않아 의혹이 증대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개발 현황

  • 미국의 개발: 미국 해군은 1997년에 수중에서 최초로 수중음속(1500m/s 또는 3,010kts)보다 빠르게 물체가 항주하는 실험을 실시하였다.
    • 장기 과제: 미국 해군연구실에서 초공동 어뢰 개발을 주도하고 있으며, 전력화까지 15년 이상 소요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 중국의 접근: 2014년에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며 초공동 기술 경쟁에 동참하였다.
    • 하얼빈 공업대학 연구팀: 저속에서는 물체 표면의 막을 통해 마찰력을 낮추고, 일정 속력 이상에서 초공동 단계에 진입하는 개념을 발표하였다.
    • 기술적 한계: 안정적인 공동형성과 방향전환의 어려움이 지적되었다.
  • 기타 국가의 노력: 이란은 러시아의 쉬크발 어뢰를 복제하여 자국에서 생산한 후트(Hoot) 어뢰를 보유하고 있다.

초공동 기술의 한계점

  • 방향 조정의 어려움: 수중에서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 해수의 저항을 활용한 타(Rudder)가 필요하나, 초공동 상태에서는 해수와 접촉할 수 없다.
    • 대안 아이디어: 측면에서 유체를 분사하거나 새로운 방식의 타를 적용하는 방법이 제안되었으나, 통제의 어려움이 있다.
  • 탐지장비 사용의 제한: 초공동 추진체는 높은 자체소음과 음파전달율의 저하로 인해 표적 소음을 탐지하는 데 제한이 있다.
    • 소음 문제: 공동 형성 소음과 추진계통에서의 소음이 문제로 지적된다.
  • 기술적 도전: 고속으로 추진하며 안정적인 초공동을 유지하는 기술적 어려움이 존재한다.
  • 실효성 문제: 초공동 무기는 아직 실효성이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으며, 개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운용 사례가 부족하다.

 

기타 개발 사례

  • 고스트(Ghost) 수상정: 미국 업체 Juliet Marine Systems에서 2011년에 초공동 기술을 적용한 수상정 시제품을 공개하였다.
    • 구조: 본체는 수면 위에 위치하고, 두 개의 초공동 추진체만 수중에 위치하여 해수와의 마찰을 최소화한다.
    • 속도: 50kts 이상의 고속항해가 가능하다.
  • CAV-X 초공동 탄환: 2019년 말 미군에서 노르웨이 업체 DSG에서 개발한 CAV-X 초공동 탄환에 대한 수중발사시험을 실시하였다.
    • 재질: 텅스텐 재질로 제작되어 부식에 강하다.
    • 발사 방식: 별도의 부가장치 없이 기존의 총알 대신 장전하여 발사할 수 있다.대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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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양한 활용 가능성: 초공동 기술은 연안전투, 특수전 지원 등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

수중전쟁 게임체인저, 어뢰의 끝판왕 '초공동어뢰' [밀리터리 월드]
한국형 요격어뢰, 이르면 2025년 하반기 선보인다

결론 및 미래 전망

  • 초공동 기술의 지속적 개발: 초공동 기술은 반세기 넘게 신기술로 간주되며, 개발이 지속되고 있다.
  • 실전 적용의 회의적 평가: 실전 적용 측면에서는 회의적인 평가가 존재하지만, 작전운용능력이 확보되면 수중전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 다양한 분야의 활용: 초공동 기술을 잠수함이나 어뢰에만 적용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특수전 분야와 고속 수송체에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 혁신의 중요성: 혁신적인 성장은 불가능해 보이는 아이디어를 실현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되며, 이를 통해 국방이 첨단 기술을 선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


초공동 기술현황 및 무기체계 적용 방안

 

http://journal.knst.kr/xml/22084/22084.pdf

 


#태그 #초공동어뢰 #해양전투 #무기시스템 #세종대왕함 #군사기술 #전략적의미 #미래전투 #수중전투 #군사전략

 

이런 자료를 참고 했어요.

 

[1] NAVER - 비행기보다 빠른 어뢰가 있다고? <초공동어뢰> (http://blog.naver.com/dapapr/223289223845?fromRss=true)

[2] BEMIL 군사세계 - 초공동(Supercavitation) 기술의 이해와 개발 사례 분석 (https://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08&pn=1&num=225&pan)

[3] 파이낸셜뉴스 - 물속의 토마호크, 초공동 어뢰(상) [밀리터리 동서남북] (https://www.fnnews.com/news/202109180735250400)

[4] 해피캠퍼스 - 초공동 어뢰의 특성과 구조 (Charateristics&Construction of ... (https://www.happycampus.com/report-doc/14224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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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급 구축함 개요

  • 정조대왕급 구축함은 대한민국 해군이 KDX-III Batch-II(광개토-III Batch-II) 사업을 통해 전력화하는 신형 이지스 시스템 탑재 구축함(DDG: Destroyer Guided-missile)이다.
  • 이 구축함은 탄도 미사일 방어 체계가 추가되었으며, 대잠전 체계가 향상되었다.
  • 신형 K-VLS-II를 전력화하여 무장을 더 효율적으로 탑재할 수 있게 되었다.
    정조대왕급 구축함의 성능

 

 

 

탐지 및 추적 능력 향상

  • 정조대왕급 구축함은 다기능 위상배열 레이더, 적외선 탐지·추적장비, 전자광학추적장비 등을 갖추고 있다.
  • 이로 인해 탐지 및 추적 능력 2배 이상 증가하였다.

 

이러한 성능 향상은 해군의 전투 능력을 크게 개선하는 요소가 된다.

 잠수함 탐지 능력 개선

  • 구축함은 통합소나체계를 탑재하여 잠수함 탐지 거리 3배 이상 향상되었다.
  • 보조추진체계를 통해 연료를 절감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 이는 운영 비용 절감과 함께 작전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정조대왕급 구축함의 건조 계획

  • 정조대왕급 구축함은 2014년부터 2028년까지  3조 9천억 원을 투자하여 총 3척을 확보할 예정이다.
  • 이 계획은 대한민국 해군의 전력 강화를 위한 중요한 투자로 평가된다.

선도함 진수 및 인도 일정

  • 선도함 **정조대왕(DDG-995)**은 2022년 7월 28일 HD현대중공업의 울산조선소에서 진수되었다.
  • 이 구축함은 2024년 11월 27일 대한민국 해군에 인도될 예정이며, 2024년 12월부터 본격적인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 이는 해군의 현대화와 전투 준비 태세를 강화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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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방위비 증액 개요

  • 일본의 방위비: 일본이 내년 방위비로 역대 최대 규모의 예산을 투입할 전망이다.
  • 예산 규모: 일본 방위성은 2025년도 방위비 예산으로 8조5389억엔(약 78조2000억원)을 책정하였다.
  • 증가율: 이는 작년보다 7.4% 증가한 수치이다.
  • 미래 전망: 현재 추세로 볼 때, 2027년에는 방위비가 10조엔을 초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방위비 예산 세부 사항

  • 예산 기간: 2025년도 방위비 예산은 2025년 4월부터 2026년 3월까지의 기간을 포함한다.
  • 역대 최대 규모: 이번 예산은 일본 역사상 가장 큰 방위비 예산으로 기록될 것이다.
  • 증가 추세: 일본의 방위비는 5년 만에 2배가량 증가하는 셈이다.
  • 국제적 비교: 주요 국가에서 이와 같은 방위비 증액 속도를 찾기 힘들다.

방위비 증가 추세

  • 과거 방위비: 3~4년 전 일본의 방위비는 5조엔(약 45조8000억원) 안팎이었다.
  • 연간 증가: 일본의 방위비는 매년 5000억~1조엔씩 증가해 왔다.
  • 미래 예측: 이 같은 흐름이 지속될 경우, 2027년에는 방위비가 10조~11조엔(약 100조8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 중국 견제: 일본은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중국 견제라는 명분 하에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과의 방위비 비교

  • 비교 대상: 일본의 방위비는 한국의 내년 국방 예산과 비교할 때 10조원 이상 많다.
  • 국방비의 의미: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명목상 ‘국방비’가 아닌 ‘방위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 방위비의 중요성: 일본의 방위비 증액은 단순한 방어용으로만 볼 수 없다.
  • 국제적 맥락: 일본의 방위비 증액은 국제 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시다 내각의 군사력 강화

  • 군사력 강화 드라이브: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주도한 군사력 강화 드라이브가 일본 방위비 증액의 배경이다.
  • 중장기 계획: 기시다 내각은 2022년 말 각의에서 향후 5년간(2023~2027년) 방위비로 43조엔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하였다.
  • 미국의 요구: 일본은 중국 견제를 위해 미국의 직간접적인 요구를 수용하고 있다.
  • 정치적 의도: 이러한 방위비 증액은 일본의 군사력 강화를 위한 정치적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반격 능력 부여

  • 자위대의 역할: 기시다 내각은 각료 회의 의결을 통해 자위대에 반격 능력(적 기지 공격 능력)을 부여하였다.
  • 무력 공격의 대응: 일본에 대한 무력 공격의 위험이 임박할 경우, 자위대는 미사일 등으로 적국의 군사 시설을 공격할 수 있다.
  • 방위 전략의 변화: 이는 일본의 방위 전략에 중대한 변화를 의미한다.
  • 국제적 반응: 이러한 변화는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군사적 입지를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NATO와 일본 방위비

  • NATO의 기준: 요미우리신문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가맹국은 국방비의 목표를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으로 하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 일본의 방위비 증액: 일본이 방위비를 증액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것이다.
  • 국제적 기준: 일본의 방위비 증액은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 정치적 맥락: 이러한 방위비 증액은 일본의 정치적, 군사적 입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함정

  • 경항공모함 0척(+2)
    • 이즈모급 다용도운용모함 2척 (2척 항모화 개수중)
  • 헬기모함 4척(-2)
    • 휴우가급 헬기구축함 2척
    • 이즈모급 다용도운용모함 2척(-2)
  • 강습상륙함 3척(-)
    • 오오스미급 강습상륙함 3척
  • 상륙정 ?척
    • 수송정 1호형 ?척
    • LCAC 1호형 ?척
  • 이지스 구축함 8척(+2)
    • 공고급 구축함 4척
    • 아타고급 구축함 2척
    • 마야급 구축함 2척
    • 차기 이지스시스템 탑제함(함명미정) 0척(2척 건조논의중)
  • 준(미니) 이지스 구축함 6척(-)
    • 아키즈키급 구축함 4척
    • 아사히급 구축함 2척
  • 범용 구축함 22척(-8)
    • 아사기리급 구축함 8척(-8)
    • 무라사메급 구축함 9척
    • 타카나미급 구축함 5척
  • 호위함 8(+14)
    • 이부쿠마급 호위함 6척(-6)
    • 모가미급 호위함 2척(+20,3척 건조완료 17척 건조중/대기)
  • 미사일 고속함 5척
    • 하야부사급 미사일 고속함 5척
  • 초계함 0척(+12)
    • 차기 초계함 사업(함명미정) 0척(12척 건조 확정 세부사항 논의중)
  • 잠수함 22척(-)
    • 오야시오급 잠수함 9척(-2)
    • 소류급 잠수함 12척
    • 타이게이급 잠수함 1척(초도함 시험함 전환,2척 건조완료 3척 건조중/예정)
  • 시험함 1척(+1)
    • 아스카 1척
    • 타이게이 0척(+1)
  • 소해모함 2척
    • 우라가급 소해모함 2척
      • 소해함/정 6척(+1)/28척
        • 야에야마급 소해함 3척
        • 아와즈급 소해함 3척(+1)
        • 우와지마급 소해정 10척
        • 스가시마급 소해정 12척
        • 히라시마급 소해정 3척
        • 에노시마급 소해정 3척
  • 보조함
    • 치요다급 구조함 1척
    • 토와다급 군수지원함 3척
    • 마슈급 군수지원함 2척
    • YOT-1급 급유함 ?척

 

 

 

히우치급 다용도 지원함

항공기

  • 아구스타 AW-101 소해헬기 5대
  • 비치크레프트 킹 에어 수송기 31기
  • P-3C 오라이언 대잠초계기 80여기
  • P1 초계기 33대
  • P-3 전자 정찰기 30기
  • P-3 정찰기 8기
  • US-1 수륙양용 구조기 7대
  • UH-60 블랙호크 헬기 19대
  • CH-53 슈퍼 스탤리온 소해헬기 10대
  • SH-60 헬기 131대
  • F-35B 라이트닝2 0기(40기가량 도입 예정)

함재 미사일



함대함 미사일
  • 함대잠 미사일
    • 07식 VLA
  • 함대공 미사일
    • SM-2
    • SM-3
    • SM-6
    • ESSM
    • RIM-7 시스페로우
    • RIM-116 시 렘(CIWS)
  • 함대지 미사일
    • 토마호크 미시일(도입 논의중)

일본 해군력의 역사적 배경

일본의 해군력은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근대화 과정과 함께 급속히 성장했어요. 특히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구의 군사적 현대화를 받아들이며 해군력을 강화하기 시작했죠. 이 시기에는 일본 해군이 강력한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고, 1905년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는 일본 해군력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어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평화 헌법을 채택하면서 군사력 강화를 자제해야만 했습니다. 일본은 자위대라는 형태로 해군력을 유지하게 되었는데, 해상자위대는 방어적인 역할에 중점을 두고 발전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해상자위대는 현대화와 기술 발전에 힘입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력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죠.

현재 일본 해상자위대의 구성

현재 일본 해상자위대는 다양한 척척을 보유하고 있어요. 이들은 항공모함, 잠수함, 구축함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총 47척의 군艦을 운영하고 있죠. 그중에서도 이즈모급 헬리콥터 항모는 248미터 길이로 14대의 헬리콥터를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를 자랑해요. 또, 소류급 잠수함은 84미터 길이로 최대 500미터 깊이로 잠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요

 

그리고 아타고급 구축함은 165미터 길이로 다양한 방어 및 공격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요. 일본의 해상자위대는 총 45,500명의 인력을 포함하고 있어서, 이러한 인프라와 인력이 결합된 일본 해상자위대는 대단한 전투력을 발휘하고 있어요.

세계 해군력 순위에서의 일본

2023년 기준으로 세계 해군력 순위를 보면, 미국이 1위로 자리 잡고 있고, 이어서 중국과 러시아가 뒤따르고 있어요. 일본은 5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점수는 122.9점으로 계산되고 있어요

 

. 이러한 순위는 일본의 군사력과 전략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역할을 강조하죠.

일본의 해군력은 단순히 숫자에 그치지 않고, 기술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어요. 해상자위대는 최신 기술을 접목한 다양한 무기 시스템과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어서, 전투 능력을 극대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중국과의 해군력 비교

일본과 중국의 해군력 비교는 항상 흥미로운 주제 중 하나예요. 역사적으로 보면, 1894년 이전 일본의 전투선은 40척, 중국은 34척으로 일본이 우세했어요. 하지만 현재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죠. 현재 중국은 970척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120척 정도에 불과해요

 

.

이는 일본 해군력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을 보여주지만, 일본은 그 대신 해양 방어와 전략적 기동 능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이를 통해 일본은 중국과의 해양 경계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일본 해군력의 미래 전망

앞으로의 일본 해군력은 더욱 흥미로운 요소를 포함하게 될 것 같은데요. 일본은 현대적인 무기 체계와 방어 전략을 강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특히, 북한과 중국의 해양 군사 활동이 증가함에 따라, 일본은 그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있어요.

 

일본의 해상자위대는 다양한 국제 연합 작전에도 참여하면서, 국제 사회에서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고 있죠. 이러한 흐름은 일본의 해군력이 단순한 방어적 역할을 넘어서는 중요한 지점이 될 것으로 예상돼요.

마무리 및 개인적인 의견

일본 해군력에 대해 살펴보니, 그 발전의 역사와 현재의 상황, 그리고 미래의 전망까지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일본의 해군력이 단순히 군사력이 아니라, 국제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일본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방어 체계를 구축하고, 국제 사회에서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고 느껴져요.

이러한 점에서 일본 해군력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가 필요할 것 같아요. 다양한 국제적 요인들이 일본 해군력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앞으로의 변화를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일본의 군사력 증강 배경

  • MV-22 오스프리: 미군이 운용 중인 수직이착륙 수송기의 별칭으로, 일본의 군사력 증강과 관련이 있다.
  • 물수리 비유: 오스프리는 하늘을 날며 물속의 고기를 귀신처럼 낚아채는 물수리와 비유된다.
  • 기술적 우위: 기존의 치누크 헬기에 비해 속도는 두 배, 탑재 능력은 세 배, 행동 반경은 네 배로 향상된 최첨단 무기이다.
  • 일본의 도입 결정: 일본은 중기방위력정비계획(2014~2019년)에 따라 오스프리 17대를 도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의 방위력 강화 계획

  • 군비 증강 계획: 일본은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국과의 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군비 증강을 추진하고 있다.
  • 예산 규모: 24조6700억 엔(약 245조2000억원) 규모의 군비 증강 계획에는 오스프리 외에도 무인정찰기인 글로벌호크 3대, 공중급유기, 잠수함, 수륙양용장갑차 등이 포함된다.
  • 미국의 판매: 미국의 오스프리 판매는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일본이 유일하다.
  • 전략적 필요성: 일본의 군사력 증강은 지역 안보 환경의 변화에 따른 전략적 필요성에 기인한다.

일본의 군사력 평가

  • 전쟁할 수 있는 나라 선언: 일본은 1일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선언하며 자위대의 전력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 군사력 순위: 국제 군사력 평가기관인 글로벌파이어파워(GFP)에서 일본은 핵전력을 제외하고 10위(한국 9위)를 차지하였다.
  • 군사비 지출 순위: 스톡홀름국제평화문제연구소(SIPRI)에서 집계한 2013년 군사비 지출 순위로는 일본이 세계 8위에 해당한다.
  • 교전권 부재: 일본은 지금까지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고 전수방위 원칙에 철저했기 때문에 군사력의 질적 강화를 추구하고 있다.

일본의 방위비 지출 현황

  • 국방비 비율: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비율은 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 비교 국가: 미국은 3.8%, 중국은 2.0%의 국방비 비율을 보이고 있다.
  • 군비 확충 여력: 낮은 국방비 비율은 일본이 군비를 확충할 여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 정규 병력수: 일본의 정규 병력수는 24만7160명으로, 1억2700만 인구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일본의 방위 전략과 목표

  • 안보 환경 분석: 일본 방위백서는 주변국의 군사력 현대화, 북한의 미사일 발사 및 핵실험, 중국의 영해 침입 및 영공 침범 등을 지적하고 있다.
  • 방위력 구축 목표: 일본은 ‘다기능적이고 탄력적인 실효성 있는 방위력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 동적 방위력: 2010년에는 ‘동적 방위력’ 구축을 추가하여 교전권을 부정한 평화헌법에 따라 최대한의 군사력 강화를 노리고 있다.
  • 군사력 증강 내역: 일본의 2014년 방위 및 예산 자료에는 자위대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구체적인 내역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 해상자위대의 전력 강화

  • 전력 강화 계획: 일본 해상자위대는 올해 전력을 더욱 강화할 예정이다.
  • 이지스 구축함 운영: 일본은 현재 이지스 구축함을 6척 운용 중이며, 10년 안에 2척을 추가할 예정이다.
  • 잠수함 전력 확충: 일본은 현재 16척의 잠수함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2900t 소유급 잠수함 6척을 추가 건조할 계획이다.
  • 항공모함 기능: 길이 248m, 배수량 1만9500t인 ‘이즈모’형 호위함은 헬기 수송함이지만 사실상의 항공모함으로 기능하고 있다.

일본의 항공 전력 계획

  • F-35A기 구매: 일본은 미국이 개발 중인 차세대 전투기 F-35A기의 구매를 위해 638억 엔을 배정하였다.
  • 장기 보유 계획: 일본의 항공자위대는 장기적으로 F-35A기를 100대 이상 보유할 계획이다.
  • 중국의 대응: 이는 중국의 차세대 스텔스 전투기인 젠(殲)-20에 대한 대응책으로 마련된 것이다.
  • 군사력 현대화: 일본의 항공 전력 증강은 지역 안보 환경의 변화에 따른 군사력 현대화의 일환이다.

일본의 군사적 위기감 조성

  • 기지국가로서의 일본: 서울대 남기정 교수는 일본이 평화국가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실질적으로는 700여 개의 미군기지로 이루어진 ‘기지국가’였다고 언급하였다.
  • 영토 분쟁 격화: 중국과의 영토 분쟁이 격화되면서 일본은 군사대국화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 위기감 조장: 일본은 20세기 초와 비슷한 방식으로 위기감을 조장하고 있으며, 이는 군사력 증강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 안보 환경 변화: 일본의 군사적 위기감은 주변국의 군사력 현대화와 관련이 깊다.

#태그 #일본해군력 #해상자위대 #세계해군력 #중일해군비교 #군사력 #해군역사 #일본군사전략

이런 자료를 참고 했어요.

[1] 한국해양전략연구소 - 일본 해군력의 역사적 전환점 '8함 8기 체제'의 시사점 (https://kims.or.kr/issubrief/kims-periscope/peri219/)

[2] KCI - 일본의 해양전략과 해상자위대 전력운용 변화 분석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921962)

[3] 한국해양전략연구소 - 일본 해상자위대 전력건설 재조명을 통한 한국 해군력 ... (https://kims.or.kr/maritimesecurity/2-2/)

[4] DBpia - 한 · 일 해상전력 비교분석과 시사점 - 문헌조사를 통한 ...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10516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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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최대 전차전: 쿠르스크 전투의 모든 것

 

쿠르스크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독일과 소련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사건이에요. 이 전투는 1943년 7월 4일부터 8월 23일까지 진행되었고, 전투의 배경을 살펴보면 그 당시 독일의 동부 전선에서의 상황과 소련의 방어 전략이 엮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전투의 규모는 정말 엄청났어요. 쿠르스크 전투는 역사상 최대의 전차전으로 불리며, 약 8,000대의 전차가 동원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독일의 타이거 전차와 소련의 T-34 전차가 치열하게 맞붙었죠. 전투 초기에는 독일군이 우세한 상황이었지만, 소련군의 방어선 강화와 기습적인 반격으로 전세가 뒤바뀌는 순간이 많았어요.

 

 

 

전투 중 발생한 주요 작전과 그에 따른 전투의 전개 상황을 살펴보면, 독일군의 'Zitadelle 작전'은 쿠르스크 돌출부를 목표로 하였는데, 이는 다수의 전차와 항공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이었어요. 소련군은 이 작전이 발생하기 이전에 방어선을 사전에 강화하고, 적의 공격을 예상하여 전투 준비를 철저히 했죠.

 

 

쿠르스크 전투의 결과는 전후 전쟁에 미친 영향이 상당했어요. 이 전투에서 소련군이 승리하게 되면서 독일군은 동부 전선에서 더 이상의 공격을 지속하기 어려워졌고, 이는 전반적인 전쟁의 흐름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어요. 독일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킨 이 전투는 소련군의 사기를 높이고, 전쟁의 주도권을 가져오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죠.

 

 

많은 사람들이 쿠르스크 전투를 역사적 전환점으로 이야기하지만, 이 전투가 남긴 유산은 단순히 군사적 승리에 그치지 않아요. 현대 전쟁에서도 여전히 많은 전술적 교훈을 제공하고 있으며, 전쟁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제시하고 있어요.

 

 

 

전투의 전개 과정에서 보여준 전략과 전술의 변화는 오늘날에도 많은 군사 전문가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는 주제입니다. 이렇듯 쿠르스크 전투는 단순한 전투의 연대기를 넘어서, 전쟁의 본질과 그에 대한 인간의 응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있습니다.

 

 

 

결국, 쿠르스크 전투는 전쟁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며, 전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죠. 독일과 소련 간의 전투는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흥미로운 주제로 남아 있으며,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 역사적 맥락이 계속해서 조명되고 있습니다.

 

 

 


 

 

 

 

 

 

 

 

 

 

 

 


 

쿠르스크 전차전을 배경으로 한 유럽의 해방(liberation) 1부 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zAcLXdGoyI

 

.

 

#태그 #쿠르스크전투 #전차전 #제2차세계대전 #전쟁사 #소련 #독일 #전략 #역사

 

이런 자료를 참고 했어요.

 

[1] 나무위키 - 쿠르스크 전투

(https://namu.wiki/w/%EC%BF%A0%EB%A5%B4%EC%8A%A4%ED%81%AC%20%EC%A0%84%ED%88%AC)

[2] Wikipedia - 쿠르스크 전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C%BF%A0%EB%A5%B4%EC%8A%A4%ED%81%AC_%EC%A0%84%ED%88%AC)

[3] YouTube - 독일 vs 러시아, 역사상 최대의 전차전 (https://www.youtube.com/watch?v=-mrRMTKMPN0)

[4] 뉴스1 - [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쿠르스크 악몽의 전차전① (https://www.news1.kr/life-cultu

출처: https://view6980.tistory.com/291 [view6980 님의 블로그: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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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전함은 일본 제국 해군의 상징적인 존재로, 그 역사와 설계, 전투, 실패 원인, 그리고 문화적 영향까지 여러 측면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요. 오늘은 이 전함에 대해 깊이 있게 알아보려고 해요.

1. 야마토 전함의 역사

야마토 전함은 1937년에 건조가 시작되어 1941년에 완공되었어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전함으로 알려졌고, 일본의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죠. 하지만 이러한 거함이 과연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역사 속에서 자리 잡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일본 제국 해군의 전함 개요

  • 일본 제국 해군의 전함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로 시작된다.
  • 이 전함은 야마토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 해군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군축조약과 야마토 건조 배경

  • 일본 제국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서 탈퇴하였다.
  • 이러한 탈퇴는 함대결전시 해군의 전력비상 열세를 질로 만회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다.
  • 규격 외의 초거대 전함으로서, 일본 해군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건조되었다.

야마토의 크기와 무장

  • 야마토 전장 263m, 전폭 39m의 거대한 전함이다.
  • 이 전함은 460mm 함포를 탑재하여 거함거포주의의 정점에 달한 전함으로 평가된다.
  • 비교 대상으로는 영국의 어드미럴급 순양전함, 뱅가드, 미국의 아이오와급 전함, 독일의 비스마르크급 전함이 있다.

전함의 전투력과 비아냥

  • 야마토는 상당기간 대기만 하는 초라한 전과로 인해 비아냥을 받았다.
  • 전함의 내부는 호화로운 설비 높은 급식의 질로 여객선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야마토는 일본군의 대다수 전함들과 함께 항구에 처박혀 있었다.
  • 이로 인해 야마토 호텔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하였다.

해군 내부의 갈등과 찬반 논쟁

  • 일본 제국 해군 내부에서는 야마토급 전함의 건조 여부를 둘러싸고 상당한 갈등이 존재하였다.
  • 거함거포주의 파벌은 야마토급 전함을 건조하기 위해 상세한 제원과 예산을 확보하였다.
  • 반면, 항공모함 시대를 주장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같은 인물들은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다.
  • 그러나 결국 거함거포주의 파벌이 해군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야마토의 명명법과 역사적 배경

  • 야마토라는 이름은 일본 고대국가 야마토 왕권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야마토노쿠니(大和国)에서 따온 것이다.
  • 일본 해군의 전함 명명법은 옛 일본의 율령국에서 유래한다.
  • 자매함 무사시 시나노의 어원도 율령국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 항공모함 카가 역시 원래 전함이었으며, 번국을 함명으로 사용하는 전통이 있다.

야마토의 승조원과 내부 구조

  • 이시다 나오요시라는 해군 장교의 증언에 따르면, 야마토 내부에는 길을 잃을 때를 고려한 화살표가 곳곳에 있었다.
  • 이러한 표식은 현대의 안내판과 유사한 기능을 하였다.
  • 이는 상당히 큰 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야마토급의 배수량과 기록

  • 야마토급은 두터운 장갑 덕분에 기준배수량 65,000t, 만재 배수량 72,000t에 달하는 거구이다.
  • 이 기록은 1950년대 말에 미국의 포레스탈급 항공모함이 깰 때까지 유지되었다.

야마토의 최후와 역사적 의미

  • 야마토급은 단 1척의 잠수함 어뢰에 의해 격침당한 가장 큰 군함으로 기록된다.
  • 이는 야마토급을 개장해 건조한 항공모함에 해당한다.
  • 야마토는 일본 해군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존재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https://www.youtube.com/watch?v=qhdQtwZDkGs

 

Man in the High Castle S03 Yamato class battleship scenes


2. 야마토 전함의 설계와 특징

야마토 전함은 263m에 달하는 길이와 72,000톤에 가까운 배수량을 자랑했어요. 이 전함은 46cm의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고, 이는 당시 가장 강력한 화력으로 평가받았죠. 그러나 거대한 크기와 화력에도 불구하고, 디자인의 문제로 인해 실제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못했어요. 이 전함의 설계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존재했는데, 특히 무게 중심과 이동성의 문제로 인해 기동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어요.

 

 

 

당시 일본 해군은 야마토 전함을 통해 '거함거포전'의 시대를 열고자 했지만, 실제 전투에서의 운용은 예상과 달리 복잡했어요.

 

 

 

고요한 바다를 항해하는 야마토 전함의 모습은 그 자체로도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러한 외형적인 매력과는 다르게 전투에서의 성능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어요.

3. 야마토 전함의 전투

야마토 전함은 여러 해전에서 참전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1945년의 오키나와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이때 야마토는 우월한 화력을 발휘했지만, 단독으로는 전투를 이끌기에는 한계가 있었어요. 전투 중 미군의 항공기 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게 되죠. 이 전투는 야마토 전함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순간 중 하나로 남아 있어요.

 

 

신뢰를 잃어가는 일본 해군의 현실을 보여주는 전투 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죠.

4. 야마토 전함의 실패 원인

야마토 전함의 가장 큰 문제는 거대한 규모와 설계의 결함이었어요. 당시 해전의 패턴이 변화하면서, 대규모 전함의 필요성이 줄어들었고, 대신 항공모함과 같은 새로운 전투 방식이 부각되었죠. 결국 야마토 전함은 해전에서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많은 전투에서 무용지물로 전락하게 되었어요.

 

 

이러한 과거의 모습은 야마토 전함이 겪었던 실패를 더 극명하게 드러내죠.

5. 야마토 전함의 문화적 영향

야마토 전함의 이야기는 단순히 군사적 측면을 넘어서 문화적 영향도 미쳤어요. 많은 영화와 소설에서 야마토 전함은 중요한 소재로 다루어졌는데, 예를 들어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종종 등장하죠. 이러한 작품들은 야마토 전함을 단순한 전투 수단이 아닌 하나의 상징으로 부각시키고 있어요.

 

야마토 전함의 역사적 의미는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이러한 문화적 해석은 오늘날에도 그 영향력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이러한 전함의 모습은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죠.

6. 마무리 및 개인적인 생각

야마토 전함은 단순한 전함을 넘어서 일본 역사와 군사 전략의 아이콘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 설계의 실패와 전투에서의 무용은 결국 군사적 전략의 변화와 시대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죠. 개인적으로는 야마토 전함의 이야기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느끼고 있어요. 과거의 실패를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네요.

 

여러분도 야마토 전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의 의견을 댓글로 공유해 주세요!


첨언: 결국 일본 해군이 삽질 하였음을 만방에 알리다 !!!!

태그

#야마토전함 #일본전함 #군사역사 #해전 #전투 #문화적영향 #군국주의 #실패작 #전쟁사

 

이런 자료를 참고 했어요.

 

[1] 나무위키 - 야마토급 전함/평가 (https://namu.wiki/w/%EC%95%BC%EB%A7%88%ED%86%A0%EA%B8%89%20%EC%A0%84%ED%95%A8/%ED%8F%89%EA%B0%80)

[2] 나무위키 - 야마토급 전함/문제점 (https://namu.wiki/w/%EC%95%BC%EB%A7%88%ED%86%A0%EA%B8%89%20%EC%A0%84%ED%95%A8/%EB%AC%B8%EC%A0%9C%EC%A0%90)

[3] NAVER - 군국주의 일본 '초거대 전함'은 왜 실패했을까? | 아르키메데스의 ... (https://blog.naver.com/kookbang_media_lab/223118671375)

[4] BEMIL 군사세계 - 일본전함 야마토호에 관한 질문입니다. (https://bemil.chosun.com/nbrd/gallery/view.html?b_bbs_id=10040&pn=5&num=23029)

 

출처: https://view6980.tistory.com/179 [view6980 님의 블로그: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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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6일 (화) 오후 6:41

 

 

일본 금괴, 야마시타 보물의 비밀

 

 

 

 

행적 및 초기 생애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육군의 장군으로 최종 계급은 대장이다.
  • 출신지: 코우치현 나가오카군 오오스기촌(현 오오토요 쵸).
  • 학력:
    1. 코우치현 해남중학교
    2. 히로시마 육군유년학교
    3. 육군중앙유년학교
    4. 육군사관학교(18기)
    5. 육군대학교(28기)
  • 유학: 스위스와 독일로 유학 후 귀국하여 육군성 군사과장, 군사조사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싱가포르 전투와 협상

  • 전투 성과: 싱가포르 전투에서 기동전으로 대활약하며 **"말레이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협상 과정:
    • 영국군 총사령관 아서 퍼시벌 장군과의 협상에서 **"예스냐? 노냐?"**라는 발언이 유명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 실제로는 **"항복할 거야, 안 할 거야!!"**라는 발언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항복 협상과 오해 

  • 협상 상황:
    1. 1942년 2월 15일, 일본군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와 영국군 사령관 아서 퍼시벌 간의 항복 협상이 시작되었다.
    2. 통역관의 부족한 군사용어 지식으로 인해 양측 의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 "예스냐? 노냐?"의 유래:
    • 야마시타는 퍼시벌에게 강압적으로 질문한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말하지 말고 항복할 건지 아닌지 '예스냐? 노냐?'로 간단히 물어봐!"**라고 요청한 것이다.
    • 이 장면은 기자에 의해 왜곡되어 보도되었다.

필리핀 방어전과 마닐라 대학살

  • 전략: 야마시타는 마닐라를 무방비 도시로 선언하고 잔존부대를 루손 북부의 산악지대로 이동시켜 지연전을 펼치려 하였다.
  • 해군 육전대의 반발:
    • 해군 육전대는 야마시타의 명령을 거부하고 독단적으로 시가전에 돌입하였다.
    • 이 과정에서 마닐라 대학살이 발생하였고, 민간인 사망자는 약 10만 명으로 추정된다.

최후와 전범 재판

  • 전범 기소: 야마시타는 마닐라 전범재판에서 B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 책임:
    1. 츠지 마사노부의 독단적 행동으로 인한 싱가포르 대학살
    2. 해군 육전대의 마닐라 대학살
  • 처형: 유죄가 인정되어 결국 사형당하였다.

처형과 유언

  • 처형 방식: 야마시타는 군복을 입고 총살형을 받기를 원했으나, 미국 정부는 이를 거부하였다.
  • 마지막 유언: **"나는 도조 새끼에게 속았다!!"**라는 절규를 남겼다.
  • 합사: 처형 후, 그는 다른 B, C급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전후 평가와 군국주의

  • 군사적 능력: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지녔고, 많은 전과를 올렸다.
  • 군국주의적 성향: 뼛속까지 제국주의 사상과 천황 제일 사상에 젖어있던 인물이다.
  • 부하에 대한 태도: 작전 수행 과정에서 부하들을 가혹하게 다루었으며, 이로 인해 전쟁범죄가 발생하였다.

야마시타 골드와 도시전설

  • 야마시타 골드: 점령지에서 수탈한 재산과 군자금을 필리핀에 은닉했다는 도시전설의 주인공이다.
  • 도시전설의 영향: 이 전설은 일본과 미국 간의 음모론으로 발전하였다.

여담 및 역사적 맥락

  • 츠지 마사노부: 싱가포르 전투 당시 야마시타의 참모로 일했으나, 그의 독단적 행동이 문제를 일으켰다.
  • 전후 논의: 베트남 전쟁 당시 미라이 학살과 관련하여 야마시타의 판례를 들어 웨스트모어랜드도 기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일본 금괴, 즉 야마시타 보물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이 보물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이 필리핀에 숨겨놓은 금괴로, 지금까지도 많은 탐험가와 보물 사냥꾼들이 이 보물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답니다. 그럼 야마시타 보물의 역사와 발견 과정,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

 

 

야마시타 보물은 일본 제국의 대장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남아시아에서 징발한 금괴를 필리핀에 숨긴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일본군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이 금괴를 일본 본토로 운송하려고 했지만, 전쟁의 혼란 속에서 금괴를 숨기게 되었답니다. 이 금괴는 주로 버마에서 수집된 것으로,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고 해요.

 

 

 

이미지 출처

이 보물에 대한 이야기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이 보물을 찾기 위해 필리핀을 탐험했어요. 하지만 보물의 정확한 위치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답니다. 야마시타 보물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보물을 찾기 위해 노력한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해요.

보물 발견의 여정

야마시타 보물을 찾기 위한 여정은 정말 흥미진진해요. 많은 탐험가들이 필리핀의 숲과 동굴을 탐험하며 금괴를 찾으려 했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답니다. 보물 사냥꾼들은 다양한 단서와 전설을 바탕으로 금괴의 위치를 추적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금괴가 숨겨진 장소를 찾기 위해 고대의 지도나 전설을 참고하기도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현지 주민들과의 대화를 통해 정보를 얻으려 했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은 금괴를 찾는 것뿐만 아니라, 필리핀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어요.

 

 

 

야마시타 보물의 의미

야마시타 보물은 단순한 금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이 금괴는 전쟁의 상징이자, 그 당시 일본 제국의 힘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존재랍니다. 또한, 이 보물은 필리핀의 역사와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어요. 금괴가 발견된다면, 필리핀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거예요.

 

 

 

이 보물은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존재이기도 해요. 보물 사냥꾼들은 이 금괴를 찾기 위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답니다. 그래서 야마시타 보물은 단순한 금괴가 아니라, 사람들의 열정과 꿈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어요.

 

야마시타 보물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이 보물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이야기와 전설이 만들어질 거예요. 여러분도 이 보물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혹시 여러분이 알고 있는 야마시타 보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view6980의 첨언

10여년전 필자도 야마시타 골드에 대한 그럴싸한 이야기를 들었고, 이들 발견하고자, 실제로 필리핀 마닐라 간 한국인들을 보았고, 몇년전에도 마닐라 마카티에서 그놈의 금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원주민들이 함께 찾아 나설 것을 제안 받았습니다. 하지만, 00 정글  어디 어디에 있다는 그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만약, 그때 헛꿈꾸며 따라 나섰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도 마닐라에 가면 마카티 커피숍에 금괴를 미끼로 사기치는 한국인,원주민 사기꾼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딘가에는  "야마시타 금괴"의 존재를 믿고는 있지만, 저들 사기꾼들에게 잘못 걸리면, 아니 십중팔구는 납치되거나 금품을 강탈 당하며, 목숨도 장담 못합니다. 혹시 누가 이따위  얘기하면서 당신을 꼬드긴다면, 그년놈은 사기꾼 입니다. 헛꿈 꾸지 마시고 아예 생각도 말것을 당부합니다요~ 목숨이 위태로우니까 말입니다~^^

 

출처: https://view6980.tistory.com/132 [view6980 님의 블로그: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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