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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4일 (일) 오후 4:29

 

문화대혁명의 개요

  • 불파불립(不破不立), 선파후립(先破后立): "부수지 않으면 세울 수 없다. 먼저 부수고 다음에 세운다."라는 마오쩌둥의 철학을 반영한 개념이다.
  • 문화대혁명: 중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이 시기에 많은 문화적,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다.
  • 시작의 불확실성: 문화대혁명의 시작은 명확하지 않으며, 그로 인해 발생한 여러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문화대혁명의 피해

  • 상상 초월의 피해: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중국은 상상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 문화 유산의 파괴: 한족뿐만 아니라 소수민족의 유적과 고구려, 발해 등의 유적들이 대규모로 약탈되거나 파괴되었다.
  • 파괴의 심각성: 문화대혁명은 중국 역사상 그 어떤 전란보다도 더 큰 문화 파괴를 초래했다.

 

문화 파괴의 규모

  • 반달리즘의 규모: 문화대혁명 동안의 반달리즘은 전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수준이다.
  • 문화 전반의 파괴: 중국 문화 전반이 파괴되어, 여러 분야에서 수백~수천 년 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 홍위병의 폭력: 홍위병들이 저지른 폭력은 사람뿐만 아니라 기존의 중국 문화 전체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쳤다.
    .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되는 칭화학당

 

 

문화대혁명의 흔적이 남은 SF <삼체 3>
홍위병과 공작조 등장…문화대혁명 비극
239-4.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간다>

소프트 파워의 저하

  •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 오늘날 중국은 하드 파워는 충분하지만, 소프트 파워는 미국과 비교할 때 매우 열세인 상황이다.
  • 문화계의 열세: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중국 대륙의 문화계는 주변 국가들에 비해 심각한 열세를 보이고 있다.
  • 수십 년의 경과: 문화대혁명이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 여파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상하이 아트의 새로운 발견

상하이 여행 중 상하이미술관, 아트위크

상하이의 문화적 위상

  • 상하이의 근대화: 20세기 초까지 상하이는 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성공한 도시로, 재즈와 소울 등의 음악과 영화가 번성했다.
  • 중국 배우와 뮤지션: 당시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중국 배우와 뮤지션들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 문화적 중심지: 상하이는 단순히 세계 열강의 조차지로서의 의미를 넘어,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전통 문화의 복원 노력

  • 전통 문화유산의 보호: 문화대혁명 동안 살아남은 전통 문화유산이 적지 않으며, 저우언라이의 보호가 없었다면 모두 파괴되었을 것이다.
  • 개혁개방 이후의 노력: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전통 문화 복원 및 보전에 힘쓰고 있다.
  • 소프트 파워의 순위: 현재 중국의 소프트 파워에서 문화 분야는 세계 30개국 중 8위로 높은 편이다.
    문화대혁명은 결코 위대한 혁명이 아니었다!”

 

중국의 소프트 파워 순위

  • 정치와 디지털 분야의 저조: 정치와 디지털 분야의 점수가 낮아, 현재 중국의 소프트 파워 순위는 세계 30개국 중 27위에 그치고 있다.
    한국에게 배워라" 중국서 절대 BTS가 못나오는 이유
  • 하드 파워와의 대비: 하드 파워로 분류되는 국력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인 것과 대조적으로, 소프트 파워는 여전히 뒤떨어져 있다.
  • 문화 강탈의 시도: 중국은 소프트 파워를 만회하기 위해 한국의 문화를 강탈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한국 문화 예속화 시도

한국과의 문화 비교

  • 중화권 문화 콘텐츠: 오늘날 중화권의 문화 콘텐츠 중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들은 대만이나 홍콩/마카오에서 제작된 것들이 많다.
  • 중국 본토의 한계: 중국 본토에서 만들어지는 문화 콘텐츠는 질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 대중음악 분야의 경쟁력: 대중음악 분야에서 중국 본토는 대만, 홍콩, 마카오와 경쟁할 만한 음원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중국 본토의 문화적 한계

  • 경제 규모와 하드 파워: 중국 본토의 경제 규모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지만, 이는 하드 파워가 뒤쳐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문화적 영향력이 경제적 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 한국의 문화 성장 사례: 한국은 1980년대부터 문화를 키우는 데 힘을 쏟았으며, 이는 경제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국의 문화 성장 과정

  • 독재 정권의 검열: 한국은 1980년대까지 독재 정권 하에서 대중 문화에 대한 검열과 탄압이 심했다.
  • 문화 상품의 해외 판매: 1993년 헐리우드 영화 '쥬라기 공원'의 성공 이후, 한국은 문화 상품을 해외에 판매하여 국가 이미지 개선을 도모했다.
  • 사회적 합의의 형성: 1990년대 초반, 문화 상품에 대한 검열과 탄압을 완화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문화대혁명의 경제적 피해

  • 경제적 피해 추산: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는 대략 5천억 위안으로 추산된다.
  • 한화로 환산: 2019년 기준으로 한화로 약 82조 600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 소프트 파워에 대한 영향: 이 피해는 단발성이 아니라 중국의 소프트 파워에 영구적인 손상을 남겼다.

 

문화대혁명의 장기적 영향

  • 역사적 가정: 문화대혁명이 없었다면, 중국의 역사와 문화가 오늘날까지 보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소프트 파워의 요소: 미국의 소프트 파워는 청바지, 할리우드, 코카콜라, 팝송 등으로 대변되며, 이는 중국의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 문화대혁명의 교훈: 문화대혁명은 중국 내 모든 자산을 소모하고, 경제 및 문화 위상을 크게 추락시킨 사건으로 평가된다.

 

 

대약진 운동과의 비교

  • 피해 규모의 합산: 대약진 운동의 피해 규모와 합치면 대략 6천 2백억 위안에 달한다.
  • 기반시설 투자와 비교: 이는 중국 정부가 건국 이후 30년 동안 기반시설에 투자한 총액보다 큰 금액이다.
  • 후발 국가의 경제적 추격: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후발 국가들에게 경제적으로 따라잡혔으며, 이는 중국의 경제적 위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문화대혁명의 교훈

  • 악습의 지속: 문화대혁명이 없었다면 남아있던 악습이 중국 문화와 사회 발전에 저해 요소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문화재 파괴의 과도함: 이미 힘을 잃은 문화재까지 파괴한 것은 지나친 행동으로 평가된다.
  • 악습의 악화: 축첩, 남아선호사상, 차부두어, 고질적인 인권문제 등 사라져야 할 악습들은 오히려 더욱 악화되었다.

반달리즘의 정의와 역사적 배경

  • **반달리즘(Vandalism)**은 문화재, 문화적 예술품, 종교 시설, 그리고 타인의 재산 등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려 하거나 낙서로 더럽히는 활동을 의미한다.
  • 이 용어는 **'훼손 행위(毁損行爲)'**라고도 불린다.
  • 역사적으로, 반달리즘은 아날로그 시대 디지털 시대를 기점으로 그 척도와 정도가 명확히 구분된다.
  • 최근에는 스마트폰을 통해 발생하는 반달 행위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PC에서 발생하는 반달과는 차이가 있다.

반달리즘의 특징과 심리적 요인

  •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반달리즘은 **'고의 또는 무지에 의한 공공물 등의 오손'**을 의미한다.
  • 범죄학 및 형사정책학에서는 반달리즘을 **'정신적 성숙이 신체적 성숙을 따르지 못하고 나타나는 부적응적 심리 상태에서 나타나는 문화 거부와 폭력적 반항 행위'**로 설명한다.
  • 반달리즘의 예로는 이유 없이 남의 기물을 손상시키는 행위 오토바이 폭주 등이 있다.
  • 이러한 현상은 강력범죄보다는 경미한 소년 비행 현상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며, 해결책으로는 조직적인 레크리에이션이 제시된다.

 

반달리즘과 문화적 맥락

  • 대한민국의 단편집 종말문학걸작선 2권에는 **'반달맨'**이라는 부류가 등장한다.
  • 이들은 핵전쟁 이후 지구에 남겨진 모든 문화예술을 철저히 파괴하는 자들로, 식량 부족으로 인해 생존을 위해 어린 아이들을 잡아먹는 참화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다.
  • 이들은 기성세대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으며, 기성세대가 남긴 유산의 흔적을 철저히 말살하고 있다.

반달족의 역사와 문화재 파괴

  • 반달리즘은 5세기 초 반달족의 활동에서 유래되었다.
  • 반달족은 서기 429∼534년 동안 훈족을 피해 서쪽으로 이동하며 갈리아의 일부를 침입하여 국토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반달족의 로마 약탈
  • 455년에는 로마를 침입하여 약탈하고 로마인 지주들에게서 땅을 빼앗았다.
  • 반달족은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를 열성적으로 믿었으며, 후네리크 치세 말기에는 아프리카의 가톨릭 교회를 심하게 박해하였다.

 

  • 현재 사용되는 **'반달리즘'**이라는 단어는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 세력이 교회를 때려 부수는 모습을 반달족에 빗대면서 등장하였다.
  • 근년에는 미국이나 유럽의 대도시에서 약탈과 살인, 공공시설의 파괴, 방화 등의 도시범죄가 급증하는 세태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역사적 반달리즘 사례

  • 인류의 반달리즘 사례는 기원전 4세기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 기원전 356년, 그리스 에페소스의 헤로스트라투스는 악행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아르테미스 신전에 불을 질렀다.
  • 아르테미스 신전은 그리스 최초의 순대리석 신전으로, 파르테논 신전의 두 배 규모에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건축물이었다.

한국사에서의 반달리즘

  • 한국사에서 자행된 반달리즘은 삼국전쟁 당시 당군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 지역에 대한 대규모 파괴가 있었다.
  • 백제의 문화재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에는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이 비문을 새겼다.
  • 신라 또한 후삼국시대 견훤에 의해 조직적인 파괴공작을 겪었다.
  • 고려시대에는 요나라의 침공으로 수도가 함락당해 많은 문화재가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전쟁과 문화재 보호의 중요성

  • 전쟁 중에도 상대방의 문화재를 파괴하는 행위는 최소한의 예의로 여겨진다.
  • 상대방의 문화재를 멋대로 파괴하는 것은 상대방도 내 영토에서 문화재를 파괴해도 좋다고 빌미를 주는 것이다.
  •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아돌프 히틀러가 파리를 파괴하라고 지시했으나, 디트리히 폰 콜티츠가 이를 거부한 사례가 유명하다.
    서프라이즈', "파리 폭파" 히틀러에 항명한 콜티츠
  • ISIL이 민간인 학살 다음으로 많은 비난을 받는 이유는 바로 이 반달리즘 때문이다.

21세기 반달리즘의 변화

  • 21세기부터 여러 국가들의 평균 교육 수준이 상승하여 문화재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풍조가 정착되었다.
  • 그러나 반달리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이제는 특정한 목적을 겨냥하여 고의적인 반달리즘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 여전히 무지와 이기심으로 인한 반달리즘의 사례가 존재하며, 숭례문 방화 사건이 그 예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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