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1. 전투 개요
-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중요한 전투로, 1944년 12월 16일부터 1945년 1월 25일까지 서부전선에서 발생한 전투이다.
- 독일 국방군의 최후의 대공세로, 겨울철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로 알려져 있다.
- 이 전투는 아르덴 공세(Ardennes Offensive),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 또는 바스토뉴 공방전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 벌지(Bulge)라는 용어는 '돌출부'를 의미하며, 전략지도를 통해 독일군 전선이 서쪽으로 크게 돌출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벌지 전투의 명칭과 의미
벌지 전투는 여러 명칭으로 불리며, 이는 전투의 지리적 및 전략적 중요성을 반영한다.- 아르덴 공세는 독일군의 공격을 의미하며, 벌지 전투는 미국에서 주로 사용되는 명칭이다.
- 바스토뉴 공방전은 특정 지역에서의 방어전을 강조하는 명칭으로, 전투의 다양한 측면을 나타낸다.
벌지대전투 지옥의 사수작전
독일군의 전략과 목표
- 독일군은 연합군의 제공권이 없을 경우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 기상 상황을 이용하여 연합군 공군이 뜰 수 없는 조건에서 전투를 감행한 회심의 반격이었다.
- 이 전투는 독일군의 전략적 선택과 결단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전투의 결과가 매우 중요하다.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 - 벌지전투
전투 결과와 영향
- 벌지 전투의 결과, 독일군은 연합군에게 피해를 주며 연합군의 진격을 6주 늦추었다.
- 그러나 이 전투는 동부전선의 병력을 대거 빼간 만큼 제3제국의 패망을 6개월 앞당겼다.
- 전투의 결과로 인해 베를린에 서방 연합군 대신 소련군이 진입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 이러한 결과는 전략적 판단의 실패를 나타내며, 전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제1차 세계 대전과의 유사성
- 벌지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춘계 공세(루덴도르프 대공세)의 재현으로 볼 수 있다.
서부전선: 루덴도르프 공세] 독일제국의 마지막 도박 - 처음 작전안이 제기된 후 장성급 지휘관들의 반대에 부딪히는 과정이 유사하다.
- 이러한 유사성은 역사적 맥락에서 전투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킨다.
임팔 작전과의 비교
- 벌지 전투는 임팔 작전과 유사한 점이 있으며, 두 전투 모두 국가의 패배를 앞당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 그러나 두 전투의 전개 과정과 결과는 다르다.
- 임팔 작전은 일본군이 상당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사례로, 독일군의 상황과는 차이가 있다.
- 독일군은 프랑스 침공 당시의 지휘관들이 물러나거나 자살한 상황에서 전투를 치렀다.
전투 전개 과정의 차이점
- 벌지 전투와 임팔 작전의 승패 결과는 유사하지만, 전개 과정에서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 임팔 작전은 일본군이 지원을 받았던 반면, 독일군은 동부전선의 지휘관들이 서부전선으로 전속되었으나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 이러한 차이는 전투의 성격과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휘관의 전선 이동과 한계
- **OKH(육군최고사령부)**는 동부전선의 지휘관들을 서부전선으로 전속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육군최고사령부 - 그러나 유능한 지휘관이라 하더라도 기갑, 항공 부대의 연료와 병력 부족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 이러한 상황은 전투의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전략적 한계를 드러낸다.
전투 경험의 손실
- 독일군은 정예 병력과 기계화 전력을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이후의 전투에서 상실하였다.
- 풍부한 전투 경험이 있었던 병력의 손실은 전투의 결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이러한 손실은 독일군의 전략적 선택과 결단력에 큰 제약을 주었다.
2. 배경
서부전선의 교착 상태
- 연합군의 상황: 연합군은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발목이 잡혀 진흙탕 싸움에 말려들었다.
- 마켓 가든 작전 실패: 마켓 가든 작전에서 독일군의 방어선을 밀어내지 못해 점령한 항구들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 보급 문제: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격을 멈춘 결과, 서부전선은 교착 상태에 돌입하였다.
- 소련군의 진군 중단: 소련군도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보급 문제와 후방 정리 등의 이유로 진군을 멈춘 상태였다.
독일군의 방어와 반격 계획
- 독일군의 전략: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군 병력을 집중시켜 아르덴 지방의 숲을 돌파하고 벨기에 지역의 연합군을 포위 섬멸하는 반격 작전을 구상하였다.
- 목표: 서방 연합군이 보급 기지로 삼고 있는 벨기에의 안트베르펀을 점령하여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 전략적 중요성: 이 작전은 독일군의 방어를 강화하고 연합군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항구와 보급 문제
- 항구 파괴: 독일군은 프랑스 북부에서 네덜란드에 이르는 항구와 필수 시설을 파괴하거나 사수하여 연합군의 항구 이용을 거부하고 있었다.
- 항구 재가동: 독일군이 붙들고 있던 항구들은 독일군이 항복한 후에야 다시 가동될 수 있었다.
- 마켓 가든 작전의 목적: 연합군은 네덜란드 강습을 통해 베네룩스 3국 연안의 항구 도시들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 안트베르펀의 중요성: 연합군이 확보한 안트베르펀은 사실상 유일한 최전방 보급 창구로, 이를 잃으면 보급선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연합군의 보급선 확보
- 보급선의 위기: 안트베르펀을 잃으면 노르망디에서 보급품을 끌고 와야 하며, 이는 아프리카 군단과 비슷한 보급 거리를 초래할 것이다.
- 전략적 계획: 서방 연합군이 독일과 평화 협상을 맺으면 독일군이 남은 병력을 소련군과 싸우기 위해 이동할 계획이었다.
- 보급선의 중요성: 보급선의 확보는 연합군의 전투 지속 가능성에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히틀러의 전략적 오판
- 연합군의 특성: 히틀러는 연합군이 각국 수뇌부의 협의를 거쳐야 부대를 배치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 기습 공격의 망상: 히틀러는 "기습 공격으로 우위를 장악한 뒤 영미 연합군의 대처가 이루어지지 않는 동안에 전부 섬멸해 버리면 된다"라는 망상을 가지고 있었다.
- 전략적 오판의 결과: 이러한 판단은 독일군의 전략적 실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연합군의 효과적인 지휘 체계
- 연합참모본부 구성: 서방 연합국은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연합참모본부(Combined Chiefs of Staff, CCS)를 구성하여 효과적인 의사결정을 하고 있었다.
The Combined Chiefs of Staff - 아이젠하워의 역할: 유럽 대륙에 전개된 연합군은 아이젠하워를 사령관으로 하는 연합국 원정군 최고 사령부의 단일 지휘권 아래에 있었다.
- 권한 부여: 연합국의 수반과 각국 군 수뇌부는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현장에서의 권한을 크게 부여하였다.
- 신속한 대응: 덕분에 아르덴 대공세에서 아이젠하워는 독일군에게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독일군의 자원 부족 문제
- 연료 부족: 독일군의 가장 큰 문제는 기갑부대를 움직일 연료의 부족이었다.
- 병력 동원 문제: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동원 가능한 남성의 숫자가 바닥이 나서 동부전선의 병력을 빼다가 돌려막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 전황의 비관적 전망: 서부전선 총사령관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와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는 전황이 낙관적이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룬트슈테트의 반대 의견
- 작전 목표의 비현실성: 룬트슈테트는 안트베르펀은 목표로 하기엔 너무 멀다고 주장하였다.
- 작전 회의의 비효율성: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에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고, 참모장인 지크프리트 베스트팔 장군이 대리 참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 휴전 요구: 룬트슈테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줄기차게 휴전을 요구해왔으나, 히틀러는 이를 무시하였다.
연합군의 공세 불가능성
- 병력 손실: 연합군은 독일군의 병력 손실이 심하여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 부대 분산: 대부분의 부대가 퍼져 있었고, 베테랑들은 후방으로 이동하여 재정비를 받고 있었다.
- 정보 체계의 문제: 독일군의 보안 체계 강화로 인해 연합군은 독일군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독일군의 정보 보안 강화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 사건으로 독일군의 보안 체계가 강화되었고, 대부분의 명령이 유선을 통해 전달되었다.
- 악화된 날씨: 12월 들어서는 날씨가 악화되어 항공 작전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 기밀 유지의 성공: 발터 모델은 르제프 퇴각 작전에서 기밀 유지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브래들리의 전투 예측
- 브래들리의 생각: 오마 브래들리는 독일군이 서부방 벽의 요새선에서 한꺼번에 튀어나오는 것이 낫겠다고 지속적으로 피력하였다.
- 독일군의 규모: 실제로 튀어나온 독일군의 규모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
- 정보 참모의 해임: 아르덴 지역에서 공세를 예측하지 못한 정보 참모 에드윈 L. 시버트 준장은 해임되었다.
3. 작전 준비
작전 준비와 히틀러의 결정
- 벌지전투 당시: 독일 측 사령관 발터 모델은 이길 가능성이 적은 도박으로 판단하였다.
- 장성들의 반대: 여러 장성들이 가을 안개 작전에 부정적이었으나, 히틀러는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세부적인 작전 계획을 세우라고 명령하였다.
- 히틀러의 개입: 히틀러는 작전 계획의 모든 세부 사항, 심지어 폭격 시간까지도 직접 결정하였다.
- 결과: 이러한 결정은 작전의 성공 가능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모델과 만토이펠의 갈등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원로 장성들조차 히틀러의 눈치를 보며, 발터 모델과 핫소 폰 만토이펠은 '작은 해결책'을 마련하려 애썼다.
- 갈등의 배경: 만토이펠은 1941년 모스크바 전투 당시 모델의 명령을 거부한 경험이 있었고, 이로 인해 군법 재판에 회부될 예정이었다.
- 재회: 모델과 만토이펠은 오랜 갈등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나게 되었고, 서로의 갈등을 해명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다.
- 임무의 중요성: 모델은 두 사람의 과거 불화를 언급하며, 현재의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모델과 만토이펠의 재회
- 긴장감: 만토이펠이 모델에게 보고하러 갔을 때, 모델의 집무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 과거의 불화: 모델은 만토이펠과의 과거 불화를 언급하며, 이제는 그 이야기가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 임무의 필요성: 두 사람은 현재 주어진 임무를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 상황의 중대성: 이 재회는 작전 준비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작전명 변경과 준비 과정
- 작전명 변경: 기존의 작전명인 '라인 강의 수비'는 '가을 안개'로 변경되었다.
- 목표 설정: 만토이펠은 모델과 함께 뫼즈 강 도달을 목표로 하는 '작은 해결책'을 준비하였다.
- 전략적 조정: 작전명 변경은 작전의 방향성을 새롭게 설정하는 중요한 결정이었다.
- 협력의 중요성: 모델과 만토이펠의 협력은 작전 준비에 있어 필수적이었다.
독일군의 병력 동원
- 병력 도착: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병력들이 속속 도착하였다.
- 항공기 동원: 반격 작전을 위해 아껴두었던 항공기들을 모두 동원하였다.
- 자원 확보: 마지막 남은 연료와 탄약까지 모아 작전 준비가 진행되었다.
- 전력 강화: 이러한 준비는 독일군의 전력을 크게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기갑사단의 전력과 배치
- 기갑사단 동원: SS 소속 5개 기갑사단과 국방군 소속 5개 기갑사단을 합쳐 총 10개 기갑사단이 동원되었다.
- 전차 수: 이들 사단이 보유한 전차와 돌격포, 구축전차의 수는 1,000대 이상에 달하였다.
- 각 사단의 전력:
- 기갑교도사단: 4호 27대, 판터 30대, 구축전차 20대
- 제2기갑사단: 4호 28대, 판터 64대, 돌격포 35대
- 제9기갑사단: 4호 28대, 판터 60대, 돌격포 24대
- 제11기갑사단: 4호 61대, 판터 47대, 돌격포/구축전차 19대
- 제116기갑사단: 4호 26대, 판터 64대, 구축전차 25대
- 전력의 중요성: 이러한 기갑사단의 전력은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작전 준비의 어려움
- 병력과 장비 부족: 병력과 장비는 한참 모자랐고, 2~3선급 국민척탄병 부대들이 정예병들의 빈 자리를 채워야 했다.
- 공수부대 문제: 루프트바페 공수부대의 집결에도 문제가 많았고, 보병처럼 흩어져 있었다.
- 물자 부족: 공수부대를 태울 트럭에 기름이 없어 이동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 작전 준비의 복잡성: 이러한 문제들은 작전 준비의 복잡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작전 개시 전의 긴장감
- 작전 개시일: 작전 개시일에서 고작 2주 전인 12월 2일, 모델과 만토이펠은 안트베르펀 점령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
- 작전 목표 조정: 초기 작전 목표대로 공세를 시작하되, 진행 과정에서 목표를 전환할 수 있다는 점이 변경되었다.
- 공세의 시간 조정: 공격 시간은 오전 11시에서 새벽 5시 30분으로 앞당겨졌다.
- 작전의 중대성: 이러한 조정은 작전의 성공 여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작전의 최종 목표와 압박
- 작전 실패의 결과: 독일은 이 작전이 실패하면 더 이상의 작전이 불가능할 만큼 여력을 쥐어짜고 있었다.
- 공세 병력 집결: 초기 작전 지역의 미 육군을 압도하는 규모의 공세 병력을 집결시켰다.
- 작전의 긴급성: 작전의 성공 여부는 독일군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 전략적 압박: 이러한 상황은 독일군에게 큰 압박으로 작용하였다.
4.전투 진행
작전 초기와 독일군의 공세
- 전투 시작일: 12월 16일,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됨.
- 미군 8군단의 상황: 해당 지역을 담당하던 미군 8군단은 참패를 면치 못함.
- 핫소 폰 만토이펠의 전략:
- 기습 시점을 새벽 5시 30분으로 변경.
- 칠흑 같은 안개 속에서 적의 시야를 가려 효율적인 포격을 실시.
- 고사포 진지에서 탐조등을 비추어 보병의 돌격로를 이끌어냄.
- 일몰 후 전차를 투입하여 전과를 확대시키는 작전안을 편성함.
- 훈련 및 준비: 제5기갑군을 철저하게 훈련시키고, 만토이펠 자신이 군복을 갈아입고 전투 지역을 미리 답사하는 등 준비를 완벽하게 마침.
미군의 불리한 상황
- 미군의 배치: 4개 사단과 다수의 지원 부대가 주둔했으나, 8만 3천 명의 미군이 전부 일선에 있지 않음.
- 일선 부대의 우려: 담당 구역이 너무 넓어 미군 내부에서도 우려가 있었음.
- 항공 정찰의 무시: 포착한 이상 징후가 상급 사령부에서 무시됨.
- 병사들의 수준과 사기: 평균 이하의 수준과 사기를 가진 병사들이 배치됨.
연합군의 지휘 공백
- 지휘 공백 발생: 아르덴 대공세 직전 회의로 인해 18공수군단장과 101공수사단장이 미국 본토에 있었음.
- 대행 지휘: 82공수사단장 제임스 가빈 소장과 101 공수사단 부사단장 앤서니 맥콜리프가 각각 군단장과 사단장 임무를 대행하여 공백을 막음.
- 연합군의 대응: 허를 찔린 연합군은 충격과 공포에 빠져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함.
독일군의 교란 작전
- 교란 작전의 효과: 오토 스코르체니 대령이 영어를 잘하는 병사들을 선발하여 미군 군복을 입고 허위정보를 퍼뜨림.
- 검문 검색 강화: 미군이 독일군을 색출하기 위해 토박이 미국인만 알 수 있는 질문을 사용함.
- 예시: "미키 마우스의 여자친구 이름은?" 등.
- 혼란의 결과: 검문하는 병사들이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어, 정답을 말한 병사들이 스파이로 몰리거나 억류됨.
초기 독일군의 승리
- 주도권 확보: 독일군은 초반 며칠 동안 주도권을 잡고 아르덴 각 지역을 공격함.
- 발터 모델 원수의 역할: 직접 원수 지휘봉을 들고 교통 정리를 하여 독일 병사들에게 희망을 줌.
- 독일 국민의 사기 진작: 독일군의 전과가 홍보되며 국민의 사기가 진작되고 국방군에 대한 신뢰도가 상승함.
정체된 공세와 연합군의 반격
- 아이젠하워 원수의 재배치: 서부 유럽 전선 사령관인 아이젠하워 원수가 부대를 신속하게 재배치함.
- 82사단과 101사단의 급파: 각각 생비트와 바스토뉴로 급파되어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됨.
- 독일군의 진격 둔화: 연합군의 맹렬한 대응으로 독일군의 진격이 서서히 둔화됨.
바스토뉴 공방전
- 스타벨롯과 생비트 공격: 독일군은 스타벨롯과 생비트를 공격하였으나 미군의 반격으로 실패함.
- 바스토뉴 포위: 12월 21일, 독일군이 바스토뉴를 포위하였으나 미군의 저항이 계속됨.
신화가 된 일주일간의 포위' 바스토뉴 공방전 - 상황 보고: 101사단 참모 장교는 포위된 상황을 "도넛 구멍을 그려 보십시오. 그게 우리입니다."라고 보고함.
맥콜리프의 유명한 반응
- 항복 요구: 독일군이 미군에게 명예로운 항복을 제안함.
- 맥콜리프의 반응: "Nuts!"라는 유머러스한 답변을 하여 항복을 거부함.
- 답신의 의미: 독일군은 이 답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함.
연합군의 반격과 기상 변화
- 항공 작전 재개: 12월 23일, 날씨가 좋아지자 연합군의 항공 작전이 재개됨.
- 고립된 병력 보급: 고립된 연합군 병력에게 보급이 이루어짐.
- 연료 보급 문제: 독일군은 연료 부족으로 인해 공격이 한계에 다다름.
독일군의 공세 실패와 철수
- 1월 1일 공세: 독일군은 다시 한번 공세를 가하였으나 연합군의 압도적인 항공력에 밀림.
- 히틀러의 고집: 히틀러가 병력 철수를 수용하지 않음.
- 전투 종료: 1월 27일, 전투가 마무리됨.
5. 공세의 여파
독일군의 공세와 연합군의 대응
- 독일군의 공세: 예상치 못한 독일군의 공격으로 인해 연합군의 라인 강 진공 계획이 예정보다 6주 미뤄졌다.
- 독일군의 자원 소모: 독일군은 본토에 배치된 전략 예비 부대와 동부전선의 정예 부대, 그리고 확보했던 물자들을 모두 소모하여 병력이 약체화되었다.
- 연합군의 공격: 1945년 3월까지 연합군은 지연전으로 버티었으나, 3월 말에 미군이 레마겐의 철교를 확보하면서 독일군의 패주, 포위, 항복이 급증하였다.
- 루르 포위전: 결국 4월 중순에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전투를 종료하게 된다.
소련군의 동부전선 공격
- 처칠의 요청: 윈스턴 처칠은 소련군에게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소련의 붉은 군대는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를 1월 12일에 개시하였다.
- 전선의 불리함: 양 전선의 전황이 독일군에 극도로 불리해지면서,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빼온 기갑 부대를 다시 동부전선으로 되돌려보내야 했다.
- B집단군의 방어 전략: 마켓 가든 작전의 승리로 방어 전략을 구사했던 B집단군 사령부는 아르덴 대공세 후기에 완전히 수동적인 대처를 하게 되었다.
아르덴 대공세의 실패
- 몽고메리의 기자회견: 아르덴 대공세가 실패로 끝날 무렵, 영국의 몽고메리 원수가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과 영국군의 역할을 부각시켰다.
- 미군의 반발: 몽고메리의 발언은 아이젠하워를 비롯한 미군 측의 분노를 일으켰다.
- 영국군의 기여: 몽고메리는 독일군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여 뫼즈 강의 다리를 사수함으로써 독일군의 공세를 막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 전황 파악의 우위: 잘 짜여진 통신체계를 통해 전황 파악이 미군에 비해 빨랐던 것도 사실이다.
몽고메리의 오만과 갈등
- 독선적 태도: 몽고메리는 특유의 독선적이고 오만한 면 때문에 이탈리아 전선부터 미군 장성들과 마찰을 빚고 있었다.
- 전사자 수의 차이: 벌지 전투에서 미군 전사자는 2만 명에 근접했으나, 영국군 사망자는 200명에 불과하였다.
- 독일 진공 작전 지휘권: 몽고메리는 미군을 깔아뭉개고 자신의 전공만 내세우며 독일 진공 작전의 지휘권을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아이젠하워의 대응과 사과
- 장군 임명 고민: 아이젠하워는 영국의 해롤드 알렉산더 장군을 몽고메리의 자리에 임명하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 몽고메리의 평판 하락: 오마 브래들리마저도 참았던 분통을 터뜨리며 몽고메리의 평판은 더욱 떨어졌다.
- 참모진의 역할: 참모진은 미군 장성들을 설득하는 한편 몽고메리에게 현재 상황을 알려주었다.
- 사과문 제출: 결국 몽고메리는 아이젠하워에게 사과문을 올려 사태가 진정되었다.
영국 의회의 중재 노력
- 처칠의 개입: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미군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섰다.
- 의회 연설 내용: 1945년 1월 중순 영국 의회의 연설에서, 벌지 전투에서 활약한 미군을 찬양하고 영국군의 전과 확대 해석을 경계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 전투의 중요성 강조: 처칠은 미군의 기여를 강조하며 영국군의 역할을 축소하는 발언을 하였다.
지크프리트 선의 돌파
- 아르덴 대공세 종료 후 상황: 아르덴 대공세가 종료된 후 약 2달 후, 3월 23일에 조지 S. 패튼이 이끄는 미 제3군 병력이 지크프리트 선의 방어부대 간의 지경선을 뚫었다.
- 라인 강 건너기 허용: 이후 라인 강을 건너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 지크프리트 선의 완전 돌파: 이로 인해 실질적인 지크프리트 선까지 완전히 돌파당하게 되었다.
6. 공세 실패의 원인
공세 실패의 원인
- 푀글러는 이번 공격이 소련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동부 전선에서의 중압감을 덜기 위한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 알베르트 슈페어는 동부 전선의 상황을 고려할 때,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서쪽에서 밀려오는 적을 막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 1944년 10월 말의 대화에서, 히틀러는 민간인 관료조차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무모한 작전을 실시하였다.
- 이로 인해 브래들리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공세 실패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교통 문제: 비좁은 도로망
- 아르덴 지역은 산악 지대로 도로망이 빈약하여, 미군과 독일군 모두에게 큰 문제를 초래하였다.
- 미군 부대들은 후퇴 과정에서 서로 엉켜 많은 혼란이 발생하였고, 일부 부대는 도로상에 장비를 유기하는 사례가 있었다.
- 독일군은 버려진 장비를 유용하게 사용하여 공세 시간을 벌었으며, 이는 미군이 고전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다.
- 강의 유속이 빠르고 강행 도하를 할 만한 곳이 거의 없어, 다리가 파괴되면 진격이 어려운 상황이 자주 발생하였다.
교통 문제: 진흙탕 도로
- 도로에 진흙으로 된 늪이 생기면서 자주포와 기갑척탄병의 제병 합동 공격에 큰 문제가 발생하였다.
- 자주포가 늪에서 허우적대면서 기갑척탄병의 공격을 지원하지 못해, 기갑척탄병 부대가 대규모 피해를 입고 퇴각하는 사례가 여러 번 발생하였다.
- 어떤 경우에는 정찰부대가 진흙탕에 갇혀 길을 잃고 작전을 수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 이러한 상황은 공세 초반에 연합군이 사태를 빨리 수습하고 반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통 문제: 공병의 역할
- 연합군의 공병대는 이미 한 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리와 같은 모든 물체에 폭탄을 설치하고 독일 기갑 부대가 접근하면 폭파하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 요아힘 파이퍼는 미군 공병대의 작전 방식에 대해 "이런 죽일 놈들!"이라고 표현하며 찬사를 보냈다.
요아힘 파이퍼(Joachim Peiper) - 마켓 가든 작전 이후 공병의 중요성이 증가하였고, 벌지 전투에서 미 공병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다.
- 공병대는 교량 폭파 및 재설치 작업을 통해 독일군의 진공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보병과 기갑부대를 지원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병참 문제와 연료 수급
- 독일군의 연료 수급 상황은 매우 열악하여, 목적지인 안트베르펀에 도달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 아르덴 삼림 지역에서부터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최소 120km로, 연료를 노획하지 않으면 전진이 불가능하였다.
- 독일군은 새로 만들어진 기갑장비를 대거 투입하였으나, 티거 2와 같은 중장비는 연비가 최악이었다.
- 이로 인해 많은 전차가 연료 부족으로 전진도 후퇴도 못하고 자폭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제공권 장악의 실패
- 1940년 프랑스 침공 당시 독일군은 연합군보다 훨씬 많은 전투기를 공중전에 투입하여 제공권을 장악하였다.
- 그러나 아르덴 대공세 당시에는 독일군을 도울 공군이 활동할 날씨가 아니었고, 연합군이 하늘을 장악한 상태였다.
- 날씨가 좋아지자마자 독일군은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 알베르트 슈페어는 자서전에서 날씨가 갠 뒤 도로를 다니는 것이 자살 행위와 같다고 언급하였다.
연합군의 발빠른 대응
- 1940년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 당시 연합군은 독일군의 진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 아이젠하워 장군은 병력 운용에서 전권을 보장받았고, 연합군 지휘부는 독일군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자원을 쏟아 부었다.
- 미군의 조지 S. 패튼 중장은 독일군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대응 방안을 구상하였다.
- 이러한 발빠른 대응은 아르덴 대공세에서 연합군의 성공적인 방어에 기여하였다.
독일군의 훈련 및 경험 부재
- 독일군은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 훈련 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이후 훈련을 통해 질적 향상을 이루었다.
- 그러나 아르덴 대공세 당시에는 숙련된 장교와 부대가 대부분 소모되었고, 훈련이 부족한 병력으로 대체되었다.
- 급조된 부대는 훈련이 부족하여 전투 능력이 떨어졌고, 이는 공세의 실패로 이어졌다.
- 팔슈름예거 부대는 심각한 피해를 입고, 경험이 부족한 병력으로 구성되어 전투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부실한 기계화와 전투력
- 독일의 전투력은 1944년 서방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급격히 소모되었다.
- 기갑사단의 상황이 심각하여, 독일군은 기계화 부대의 보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 독일군의 기계화율은 미군에 비해 현저히 낮아,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 연합군은 충분한 차량과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독일군과의 기계화율 차이는 전투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https://www.youtube.com/watch?v=sZa8UdP11Gs
728x90
반응형
LIST
'군사무기 > 전쟁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트남 전쟁 강구전투 (1) | 2024.12.11 |
---|---|
포클랜드 전쟁 개요 (5) | 2024.12.05 |
게토,유대인 구역의 정의와 역사 (4) | 2024.12.02 |
제1차 세계 대전과 베르됭 전투 (4) | 2024.12.01 |
지상 최대 전차전: 쿠르스크 전투의 모든 것 (0) | 2024.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