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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과 한국군의 역할

  • 시기: 1966년 12월
  • 주둔지: 한국군 해병대 제 2 여단은 남베트남의 추라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 지리적 배경:
    • 1대대 전술 책임 지역의 동쪽에는 바탄 반도가 위치하고 있었다.
    • 이 지역에는 여러 개의 강이 흐르고 있으며, 이 강들은 남중국해와 만나는 지역으로 기대가 많이 형성되어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zoNLfhvEtk
  • 적의 활동:
    • 베트콩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보급품을 수송하며, 여러 곳에 위장 진지를 구축해 연합군을 상대로 활발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다.

 

 

미군의 수로 측량 작업 계획

  • 미군의 방문: 미 해병대와 미해군 UDT 소속의 장교들이 한국군 2여단 본부를 방문하였다.
  • 작전 계획:
    • 미군은 광하 1대 강에서 수로 측량 작업을 실시할 계획이었다.
    •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베트콩의 기습 공격이었다.
  • 한국군의 지원 요청:
    • 미군은 한국군 해병대가 B 지역을, 월남군 J 4단이 C 지역을 엄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강구 작전의 실행

  • 작전 명령: 여단장 김연상 준장은 작전 명령 제 67호를 하달하였다.
  • 작전 내용:
    • 작전 첫날에 2대대 한계 중대를 A 지역에 투입하고, 다음 날에는 1대대 두 개 중대를 B 지역에 투입하기로 하였다.
  • 참여 부대:
    • 작전 참여 부대는 1대대 1중대, 2중대, 3중대, 2대대 6중대였다.
    • 미군은 미해병 비행 사단이 공중 폭격을 실시하고, 미해군 제 7함대가 한포 사격을 해 주기로 하였다.

작전 중의 전투 상황

  • 작전 시작: 1967년 1월 31일 11시에 미해군이 한국군이 작전을 수행할 지역에 대해 20분간 한포 사격을 가하였다.
  • 적의 저항:
    • 중대가 수색을 하던 도중 120여 명의 주민들이 거주하는 마을을 발견하였고, 그곳에서 베트콩의 저항이 있었다.
    • 이 과정에서 네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 작전 결과: 미해군 UDT 의원들은 세 시간 동안 수로 측량 작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헬리콥터 구출 작전의 실패

  • 작전 중의 위기:
    • 1대대장 이건호 중령은 2중대를 조모 이강 북쪽에, 중대를 남쪽에 배치하였다.
    • 소대가 수색 중 적의 기습 공격을 받게 되어 7명이 전사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 부대의 대응:
    • 위생 하사관 지덕칠 하사는 부상자 치료를 멈추지 않고 전사한 일분 대장을 대신해 분대원들을 지휘하였다.
    • 소대장 박종길 소위는 과감한 탈출을 시도하였다.
  • 헬리콥터의 도착: 1시간 40분 후 헬리콥터 여섯 대가 도착하였으나, 착륙 지점에 대한 오해로 인해 구출 작전이 실패하였다.

부상자와 전사자의 상황

  • 부대의 고립: 소대는 적의 포위망에서 벗어나 인근 고구마 밭으로 이동하였다.
  • 지원 요청: 소대장은 보병의 지원 사격과 부상자 후송을 위한 헬리콥터를 요구하였으나, 지원이 불가능하였다.
  • 부대의 피해: 소대는 적의 집중 공격을 받으며 추가적인 피해를 입었다.
  • 지덕칠 하사의 전사: 지덕칠 하사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적의 공격을 저지하며 전사하였다.

전투 후 시신 회수 작전

  • 작전 개시: 2월 2일, 전우들의 시신을 회수하기 위한 수색 작전이 시작되었다.
  • 부대 배치:
    • 2중대는 42 고지에 배치되어 차단 진지를 구축하였다.
    • 1대대와 3대대는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이동하며 정밀 수색을 실시하였다.
  • 시신 회수: 총 15구의 시신을 회수하였으나, 장비는 이미 적에게 탈취당한 상태였다.
  • 추가 작전: 2월 3일, 중대를 재배치하여 추가적인 정밀 수색을 실시하였다.

강구 전투의 전과와 교훈

  • 전투 결과: 적사살 53명, 포로 2명, 노획한 장비는 수류탄 3발, 실탄 420발이었다.
  • 아군 피해: 전사 20명, 부상 14명, 소총 15정, 기관총 3정, 각종 무전기와 유탄 발사기 손실.
  • 피해 원인:
    1. 정보 수집 부족: 작전 지역에 대한 정밀한 정보 수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2. 예비대 운용 실패: 헬기 출발이 지연되었고, 착륙 지점의 오해로 인해 피해가 발생하였다.
    3. 화력 지원 계획 부족: 적절한 화력 지원 계획이 수립되지 않아 큰 피해를 입었다.
  • 군사적 조치: 이후 위험 지역에 소대를 독립적으로 투입하지 않도록 조치하였다.

지덕칠 중사의 동상 제막식

  • 제막식 일자: 1967년 8월 2일.
  • 참석 인사: 박정희 대통령, 김성 국방부장관, 김관 해군총장, 지덕 중사의 어머니 박여사 등이 참석하였다.
  • 동상 의미: 지덕칠 중사의 전공을 기리기 위한 동상 제막식으로, 그의 희생과 용기를 기념하는 자리였다.
  • 훈장 수여: 박 대통령은 지덕칠 중사에게 태극 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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