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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3 오전 00:12
전투 개요
- 전투 기간: 1942년 7월 21일부터 11월 16일까지.
- 참여 군대: 일본군, 미군, 호주군이 뉴기니 섬에서 전투를 벌였다.
- 전투의 성격: 이 전투는 과달카날 전투에 가려진 태평양 전쟁 초반부의 대표적인 졸전으로 평가된다.
- 역사적 맥락: 임팔 전투의 선배로서, 이 전투는 일본군의 전략적 실패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전투의 중요성
- 전투의 평가: 과달카날 전투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중요한 전투로 간주된다.
- 전략적 의미: 일본군의 전투력과 전략적 판단의 한계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 전쟁의 흐름: 이 전투는 태평양 전쟁의 초기 단계에서 일본군의 전투 방식과 연합군의 저항을 보여준다.
- 후속 전투에 미친 영향: 이 전투의 결과는 이후 전투의 전략과 전술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남방작전
- 작전 목표: 일본은 남서태평양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고 미국과 호주의 연결선을 차단하기 위해 포트모르즈비를 공략하고자 했다.
- 전략적 위치: 포트모르즈비는 뉴기니 섬 남단의 최대 항구로, 전략적 중요성이 크다.
- 작전의 배경: 일본은 남방작전을 통해 동남아시아를 손쉽게 석권한 경험이 있다.
- 전투의 전개: 일본군은 포트모르즈비를 점령하기 위한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해군의 공략 실패
- 공략 시도: 일본 해군은 포트모르즈비를 공략하기 위한 시도를 했으나, 산호해 해전에 의해 좌절되었다.
- 전략 변경: 해군의 공략 실패 이후, 일본 해군은 미 해군 항모세력 격멸로 목표를 변경하였다.
- 해군의 역할: 해군의 실패는 육군의 작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 전투의 전환점: 이 사건은 일본군의 전략적 전환점을 나타낸다.
일본 육군의 계획
- 육군의 개입: 해군의 실패 이후 일본 육군이 전투에 나섰다.
- 진격 경로: 일본 육군은 부나(Buna)에서 육로로 진격하여 연합군을 격파할 계획을 세웠다.
- 연합군의 상태: 연합군은 전투력과 규모가 부족한 상태였다.
- 전투 목표: 일본 육군은 포트모르즈비 점령을 목표로 하였다.
연합군의 방어 전략
- 방어의 필요성: 연합군은 포트모르즈비를 사수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 전략적 방어: 포트모르즈비를 잃게 되면 호주 동해안이 일본의 공격에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 해상교통 차단: 포트모르즈비의 상실은 미국과 호주 간의 해상교통을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 역습 기회 상실: 포트모르즈비를 잃으면 라바울 등 다른 거점에 대한 역습 기회를 잃게 된다.
포트모르즈비의 전략적 중요성
- 전투의 결과: 포트모르즈비의 상실은 뉴기니 섬에서의 축출을 의미한다.
- 최전선 반격 교두보: 이는 일본의 침략에 맞선 최전선 반격 교두보의 상실을 나타낸다.
- 전략적 위치: 포트모르즈비는 일본군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중요한 거점이었다.
- 전투의 의미: 이 전투는 일본군의 침략에 대한 연합군의 저항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연합군의 전투 준비 부족
- 연합군의 판단: 태평양의 연합군들은 일본군의 판단이 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일본군은 연합군을 오합지졸로 평가하였다.
- 영국군 및 영연방군의 상황:
- 숫자로는 일본군을 압도했으나, 실질적인 전투력은 부족하였다.
- 호주는 1941년 초부터 북아프리카 전역에 참여하고 있었고, 주력부대는 북아프리카에 집중되어 있었다.
- 미군의 병력 부족:
- 필리핀을 상실한 이후, 미군은 전투병력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 진주만 공습 직후 징병제를 실시하였으나, 전투에 투입할 병력은 부족하였다.
- 호주 내 미군 부대:
- 호주에는 미국에서 온 2개 육군 사단이 있었으나, 이들은 정글전 훈련 중이었다.
- 이들은 호주 본토 방위를 담당하고 있었던 부대였다.
호주의 전선 상황
- 영국군 및 영연방군의 숫적 우위:
- 영국군과 영연방군은 일본군에 비해 숫적으로 우세하였으나, 전투 준비가 미흡하였다.
- 호주의 전선 참여:
- 호주는 북아프리카 전역에 주력부대를 보내고 있었고, 이로 인해 태평양 전선에서의 전투력이 약화되었다.
- 전투 수행의 실질적 주체:
- 호주 민병대가 태평양 전선에서의 전투를 수행하게 되었다.
- 전선의 복잡성:
- 여러 전선에서의 전투 참여로 인해 연합군의 전략적 대응이 어려워졌다.
미군의 병력 상황
- 필리핀 상실의 영향:
- 필리핀에서의 패배는 미군의 전투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 징병제 실시:
- 진주만 공습 직후 징병제를 실시하였으나, 병력 확충이 지연되었다.
- 과달카날 전역으로의 병력 이동:
- 남아있는 병력은 과달카날 전역으로 이동되었으며, 이로 인해 다른 전선에서의 전투력이 더욱 약화되었다.
- 해군의 상황:
- 해군 역시 병력 부족으로 인해 전투에 참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맥아더의 지휘 문제
- 사령관의 문제점:
- 호주의 연합군 병력은 맥아더가 지휘하고 있었으나, 그의 상황 파악이 미흡하였다.
- 전투 무시:
- 맥아더는 전투를 무시하고, 지형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였다.
- 현지 시찰 부족:
- 주둔지와 전장의 거리가 멀어 현지 시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 명령의 비효율성:
- 초기 병력 배치 시 "해당 지역으로 가면 작은 구렁텅이가 있으니까, 그곳에서 방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나, 실제로는 7마일(11.27km) 이상의 계곡이었다.
일본군의 과달카날 전투
- 일본군의 상황:
- 일본군도 과달카날 전역에 묶여 있었고, 포트모르즈비 공략에 필요한 여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 해상작전 및 항공지원 부족:
- 공격에 필요한 해상작전이나 항공지원이 거의 없었다.
- 병력의 한계:
- 일본군은 13,500명의 병력으로 공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 지리적 정보 부족:
- 일본군은 뉴기니 섬에 대한 지리 및 지형 정보가 전무하였다.
일본군의 지리적 한계
- 지형적 오판:
- 일본군은 포트모르즈비까지의 거리가 160km도 채 안 되므로 별 문제 없다고 판단하였다.
- 부나에서 포트 모르즈비까지의 거리:
- 부나에서 포트 모르즈비까지의 거리는 90여 km에 불과하였으나, 지형적 어려움이 존재하였다.
- 고산지형의 도전:
- 일본군은 해발 2,000~3,000m에 달하는 오웬 스탠리 산맥을 관통해야 했다.
- 내륙 개발 부족:
- 뉴기니의 내륙은 미개발 상태였고, 도로가 부족하였다.
오웬 스탠리 산맥의 도전
- 산맥 통과의 어려움:
- 일본군은 해발 3,000m의 산맥을 통과하려고 하였으나, 당시에는 길이 제대로 나 있지 않았다.
- 작전 출발점과 목표:
- 일본군의 근거지는 부나 고나였고, 목표는 포트 모르즈비였다.
- 자살행위와 같은 작전:
- 산맥과 정글, 늪지대가 깔린 곳을 도보로 행군하라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았다.
- 현지 사령관의 보고:
- 55사단장 호리이 토미타로는 보급 부족으로 정글을 지나가는 것이 무리라고 보고하였으나, 대본영의 답변은 보급 문제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륙의 어려움과 자원 부족
- 내륙의 험준함:
- 내륙 고산 지대는 왕래가 힘들어 마을마다 언어가 다를 정도로 험준하였다.
- 식량 부족 문제:
- 식용 가능한 동식물이 부족하여 미리 양식을 마련하지 않으면 현지인도 굶어죽을 수 있었다.
- 해안가와 내륙의 분리:
- 원주민은 해안가 마을과 내륙 간의 교류가 없었고, 해안을 항해하는 것이 더 편리하였다.
- 도로 건설 포기:
- 금광 발견 시에도 도로 건설을 포기하고 항공수송을 선택하였다.
생애 초기와 가족 배경
- 출생 정보: 그녀는 태어날 당시 아버지가 17세, 어머니가 19세였다.
- 어머니의 직업: 어머니는 슬럼가 거리의 창녀였으며, 어린 나이에 창부의 삶을 살았다.
- 가족의 무책임: 그녀는 무책임한 아버지에게 버림받았고, 어머니는 그녀를 키울 능력이 없어 사촌의 집에 맡겨졌다.
- 학대 경험: 사촌의 집에서 학대받으며 성장하였고, 1929년 클럽에서 인정받는 가수가 되기 전까지 2번의 성폭행과 2번의 감옥 생활을 겪었다.
어린 시절의 고난과 학대
- 첫 성폭행 사건: 그녀가 처음 성폭행을 당했을 때, 상대는 40대의 백인이었고, 그녀는 10살이었다.
- 경찰의 반응: 경찰은 백인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흑인인 그녀를 불량소녀로 몰아 감호소에 집어넣었다.
- 감호소에서의 경험: 감호소에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풀려난 후, 그녀는 다른 흑인 남자에게 또 다시 성폭행을 당했다.
- 할렘으로의 이동: 결국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뉴욕의 할렘으로 갔지만, 할렘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창부의 일뿐이었다.
할렘에서의 삶과 경력 시작
- 창부 생활: 15살까지 할렘가에서 창부로 일하던 그녀는 성행위를 강요하던 흑인의 말을 듣지 않다가 매춘 행위로 고발되어 다시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 감옥에서의 변화: 감옥에서 나온 이후, 그녀는 창부의 생활을 접고 백인의 집에서 하녀 생활을 하게 된다.
- 대공황의 영향: 미국의 대공황 속에서 다시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 댄서 오디션: 거리의 파즈 앤 제리즈라는 나이트클럽의 댄서 오디션을 보러 갔으나, 춤을 한 번도 춰본 적이 없는 그녀는 오디션에 붙지 못했다.
음악 경력의 시작과 성공
- 노래의 시작: 클럽의 피아노 연주자가 그녀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고, 그녀는 노래를 시작했다.
- 관객의 반응: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홀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라고 회상하였다.
- 예명 '빌리 홀리데이': 그녀는 좋아하던 배우 빌리 더브의 이름과 아버지 클래런스 홀리데이의 성을 따서 '빌리 홀리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 아버지와의 관계: 아버지 클래런스 홀리데이는 처음에는 그녀를 딸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그녀가 명성을 얻고 돈을 벌기 시작하자 아버지임을 자처하며 돈을 뜯어가기 시작했다.
상징적인 곡과 사회적 메시지
- 음악적 인정: 그녀는 뉴욕의 클럽에서 노래를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1933년 베니 굿먼과의 만남으로 18세에 음반을 내고 본격적으로 재즈 가수로서의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 우울한 감성: 팬들이 그녀의 음색에서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은 말기 감성을 쥐어짜는 우울한 감성이다.
- 기이한 열매: 1939년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부른 기이한 열매는 흑인들이 백인에게 폭력을 당한 후 나무에 목이 매달린 풍경을 묘사한 곡이다.
- 소설과 베스트셀러: 이 곡은 여성 작가 릴리언 스미스에 의해 소설로 발표되어 1944년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결혼 생활과 개인적 고난
- 첫 번째 결혼: 1941년 첫 번째 남편 제임스 먼로와 결혼했으나, 그는 심한 마약 중독자였다.
- 두 번째 결혼: 두 번째 남편 조 가이는 그녀의 돈만 갈취하는 쓰레기 같은 존재였다.
- 세 번째 남편: 세 번째 남편 역시 마약과 무기혐의로 여러 번 옥살이를 거듭한 범죄자로, 그녀를 괴롭혔다.
- 양성애자: 그녀는 양성애자였으며, 베니 굿먼, 오슨 웰스 등과의 연애도 있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마약 중독과 삶의 말년
- 중독의 시작: 그녀는 마약 중독자의 굴레에 빠져들게 되었고, 극심한 알코올과 마약 중독으로 가난에 시달렸다.
- 마일스 데이비스의 도움: 마일스 데이비스는 그녀에게 마약 중독 치료를 권할 정도로 그녀의 상태를 걱정하였다.
- 삶의 마지막: 1959년 5월, 그녀는 맨해튼에 위치한 자신의 아파트에서 쓰러진 후 10주간 입원하다가 44세의 나이에 삶을 마감하였다.
- 병원에서의 모습: 그녀는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였고, 진료 기록에는 ‘병명: 마약 중독 말기, 치료 방법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산과 음악적 영향
- 음악적 영향: 그녀는 카운트 베이시 악단에서 만난 레스터 영과 상성이 잘 맞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 서로의 존중: 홀리데이는 레스터 영을 "프레지던트 레스터"의 약자인 "Pres"라 부르고, 레스터 영은 그녀를 "Lady day"라 부르며 서로를 존중하였다.
- 가창력 비교: 그녀의 가창력과 정교함은 엘라 피츠제럴드와 비교할 수 없으며, 새러 본의 아름답고도 풍부한 음색과도 비교할 수 없다.
- 블루스에 어울리는 목소리: 그녀의 노래는 가창력과 음색을 떠나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으며, 혹자는 그녀의 목소리가 블루스에 가장 어울린다고 평하였다.
코코다 트랙 전투 개요
- 일본군의 피해: 일본군은 투입 병력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 연합군의 피해: 반대로 연합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전투 결과가 나왔다.
- 자연의 승리: 이 전투는 연합군의 승리가 아닌 대자연의 승리로 해석될 수 있다.
- 임팔 작전과의 유사성: 이 전투는 기본적인 지형 정보도 없이, 보급을 무시한 참사로, 여러모로 임팔 작전의 마이너 버전으로 볼 수 있다.
자연의 승리와 임팔 작전
- 자연의 영향: 연합군의 승리를 대자연의 승리로 간주하는 것이 정확하다.
- 전투의 맥락: 이 전투는 자연 환경이 전투 결과에 미친 영향을 강조한다.
- 임팔 작전의 교훈: 임팔 작전과 유사한 점이 많아, 전투 준비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연합군의 후속 작전
- 전투의 전개: 몇 개월 후, 미군과 호주군 연합군이 남쪽 해안의 포트 모르즈비에서 북쪽 해안의 주요 항구인 '부나'와 '고나'까지 추격하였다.
- 방어 성공: 포트 모르즈비의 방어에 성공한 연합군은 일본군을 섬멸하려는 후속 단계에 들어갔다.
- 전투의 목표: 이 전투는 일본군의 완전한 섬멸을 목표로 하였다.
부나-고나 전투의 전개
- 일본군의 방어: 일본군은 후위부대로 떼어놓은 병력이 진지까지 가설한 후, 강력한 방어를 하였다.
- 철수 완료: 간신히 철수를 완료한 일본군은 처음 7월에 상륙할 때부터 만들어진 진지들에 배치되어 방어를 하였다.
- 연합군의 병력: 연합군은 일본군보다 병력상으로 훨씬 우세하였으나, 여러 요소로 인해 고전을 겪었다.
연합군의 피해와 대참패
- 사망자와 부상자: 총 병력 20,000명 중 2,000명에 달하는 사망자와 12,300명이 넘는 부상자와 병사자가 발생하였다.
- 전투의 결과: 연합군은 일본군에 비해 큰 피해를 입었다.
- 전투의 심각성: 이러한 대참패는 전투의 심각성을 강조한다.
전투 결과의 은폐
- 대참패의 은폐: 연합군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본영은 이러한 대패를 함구하였다.
- 과달카날 전투와의 관계: 뉴기니 섬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과달카날 전투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대참패는 더욱 묻혔다.
부나-고나 전투의 명칭
- 전투의 명칭: 코코다 산길에서 부나-고나에 이르기까지의 전투를 '부나-고나 전투'라고 부른다.
- 정보 부족: 본 위키에는 현재 이 전투에 대한 항목이 작성되어 있지 않다.
- 추가 정보: 이 전투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제공된 블로그 링크를 참조할 수 있다.
현대의 트래킹과 안전 문제
- 트래킹의 인기: 현대에는 해당 루트를 여행하는 트래킹이 존재한다.
- 경쟁 행사: 비정기적으로 해당 루트를 주파하는 레이스 행사인 'Kokoda Challenge Race'도 있다.
- 안전 문제: 현대에는 안전한 지역을 따라 길을 다듬고 휴식처도 마련되어 있지만, 가끔씩 조난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2006년에 나온 동명의 호주 영화 KOKODA가 있다.
코코다 전투 및 뉴기니 전선을 가룬 책으로 권주혁씨의 '나잡비행장'이 있다.
백승만 경상국립대학교 약학대학 교수의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에서도 말라리아로 인간이 고생한 사례로서 언급된다.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에서도 등장. 맥아더의 추한 모습과 안잭군의 고생을 조명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q4VEL9zHOA&t=12s
죽음의 산에서 식인을 택한 일본군🍟코코다트랙 전투 마지막 결투🍟지도로 보는 태평양전쟁 시리즈 ep 15. 코코다트랙 전투 3/3
https://www.youtube.com/watch?v=OBGfPkEtv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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