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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1 오후 10:46

제1차 세계 대전과 베르됭 전투 

  • 전투 기간: 1916년 2월 21일부터 12월까지.
  • 참여 세력: 독일 제국군과 프랑스 제3공화국의 프랑스군 간의 전투
    .

 

 

 

  • 유럽의 회색 지도 안에 독일 제국의 검은 평면 지도(1871–1918) 

독일제국 식민지
WW1 독일 제국군헬멧
독일 제국군

 

 

제1차 세계대전 컬러 기록사진

 

 

 

제1차세계대전 독일군 컬러 기록사진

 

 

 


독일 제국의 문제점 

 

지도자 빌헬름 2세


 

 

 

 


팁:

빌헬름 2세는 고종을 '왕' 아닌 '황제'로 칭했다
한일합방 부당' 98년 전 독일 정부문서 나왔다


 

  • 전투의 중요성:
    • 제1차 세계 대전의 가장 유명한 대전투 중 하나로, 소모전의 시초이자 참호전의 전형적인 양상을 나타냄.
    • 양측 모두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살육을 강요함.

참호전 : 땅 속의 일상

전투의 역사적 중요성

  • 전투의 위치: 베르됭 전투는 마른 전투와 솜 전투와 함께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투로 간주됨.
  • 전투의 특징:
    • 소모전의 성격을 띠며, 전투의 결과가 양측의 인명 피해에 큰 영향을 미침.
    • 전투의 결과는 전쟁의 전반적인 흐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침.

프랑스의 결의와 독일의 전략

  • 프랑스의 결의:
    • 프랑스 육군 중장 로베르 니벨의 유명한 구호인 "Verdun! on ne passe pas!"는 프랑스군의 결의를 상징함.

      "Verdun! On ne passe pas" - French WW1 Song
    • "Ils ne passeront pas."는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냄.

 

 

 

 

 

 

전선 재정비와 공세 전략

  • 전선 재정비:
    • 독일의 슐리펜 계획이 실패한 후, 에리히 폰 팔켄하인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됨.
    • 팔켄하인은 전선 재정비를 위해 공세를 지양하고 수세적으로 임함.
  • 전략적 판단:
    • 영국의 해상봉쇄로 인한 물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선의 요새화 필요성을 인식함.

 

소모전의 전술적 변화

  • 전투 방식의 변화:
    • 기존의 전투 방식은 승리한 쪽이 적의 거점을 공격하는 형태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참호와 기관총의 결합으로 인해 전투 양상이 변화함.
  • 전투의 결과:
    • 수십만의 인명 피해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계속 이어짐.
    • 참호전의 특성상, 전투의 결과는 단순한 영토 확보가 아닌 인명 피해에 중점을 두게 됨.

독일군의 새로운 목표 설정

  • 전략 수정:
    • 독일군은 전투를 통해 적군을 더 많이 죽이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삼음.
  • 전략적 요충지 점령:
    • 프랑스군의 영토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보다는, 전략적 요충지만 점령하고 방어하는 방식으로 전환함.

소모전의 효율성과 전략

  • 소모전의 장점:
    •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효과적인 교환비를 통해 아군은 덜 죽고, 적군은 많이 죽이는 전략이 안정적이고 효율적임.
  • 란체스터 법칙:
    • 전투의 규모가 질적인 우위를 무력화하는 데 유용하다는 점이 강조됨.

 

 

 

베르됭 요새의 선택

  • 작전 계획:
    • 독일 육군 참모본부는 프랑스군에게 최대한의 병력 손실을 강요할 장소로 베르됭을 선택함.

서부전선 이상없다!! 두오몽 요새

 

세계의 요새 III - 알카사르·두오몽


 

  • 피해 비율:
    • 작전은 적과 아군의 피해 비율이 5:2라는 극단적인 소모전으로 계획됨.

 


1915년 전역의 전략적 상황

  • 협상국의 전략: 1915년 전역에서 협상국은 서부전선에서의 공세와 동부전선에서의 수세 전략을 유지하였다.
  • 전황의 부진: 협상국의 전력과는 별개로 전황은 영 시원찮았다.
  • 서부전선의 상황: 프랑스가 중심이 되어 여러 차례 대규모 공세를 실시하였으나, 독일군의 방어에 막혀 모두 실패하였다.
  • 필리프 페탱의 진급: 대장으로 진급한 필리프 페탱은 유일하게 진격에 성공하였으나, 그 진격 거리는 3~4km에 불과하였다.

 

서부전선의 실패와 동부전선의 승리

  • 프랑스의 공세 실패: 1915년 서부전선에서 프랑스의 대규모 공세는 전략적 성과가 없었다.
  • 동부전선의 대승: 동부전선에서는 동맹군이 대규모 공세를 통해 러시아령 폴란드를 거의 쓸어버렸다.
  • 러시아군의 피해: 러시아군의 피해는 가공할 수준으로 치솟았다.
  • 전선의 변화: 동부전선에서의 승리는 협상국의 전략적 상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지중해 방면의 전황 변화

  • 불가리아 왕국의 가담: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 측에 가담하면서 세르비아 전역의 전황이 급격하게 변화하였다.
  • 세르비아 왕국의 상황: 몬테네그로 왕국은 항복하였고, 세르비아 왕국은 전 국토를 점령당하였다.
  • 영불 연합군의 개입: 영불 연합군은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그리스 북부 테살로니키에 상륙하였으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 갈리폴리 전투의 실패: 협상국의 회심의 수였던 갈리폴리 전투는 대실패로 끝나가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참전과 전선 변화

  • 이탈리아의 참전: 1915년에 이탈리아 왕국이 협상국으로 참전한 것이 유일한 긍정적 요소였다.
  • 캅카스 전선의 소식: 러시아군이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서아르메니아로 진격했다는 소식이 있었으나, 전체적인 전황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 연합국 간 회의: 1915년 말 연합국 간 회의를 통해 1916년에도 프랑스와 영국이 서부전선에서 대공세를 펼치기로 합의하였다.
  • 러시아의 방어 전념: 러시아는 방어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동맹국의 상황과 독일군의 전략

  • 동맹국의 어려움: 동맹국도 상황이 나쁘지 않았으며,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이탈리아의 중립 깨기: 이탈리아가 중립을 깨고 협상국 측으로 참전하면서 부담해야 할 전선이 늘어났다.
  • 동부전선의 승리: 동부전선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러시아의 평원은 너무 넓었다.
  • 독일군의 전략적 판단: 독일군 수뇌부는 동부전선에서의 결정적 승리를 허황된 것으로 치부하였다.

서부전선의 병력 밀도와 전략적 판단

  • 서부전선의 병력 밀도: 서부전선의 병력 밀도는 동부전선을 훨씬 상회하였다.
  • 프랑스의 병력 동원: 프랑스는 전국의 병력을 긁어모으고 식민지군까지 동원하여 전선에 투입하고 있었다.
  • 영국의 대륙원정군 증강: 영국의 대륙원정군도 시시각각 증강되고 있었다.
  • 동부전선의 기동전 제안: 동부전선에서 기동전으로 러시아군 주력을 포위섬멸하고 페트로그라드를 공략하자는 주장이 더 합리적이었다.

베르됭 전투의 준비와 실패

  • 독일군의 주목: 독일군 총참모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베르됭에 주목하게 되었다.
  • 베르됭의 역사적 중요성: 베르됭은 프랑스 육군 최고의 요새 지대로, 프랑스의 자존심이었다.
  • 프랑스군의 방어 준비 부족: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공격 시도를 포착할 기회를 놓쳤다.
  • 조프르의 집중: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는 새로운 공세 준비에 몰두하였고, 베르됭 지역을 무시하였다.
    조제프 조프르

 

드리앙 대령의 경고와 무시

  • 드리앙 대령의 보고: 드리앙 대령은 방어 준비가 허술하다고 보고하였으나 무시당했다.
  • 정치적 인맥 활용: 드리앙 대령은 자신의 정치권 인맥을 활용하여 조프르에게 대책 마련을 촉구하였다.
  • 조프르의 반응: 조프르는 "정식 지휘계통 외의 보고는 인정하지 않겠다!"며 전군에 엄명을 내렸다.
  • 방어력 강화 실패: 드리앙이 원했던 베르됭 방어력 강화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FRA788 / 프랑스 '56 1차대전 영웅 에밀드리앙 대령

 


독일 제국군의 대공세 시작

  • 독일의 작전 승인: 독일은 최종적으로 해당 지역을 선택하였고,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작전을 승인하였다.
  • 군사 배치:
    • 제5군: 9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5군이 14만 명의 병력과 1,200여 문의 야포를 투입하였다.
    • 예비대: 본토에 배치한 예비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 공세 시작: 1916년 2월 21일, 최정예 사단들이 투입되어 공세에 나섰으나, 포격만 진행하고 본격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
  • 작전 지휘의 문제:
    • 참모장 크노벨스도르프는 포탄만으로 프랑스군을 제거할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판단을 하였고, 작전 총사령관 빌헬름 황태자는 이를 칭찬하였다.
    • 이로 인해 독일군은 실질적인 성과 없이 뫼즈강 줄기를 따라 부아 도몽만을 점령하는 데 그쳤다.

초기 공격과 프랑스군 저항

  • 본격적인 공세: 포격 종료 후 독일군이 본격적인 공세에 돌입하였으나, 남은 프랑스군이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 드리앙 대령의 역할:
    • 드리앙 대령은 자신이 지휘하던 2개 대대를 이용해 필사의 지연전을 펼쳤다.
    • 독일군은 선 화력제압 후 진격 방식을 선택하여 신중히 진격하였다.
  • 전력 비율: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독일군이 뫼즈 강과 베르됭 요새까지 도달했어야 할 정도였으나, 실제로는 1차 목표선에 간신히 도달하였다.
  • 드리앙 대령의 전사: 드리앙 대령이 후퇴전을 지휘하며 아군을 엄호하다가 전사하였다.

두오몽 요새의 함락

  • 방어선 붕괴: 24일 방어선이 무너진 후, 25일에는 두오몽 요새가 독일 육군에 함락되었다.
  • 전술적 접근:
    • 독일군은 1,500여 문의 야포에서 30만 발을 쏟아부어 요새를 마비시켰다.
    • 그 뒤 보병이 진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 프랑스군의 피해: 이 과정에서 프랑스 육군은 10만 가까운 사상자를 입었다.
  • 전투의 결과: 독일군의 압도적인 포격과 진격으로 인해 프랑스군의 방어가 크게 약화되었다.

 


페탱의 방어 전략과 병력 보강

  • 카리의 철군 요청: 중부집단군 사령관 카리가 철군 명령을 요청하였으나, 조제프 조프르는 이를 거부하고 필리프 페탱을 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 전력 비율 인식: 페탱은 프랑스군과 독일군의 전력비가 1:3까지 벌어진 것을 인식하였다.
  • 최선의 판단: 독일군을 격퇴시키기 위해 최대한의 피해를 주어 스스로 물러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였다.
  • 병력 보강:
    • 페탱은 베르됭 남부 60km 지점에 위치한 바르르뒤크로 향하는 통로를 확보하여 군수물자와 병력을 보충하였다.
    • 보강된 병력을 전투에 투입하고, 지친 병력과 교대시키며 전투를 지속하였다.

니벨의 공격적 전술 변화

  • 조프르의 불만: 프랑스 총사령관 조프르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페탱의 방식에 불만을 가졌다.
  • 페탱의 승진: 조프르는 페탱을 중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승진시키고, 후임으로 로베르 니벨을 임명하였다.
  • 니벨의 명령: 니벨은 부임하자마자 무조건적인 공세를 명령하였다.
  • 참호전의 전개: 이후 철조망과 기관총, 포격으로 병력이 증발하는 전형적인 참호전이 벌어졌다.

전투의 환경 변화와 독일군의 어려움

  • 초기 성공과 환경 변화: 독일군의 공세는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으나, 폭우와 진창길로 인해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 포병 재배치의 어려움:
    • 화력지원을 위해 준비한 포병들은 아군 보병의 전진에 맞추어 재배치해야 했으나, 진창길로 인해 작업이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였다.
    • 이로 인해 독일군은 제때 포병대를 재배치하지 못하고, 프랑스군에게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주었다.
  • 작전 지속 여부 고민: 작전의 지지부진함으로 인해 팔켄하인은 작전 지속 여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 크노벨스도르프의 주장: 독일군 참모장 크노벨스도르프는 계속해서 공격을 외쳤고, 결국 작전은 계속되었다.

작전 지속 여부에 대한 논의

  • 조프르의 결정: 조프르는 페탱을 작전에서 제외시키고, 로베르 니벨을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 니벨의 공격 명령: 니벨은 즉시 무조건적인 공세를 명령하였고, 그 결과 전투는 더욱 격렬해졌다.
  • 전략적 의미 상실: 공세에 공세로 대응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더 이상의 전략적, 전술적인 의미가 없어졌다.
  • 전투의 지속: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전투는 계속되었고,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군의 반격과 요새 탈환 시도

  • 페탱의 승진: 5월 초, 페탱은 중앙집단군 사령관으로 승진하였고, 니벨이 베르됭 방어군 사령관이 되었다.
  • 니벨의 최우선 과제: 니벨의 최우선 과제는 두오몽 요새의 탈환이었다.
  • 프랑스 포병의 집중 포격: 5월 15일부터 프랑스 포병은 두오몽 요새에 대한 집중 포격을 시작하였다.
  • 요새 내부의 고통: 요새 안의 독일군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고, 통로가 매몰되고 물 공급이 부족하였다.

보 요새 전투와 독일군의 손실

  • 전투 전개: 6월 초의 전투는 보 요새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 독일군의 공격: 6월 2일부터 독일군은 연이어 요새를 공격하였으나, 매번 큰 손실을 입고 물러났다.
  • 요새 함락의 시간: 보 요새의 함락에는 6일이 걸렸으며, 이는 독일군의 전술적 성과였다.
  • 전선의 악화: 그러나 독일군의 입장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동부전선의 붕괴를 막기 위해 병력을 빼내야 했다.

전투 종료와 인명 손실

  • 전투의 종료: 10월 말, 니벨은 반격을 지시하여 두오몽 요새를 회복하였고, 12월 말까지 모든 지역을 회복하였다.
  • 최종 인명 손실: 최종적인 인명 손실은 독일 육군 43만 4000명, 프랑스 육군 55만 여명으로 추산된다.
  • 전투의 비극성: 이 전투는 프랑스군에 의해 분쇄기라고 불릴 정도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 전투의 역사적 의미: 베르됭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양측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전투 이후 손실 비율

  • 손실 비율: 베르됭 전투의 전체 양측 손실 비율은 5:4로 나타났다.
  • 전투 기간 동안의 손실: 초기 공세 기간의 급격한 손실을 제외하면, 프랑스와 독일 양측의 병력 손실 비율은 거의 1:1에 근접하게 된다.
  • 전투력 변화: 이는 프랑스군의 전투력이 독일군과 비등해졌음을 의미하며, 더 이상 독일군이 우월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프랑스군에 소모전을 강요할 수 없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 전후 독일군의 입장: 베르됭 전투 이후, 독일군은 솜 전투, 제2차 아라스 전투, 니벨 공세, 제2차 이프르 전투 등에서 수세적 입장으로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페탱 장군의 명성과 비극

  • 페탱 장군의 역할: 베르됭 방어전을 성공으로 이끈 페탱 장군은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 후일의 항복: 그러나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나치에게 항복하고, 괴뢰 정부인 비시 프랑스의 수반이 되어 그의 명성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 반역죄로의 연금: 전후에는 반역죄로 여생을 연금 상태로 마치게 된다.
  • 페탱 변호론: 페탱을 변호하는 측에서는 베르됭 전투 당시의 경험이 그로 하여금 비시 정부의 수반으로 활동하며 독일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취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페탱의 유화적 입장 논란

  • 전투의 충격: 베르됭 전투 당시 프랑스군이 입은 엄청난 피해가 페탱에게 큰 충격으로 남았다고 한다.
  • 희생에 대한 두려움: 그는 다시 그런 희생을 감수할 수 없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 전쟁 양상의 변화: 제2차 세계 대전이 전쟁 초반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주장의 설득력에 의문이 제기된다.
  • 프랑스의 승리를 위한 조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페탱이 내린 조치는 프랑스의 승리를 위한 것이었지, 병사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긴 것이 아니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전후 전쟁 분위기 변화

  • 전쟁 분위기 변화: 베르됭 전투는 전쟁을 대하는 각국의 분위기를 180도 바꿔 놓았다.
  • 종전 논의의 시작: 각국의 국민과 정계는 종전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 프랑스의 전시 거국내각: 프랑스의 전시 거국내각(Union Sacree)은 종전 여부를 논제로 분열되었다.
  • 독일의 군부 독재체제: 독일에서는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권력을 장악하여 군부 독재체제가 마련되었다.
    에리히 루덴도르프

 

러시아의 브루실로프 공세

  • 협상국 회담: 본래 협상국 주요 4개국(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 러시아 제국) 회담에서는 1915년에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를 배려하여 동부전선에서 현상 유지를 하고 나머지 3국이 일제히 서부전선에서 총공세를 펼치기로 합의되었다.
  • 독일의 선제 공격: 그러나 공세에 나서기도 전에 독일이 베르됭 전투로 선수를 쳤다.
  • 프랑스의 구원 요청: 상황이 급해진 프랑스는 기존의 합의를 제쳐두고 러시아에 급히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 러시아의 반응: 러시아가 이에 호응하여 벌어진 것이 러시아 제국 최후의 공세 작전인 브루실로프 공세이다.
    1차 세계대전 - 브루실로프 공세

 

베르됭 전투의 유산

  • 참호전의 참혹함: 베르됭 전투의 참호전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베르됭 일대의 지형은 포격으로 패인 흔적이 남아 있다.
  • 존 루주(Zone Rouge): 이 지역은 존 루주라고 부르며, 불발탄과 지뢰가 너무 많아 출입이 통제되는 장소가 있다.
  • 오염 문제: 비소, 납, 수은, 독가스 오염 문제도 심각하여 일부 지역은 현재까지도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 폭탄 제거 작업: 폭탄 제거반이 1년에 50여 톤의 불발탄을 수거하고 있지만, 이 속도로는 최대 300년이 더 걸릴 것으로 예측된다.

전투의 비극적 결말

  • 프랑스군의 비참한 결말: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비참한 끝을 맞이하였다.
  • 주역들의 운명: 전투의 주역들은 전후에 각기 다른 운명을 겪게 되었다.
  • 역사적 맥락: 이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프랑스군의 패배가 큰 영향을 미쳤다.
  • 전투의 결과: 전투의 결과는 프랑스군의 사기 저하와 전후 정치적 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필리프 페탱의 명성과 추락

  • 페탱의 초기 명성: 필리프 페탱은 전후 한동안 추앙받았으며, 특히 베르됭 전투에서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 기념물과 초상화: 베르됭 전투 수훈자 명단의 최상단에 페탱의 이름이 걸려 있었고, 전투를 기념하는 건물 안에는 그의 초상화가 가장 크게 걸려 있었다.
  • 명성의 변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페탱은 대독 부역혐의로 인해 모든 기념물이 철거되거나 그의 이름이 삭제되었다.
  • 사회적 반응: 이러한 변화는 프랑스 사회에서 페탱에 대한 인식이 급격히 변모했음을 나타낸다.

전후 페탱의 운명

  • 대독 부역혐의: 페탱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대독 부역혐의로 비난받았다.
  • 기념물 철거: 그의 이름이 적힌 명판과 초상화는 모두 철거되었고, 베르됭 전몰자 묘역의 장지도 비어있게 되었다.
  • 역사적 교훈: 이는 전후 역사에서 개인의 명성과 정치적 상황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 사회적 영향: 페탱의 추락은 프랑스 사회에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변할 수 있는지를 시사한다.

로베르 니벨의 지휘와 패배

  • 니벨의 지휘: 페탱이 경질된 이후, 로베르 니벨이 지휘를 맡아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 참패의 원인: 니벨의 지휘 아래에서 프랑스군은 1917년 1차 대전에서 최악의 참패를 경험하였다.
  • 전략적 실패: 이 참패는 프랑스군의 전략적 실패와 전투 준비 부족을 반영한다.
  • 군사적 영향: 니벨의 패배는 프랑스군의 전반적인 전투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군의 비극적 구출 작전

  • 고립된 프랑스군: 6월 초, 보 요새에서 고립된 프랑스군이 구원을 청하는 마지막 전서구를 보냈다.
  • 전서구의 기적적 도착: 이 전서구는 기적적으로 프랑스군 진영에 도착하였으나, 그들은 생을 마감하였다.
  • 레지옹 도뇌르 훈장: 프랑스 육군은 이 전서구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였다.
  • 기념 엽서와 전시: 전서구는 기념 엽서로 만들어져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보 요새의 대규모 공세 실패

  • 구출 작전의 비극: 전서구의 도착 이후, 프랑스군 지휘부는 고립된 아군을 구하기 위해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 공세의 실패: 그러나 이 공세는 모두 실패하였고, 최소 수천 명 이상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 고립된 병력: 보 요새에 고립되어 있던 병력은 최대 600여 명으로 추산된다.
  • 전투의 복잡성: 고립된 부대의 구출 요청과 지휘부의 대응은 복잡한 상황을 초래하였다.

두오몽 요새의 참사

  • 두오몽 요새 점령: 1916년 5월, 독일군 병사들이 두오몽 요새를 점령하였다.
  • 연쇄폭발 사고: 독일군 병사들이 화염방사기 연료로 불을 때우다가 연쇄폭발이 발생하여 600명이 즉사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하였다.
  • 폭발의 영향: 요새와 같은 견고한 공간에서의 폭발은 사망률을 약 600% 높였다.
  • 전투의 위험성: 이러한 사건은 전투 중의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

 

생존자에 대한 오해와 비극

  • 생존자의 비극: 몇몇 생존자들이 요새를 탈출했으나, 대폭발에 놀란 병사들이 그들을 오인하여 사살하였다.
  • 오해의 원인: 생존자들은 폭발로 인해 피부가 검댕으로 변해 있었고, 이는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 군대의 침투로 오해되었다.
  • 사살 사건의 결과: 이 사건은 전투 중의 혼란과 오해가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 프랑스 측의 대응: 프랑스 측은 이 폭발을 목격하고 두오몽을 재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개시하였으나 여러 번 실패하였다.

프랑스군의 참호에서 발견된 현상

  • 기이한 현상 발견: 전투 중 프랑스군은 탈환한 참호에서 기이한 현상을 발견하였다.
  • 참호의 매몰: 참호선이 통째로 매몰되어 있었고, 그 위로 총검들이 솟구쳐 있었다.
  • 생매장된 병사들: 발굴 결과, 총검 바로 아래에 수백여 명의 프랑스군 병사들이 생매장되어 있었다.
  • 전투의 비극적 상징: 이 현상은 전투의 비극적 상징으로 여겨지며, 전투 중의 희생을 기리는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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