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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 개요

  • 홍경래의 난은 조선 순조 11년(1811)에 발생한 반란이다.
  • 이 반란은 평안도 지역에서 일어났으며, 홍경래(洪景來)가 주도하였다.
  • 반란의 배경과 원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홍경래의 난 배경

  • 역사학계에서는 홍경래의 난이 발생한 원인을 두 가지로 파악하고 있다:
    1. 사회적 모순: 당시 사회의 불평등과 갈등이 반란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2. 지역감정: 서북 지방의 사회경제적 특징이 반란에 영향을 미쳤다.

 

서북 지방의 역사적 차별

  • 서북 지방은 고려 시대부터 여요전쟁 등 북방 민족과의 전쟁에서 최전선으로서 지속적으로 수난을 당해왔다.
  • 이 지역은 몽골의 침략과 같은 외부의 공격으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서북 지방은 고전적 양반 계층이 형성될 여지가 없었다.
  • 하천 유량 부족으로 인해 대규모 치수관개사업이 필요했으나, 이러한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생산력이 저하되었다.

서북 지방의 사회적 구조

  • 서북 지방은 성리학의 전파가 늦어져, "서북 지방에서는 양반들도 소학을 읽지 않는다"는 장계가 올라올 정도로 교육 수준이 낮았다.
  • 양반 세계에서 서북 지방은 완전히 왕따당한 상황이었다.
  • 과거 합격률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북 지방 출신은 고위직에 임명될 수 없었다.
  • 문과와 무과의 경우에도 서북 지역 출신은 승진의 기회가 제한되었다.

서북 지방의 수령과 향임

  • 서북 지방에서 사족이 사라지면서, 향임이 향권(鄕權)을 장악하게 되었다.
  • 향임은 부세를 중앙에 운반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역할을 하였다.
  • 18세기 중반 이후, 수령과 신향 간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 수령들은 세도 가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수탈이 심해졌다.

수탈과 반발의 역사

  • **매향(賣鄕)**과 **민고(民庫)**는 서북 지방에서의 대표적인 수탈 방법이다.
    • 매향: 수령이 돈 많은 상인들에게 향임을 강제로 떠넘기는 방식이다.
    • 민고: 서북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경비를 충당하게 한 창고로, 수령의 사금고화가 이루어졌다.
  • 이러한 수탈은 서북민에 대한 차별과 피해의식과 결합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

 

 

상인과 홍경래의 난

  • 홍경래의 난은 상인들과도 연결될 수 있는 사건이다.
  • 서북 지방은 농업 생산력이 높고 자원이 풍부하여 상업이 발달하였다.
  • 송상 만상을 중심으로 한 상인들은 독자적인 연결망을 갖추고 있었다.
  • 그러나 난이 일어난 순간부터 상인들은 홍경래 군에서 의미 없는 존재가 되었고, 이희저와 같은 인물은 후방에서 군량을 지원하는 수준에 그쳤다.

 

 

농민들의 몰락 배경

  • 16세기: 직전법이 폐지되면서 전주 전객제가 소멸하고, 지주 전호제가 확산되었다.
  • 17세기: 신분질서의 동요와 유통경제의 성장으로 인해 지주 전호제가 경제적 지주 전호제로 변화하였다.
  • 18세기: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으로 토지 소유의 격차가 심화되면서 농민층이 분화하기 시작하였다.
  • 이러한 변화는 농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켰고, 조선왕조는 재정 부족으로 인해 부세 징수에만 급급하게 되었다.

 

농민층의 분화와 재정 부족

  • 농민층의 분화: 18세기에는 농민층이 더욱 세분화되기 시작하였다.
  • 재정 부족: 조선왕조는 극심한 재정 부족에 시달리며 농민들의 체제 이탈이 심화되었다.
  • 체제 이탈: 농민들이 체제에서 이탈하게 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 이러한 상황은 농민들의 사회적 불만을 증대시켰다.

무토불농층의 형성

  • 무토불농층(無土不農層): 이들은 땅 없이 농사를 짓지 못하는 계층으로, 숙종 31년 경상 감사의 장계에서 5만여 명, 충청 감사의 장계에서 10만여 명이 언급되었다.
  • 기민(飢民): 이들은 땅 없이 떠돌며 사회 불만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 사회적 불만: 무토불농층의 형성은 조선 사회의 불안정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 이들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게 되었다.

 

자연재해와 사회 불만

  • 자연재해의 빈발: 조선 후기에 각종 자연재해가 유난히 빈발하여 사회 불만을 극대화시켰다.
  • 1809년 흉년: 기록적인 흉년으로 인해 대대적인 기민이 발생하였다.
  • 진급제도: 흉년 때마다 기민을 돕기 위해 곡식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진급제도가 마련되었다.
  • 이러한 자연재해는 농민들의 생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기민의 수와 흉년

  • 기민의 수: 1810년 순조실록에는 기민이 840만 1,209명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숫자가 언급된다.
  • 기록의 신뢰성: 이 숫자는 당시의 총 인구보다 더 많은 수치로, 기민의 심각한 상황을 나타낸다.
  • 진휼 기록: 진휼을 마친 이후의 기록에서도 기민의 수가 상세히 언급되었다.
  • 이러한 상황은 조선 사회의 경제적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기민과 인구 조사 차이

  • 인구 조사 결과: 경조에서 민수를 바쳤고, 5부 및 8도의 총 원호는 176만 1,887호였다.
  • 남녀 인구: 남자는 375만 4,890구, 여자는 382만 8,156구로, 총 인구수는 758만 3,036명이었다.
  • 기민과의 차이: 기민과의 차이는 81만 8,163명에 달한다.
  • 이러한 차이는 조선 사회의 불균형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이다.

서북 지방으로의 이주

  • 이주 현상: 기민들은 삼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을 떠나 서북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 광산붐: 서북 지방의 광산붐에 편승하여 생계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 경제적 기회: 이주한 농민들은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찾기 위해 이동하였다.
  • 이러한 이주는 조선 사회의 경제적 변화와 관련이 있다.

농민들의 상업적 잠채

  • 현대 자본주의 맹아론: 몰락한 농민들의 상업적 잠채는 현대 자본주의의 초기 형태와 연결된다.
  •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 몰락 농민이 일거리를 찾아 임노동자로 변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 산업 발전의 한계: 조선에서는 잠채가 산업 발전과 연결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 이러한 현상은 농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더욱 심화시켰다.

자본주의 맹아론(資本主義 萌芽論)------------------------------------------------------------------------------------------------------------------

자본주의 맹아론(資本主義 萌芽論) 은 열강의 지배가 없었더라도 비서양 지역 내에서 자체적으로 자본주의가 형성되고 근대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이론이다. 맹아(萌芽)는 싹이라는 뜻이다.

 

 

인클로저 운동---------------------------------------------------------------------------------------------------------------------------------------------

인클로저 운동의 개념

  • **인클로저(종획운동)**는 잉글랜드에서 발생한 사회 변화 현상이다.
  • 이 운동은 특정 집단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경향과 트렌드를 나타내는 용어로 이해되어야 한다.
  • 따라서 인클로저는 **'운동'**이라는 표현보다는 **'신드롬'**이나 **'현상'**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 이러한 번역은 당시의 시대 상황을 보다 잘 드러내는 방식이다.

운동의 정의와 의미

  • 인클로저 운동은 단순히 어떤 집단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이는 사회적 경향을 반영하는 개념으로, 시대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 운동이라는 용어는 활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인클로저는 사회적 변화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다.
  • 따라서 인클로저는 단순한 행동이 아닌, 복합적인 사회적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인클로저의 번역적 접근

  • 인클로저를 **'운동'**으로 번역하는 것보다 **'신드롬'**이나 **'현상'**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 이러한 번역은 역사적 맥락 사회적 의미를 보다 잘 전달할 수 있다.
  • 신드롬이라는 용어는 사회적 현상의 복잡성을 강조하는 데 유용하다.
  • 현상이라는 표현은 시간적 변화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는 데 적합하다.

울타리 치기 운동의 설명

  • 인클로저는 한국어로 울타리 치기 운동으로 설명될 수 있다.
  • 이는 소유 개념이 모호한 공유지 사유지 간의 경계를 명확히 하기 위한 노력이다.
  • 울타리를 치는 행위는 다음과 같은 목적을 가진다:
    1. 양이나 가축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
    2. 자신의 소유권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다.
  • 이러한 과정은 자신의 영역을 확인하고 자산으로 만들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다.

인클로저의 역사적 기원

  • 인클로저의 기원은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일반적으로 인클로저는 두 가지 주요 시기로 구분된다:
    1. 1차 인클로저: 16~17세기 튜더 왕조 시대에 발생한 것.
    2. 2차 인클로저: 18~19세기 의회에 의해 주도된 것.
  • 이러한 구분은 인클로저의 역사적 발전 사회적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 각 시기는 사회적, 경제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양은 온순한 동물이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인간을 잡아 먹는다."- 토머스 모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에 이제는 한 사람의 양치기와 그의 개가 있을 뿐이다." - 휴 라이머

서북 지방의 사회적 상황

  • 민고의 폐단: 민고의 폐단으로 인해 농민층의 몰락이 극심해졌다.
  • 거지 소굴: 서북 지방은 기민들이 몰려들어 거지 소굴과 같은 상황이 되었다.
  • 사회적 불안정: 이러한 상황은 지역 사회의 불안정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 농민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계속해야 했다.

홍경래 군의 모집

  • 금광 소문: 홍경래 군이 금광이 난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농민들을 모집하였다.
  • 농민들의 참여: 농민들은 돈에 고용된 광산 노동자 또는 향임에 의해 동원된 부대로서 홍경래 군에 가담하였다.
  • 기대감: 이들은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홍경래 군에 참여하였다.
  • 이러한 현상은 조선 사회의 변화 혼란을 나타낸다.

홍경래의 난 개요

  • 홍경래의 난은 크게 전기 후기로 구분된다.
    • 전기: 1811년 12월 18일 ~ 29일
    • 후기: 1812년 4월 19일까지
  • 이 난은 주동 세력이 크게 변화하고, 난의 성격도 크게 바뀌기 때문에 두 시기로 나뉜다.

반란의 주동 세력

  •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 출신으로, 뛰어난 유교적 소양을 지닌 인물이다.
  • 그는 병서 술서, 특히 정감록에 통달하였다.
  • 1798년 사마시에서 낙방한 후, 벼슬길을 포기하고 풍수가로 활동하였다.
  • 이 경험을 통해 당시 조선 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반란 준비 과정

  • 1800년, 홍경래는 우군칙을 만나게 된다.
    • 우군칙은 평안도 태천의 양반가 서자로, 홍경래와 친분을 맺고 반란을 모의하였다.
  • 두 사람은 이희저라는 부호를 끌어들여 봉기군의 기지를 마련하였다.
  • 1811년 7월 이후, 홍경래는 포섭한 장사들과 함께 다복동에 머물렀다.
  • 이 시기에 김사용과 같은 무관이 합류하여 반란군의 군세를 다듬는 작업을 담당하였다.

반란의 발발과 초기 전투

  • 1811년 12월, 홍경래는 광산에서 일할 사람들을 모집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 12월 20일을 D-day로 정하고, 김창시를 통해 유언비어를 퍼트려 민심을 뒤흔들었다.
  • 12월 15일, 평양 대동관을 폭파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 반란의 낌새를 눈치챈 선천부사 김익순이 체포령을 내리자, 홍경래는 날짜를 앞당겨 12월 18일에 반란을 일으켰다.

 

서북 지역 점령

  • 홍경래는 군을 두 개로 나누어 남진군 북진군으로 편성하였다.
    • 남진군: 가산, 박천, 영변, 안주 등을 공격
    • 북진군: 정주, 곽산, 선천, 철산, 의주를 공략
  • 반란군은 가산을 점령한 후, 서북의 수령들에게 격문을 보내 항복을 종용하였다.
  • 격문은 평안도 지역 차별을 강조하며, 지역 고립된 반란임을 드러내었다.

홍경래 암살 미수 사건

  • 홍경래의 남진군은 박천에서 영변을 공략할 계획이었으나, 김대린 이인배가 홍경래를 암살하려고 하였다.
  • 김대린은 홍경래를 공격하였으나, 홍경래는 부상을 입고 살아남았다.
  • 이 사건으로 인해 반란군은 가산 다복동으로 회군하게 되었다.
  • 관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반란군의 진압을 준비하게 된다.

관군의 반격 준비

  • 홍경래의 군세가 청천강 이북을 휩쓸었으나, 의주 안주 같은 주요 지역은 점령하지 못하였다.
  • 조정은 반란군에 의해 죽거나 항복한 수령을 대신하여 새로운 수령들을 임명하였다.
  • 12월 22일부터 조정은 반란군을 소탕할 것을 독려하며, 적의 수괴를 잡아온 자에게 보상을 약속하였다.
  • 반란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 관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반란군에 대항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홍경래 반란군의 초기 전투

  • 홍경래의 반란군은 봉기 초기 파죽지세의 기세로 청천강 이북의 여덟 고을을 장악하였다.
  • 반란군은 청천강을 넘어 평안도의 요충지인 안주성을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 12월 24일, 선봉장 홍총각이 지휘하는 반란군 300명이 선발대로 박천의 송림리에 진을 쳤다.
  • 12월 26일, 홍경래, 김창시, 우군칙 등이 이끄는 반란군 본대 500여명이 합류하여 총 병력은 1천여 명에 달하였다.
  • 이때 반란군의 대다수는 기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송림 전투의 준비 과정

  • 관군도 반란군에 맞서기 위해 숙천, 중화, 순천, 함종, 영유 등에서 병사를 징집하였다.
  • 관군의 총 병력은 대략 2천 명에 달하였으며, 이 중 전투력이 있는 부대는 9개 초였다.
  • 12월 29일, 좌영장 함종부사 윤욱렬과 우영장 순천군수 오치수가 각각 4개 초를 지휘하여 진군하였다.
  • 그 뒤를 우후 이해승 2개 초를 지휘하였다.

전투의 시작과 전개

  • 관군은 송림동의 어귀에 있는 풍진의 고개에 주둔하였다.
  • 홍경래는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두 개는 관군의 전진을 공격하고 나머지 하나는 이해우의 후진을 노렸다.
  • 전투가 시작되자 홍총각이 말을 타고 뛰쳐나와 관군의 후진을 공격하였다.
  • 관군의 후진은 숫자가 적어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관군의 반격과 전투 결과

  • 안주성 백상루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평안병사 이해우는 전 곽산군수 이영식을 후원장으로 임명하고 1천 명의 관군을 주어 반군의 후미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 반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으나, 홍총각은 전의를 꺾지 않고 사투를 벌였다.
  • 관군의 전열이 무너지려 하자 윤욱렬이 호통을 치고 탈주병들을 베어버리려 하였다.
  • 관군 병사들은 정신을 차리고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홍경래의 퇴각과 관군의 보복

  • 관군이 총을 쏘며 적진으로 돌격하자 반란군의 기병 서너명이 총에 맞아 낙마하였다.
  • 반란군은 패주하였고, 전진은 패주하는 반란군을 쫓아 송림동을 샅샅이 뒤졌다.
  • 반란군은 최소 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고, 장수도 4~5명이 죽었으며 30명은 포로가 되었다.
  • 패배한 홍경래는 12월 29일 정주성으로 퇴각하였다.

전투 후 민간인 피해

  • 관군은 반란군에게 넘어간 고을을 수복하고 다복동에 있는 반란군 본부를 불태웠다.
  • 이 과정에서 관군은 민간인들을 약탈, 학살하는 등 잔혹한 초토화전술을 펼쳐 지탄을 받게 되었다.

홍경래군의 민간인 보호 노력

  • 반면 홍경래군은 패주하는 와중에도 일반 농민들을 끌어들여 학살에서 구해내고 향후 반란의 지지 기반으로 삼으려 하였다.
  • 이는 반란군이 민간인 보호를 통해 지지 기반을 강화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북진군의 초기 승리와 패배

  • 북진군의 상황: 남진군이 송림에서 패배할 무렵, 북진군은 여섯 고을을 점령하고 의주부를 노리고 있었다.
  • 의주부윤의 대응: 의주부윤 조흥진은 계엄령을 내려 성 내부를 수습하였다.
  • 의병의 저항: 김견신과 허항이 의병을 일으켜 백마산성을 지켰다.
  • 관군의 반격: 관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북진군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관군의 반격과 북진군의 혼란

  • 부대의 혼란: 가장 먼저 흔들린 부대는 남창에 모여 구성을 공략하던 부대였다.
  • 패전 소식: 1812년 새해가 밝자마자 이들은 패전 소식을 듣고 정주성으로 도망쳤다.
  • 관군의 전리품: 관군은 이들이 버린 깃발, 갑옷, 그리고 선천부사의 도장을 입수하였다.
  • 영변부사의 탈환: 1월 6일, 영변부사 오연상이 관군 300명을 이끌고 태천을 탈환하였다.

정주성으로의 도망과 전투

  • 김창시의 등장: 1월 9일, 정주성에서 김창시가 와서 이제초에게 관군과 싸우자고 하였다.
  • 이제초의 이동: 이제초는 휘하 병력 1천 명을 이끌고 곽산으로 이동하였다.
  • 관군의 기습: 다음 날 곽산 사송평에서 윤욱렬이 이끄는 관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였다.
  • 반란군의 피해: 관군은 반란군 50여명의 목을 베었고, 여러 간부들이 붙잡혔다.

 

이제초의 포로와 처형

  • 이제초의 포로 상태: 이제초는 관군에게 붙잡혀 곤장과 주리틀기를 당하였다.
  • 관군의 놀라움: 이제초는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여 관군을 놀라게 하였다.
  • 처형 결정: 관군은 압송 중에 이제초를 김국주, 김국신과 함께 처형하였다.
  • 김창시의 운명: 김창시는 사송평 전투에서 패한 이후 도망치는 데 성공했지만, 조문형에게 배신당해 죽었다.

북진군의 해체와 김사용의 상황

  • 김사용의 계획: 반란군의 부원수 김사용은 용천을 점령한 후 양책참에 진을 쳐 의주를 공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의주 민병대의 반격: 김견신과 허항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가 1월 10일 용천을 일시적으로 탈환하였다.
  • 김사용의 후퇴: 동림성으로 후퇴한 김사용은 1월 13일 남은 1천여 명의 군졸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 북진군의 해체: 한때 2~3천여 명에 달했던 북진군은 해체 수순을 밟았다.

관군의 공세와 북진군의 소멸

  • 서림성의 패배: 1월 14일, 서림성을 지키던 김익명이 관군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 철산의 함락: 16일 철산이 관군에게 넘어갔다.
  • 반란군의 최후: 운암산성과 동림성에 남아있던 반란군도 관군의 공세에 무너졌다.
  • 북진군의 완전 소멸: 북진군은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반란군 붕괴의 원인 분석

  • 다양한 집단의 결집: 반란군이 승리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붕괴된 이유는 여러 목적을 가진 다양한 집단이 결집하였기 때문이다.
  • 목표의 불일치: 각기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반란에 가담한 결과, 명확한 한 가지 목표가 없었다.
  • 향임층과 상인층의 이탈: 전세가 관군에게 기울기 시작하자 향임층과 상인층이 먼저 발을 뺐다.
  • 의병의 가담: 나중에는 의병까지 조직하여 관군에 가담해 홍경래 군을 공격하였다.

정주성의 선택과 특징

  • 홍경래의 농성 장소 선택: 홍경래는 농성 장소로 정주성을 선택하였다.
    • 정주성은 1715년에 지어진 석성으로, 둘레는 4,680보, 높이는 15척이다.
    • 성문은 동서남북 네 곳과 서쪽과 남쪽 사이에 소서문까지 총 다섯 개가 존재한다.
  • 성벽의 구조: 성벽은 산의 능선을 따라 쌓여져 있으며, 북쪽과 서쪽에는 적을 관측하고 지휘할 수 있는 장대가 있다.
  • 성의 방어적 특성:
    • 다섯 문 중 남문만이 개활지에 노출되어 있지만, 옹성이 있어 약점을 커버하고 있다.
    • 내부에 우물이 많아 물 걱정이 없다는 점에서 반란군에게 유리한 조건이다.
  • 정주성의 중요성: 정주성은 반란군에 농성하기 딱 좋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평가된다.

관군의 전쟁 범죄와 반란군의 지원

  • 관군의 행동: 관군은 홍경래를 잡지 않고, 가산, 박천 등 주변 고을들을 탈환하면서 학살, 약탈, 방화 등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 반란군의 지원:
    • 관군의 학살로 인해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정주성에 들어가 반란군에 가담하게 되는 역효과가 발생하였다.
  • 관군의 실수: 홍경래를 놓친 관군은 민심을 잃게 되었고, 이는 반란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제공하였다.
  • 반란의 성격 변화: 관군의 범죄로 인해 반란군의 지지 세력이 증가하게 되었다.

봉기의 성격 변화

  • 주도 세력의 변화: 농성 과정에서 봉기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 초기 주도 세력이던 향임층과 상인층이 이탈하고, 농민층이 주도 세력으로 급부상하였다.
  • 지지 세력의 단일화:
    • 지지 세력층이 단일화되면서, 반란을 주도한 지휘부는 신분질서를 타파하고 식량을 고루 배급하는 등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 농민전쟁 해석: 이러한 변화로 인해 홍경래의 난을 농민전쟁으로 보는 해석도 존재하게 되었다.
  • 농성의 지속성: 반란 자체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정주성의 농성은 의외로 길게 이어졌다.

관군의 내통자 기대와 민심

  • 관군의 기대: 관군은 홍경래의 난 전기 때처럼 내부에서 내통자가 발생하기를 바랐다.
  • 민심의 변화:
    • 이미 민심을 잃은 관군을 적으로 생각하며 일치단결된 상황에서 내통자가 나오면 목이 날아가거나 도망치기 일쑤였다.
  • 내부 통제의 어려움: 관군 입장에서는 내통자가 전혀 쓸모가 없었다.
  • 반란군의 단결: 반란군은 민심을 얻어 단결된 상태에서 농성을 이어갔다.

반란군의 농성 준비와 전략

  • 농성 준비: 반란군은 농성에 대비하여 성 내의 각종 창고에 보관된 곡식을 모두 꺼내고 백성들의 식량까지 징발하여 군량으로 삼았다.
  • 징병과 협박:
    • 성 내의 백성들을 징병하고, 도망치려는 백성들에게는 가족까지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 방어 전략:
    • 성 주위에 마름쇠를 뿌리고 민가는 모조리 불태워 관군의 접근을 방지하였다.
    • 계속해서 사람을 보내 관군의 움직임을 정탐하였다.
  • 농성의 결의: 이러한 준비로 인해 반란군은 농성에 대한 결의가 확고하였다.

관군의 첫 번째 공격과 피해

  • 관군의 첫 공격: 1월 15일, 관군은 첫 번째 총공세를 펼쳤다.
  • 기상 조건: 겨울철 폭설로 인해 반란군이 관군이 접근하기를 기다리다가 때를 맞춰 총을 쏘자 관군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 전투 결과:
    • 북문을 공격하던 순무영 군관 김태백과 병사 둘이 죽고, 남문에서도 제경욱이 전사하였다.
    • 이 전투로 21명의 전사자와 5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 관군의 퇴각: 폭설과 피해로 인해 관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관군의 후속 공격과 반란군의 저항

  • 관군의 재공격: 1월 19일 새벽, 관군은 다시 한 번 총공세를 펼쳤다.
  • 공격 방식:
    • 안개가 자욱한 새벽에 관군들은 사방에서 공격을 퍼부었고 악기를 연주하며 사다리를 이용해 성벽을 올랐다.
  • 반란군의 저항:
    • 성벽에 접근하자 반란군이 총과 활을 쏴댔고, 관군은 또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 전투의 혼란:
    • 동문에서는 의병들이 먼저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올랐으나, 뒤에 있는 군사들이 아군을 모르고 총으로 쏴 떨어뜨리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 피해 상황: 관군은 8명이 전사하고 36명이 부상당하였다.

관군의 전투 준비

  • 2차 총공세 실패: 관군은 2차 총공세가 실패하자 잠시 공성을 멈추고 태세를 정비하였다.
  • 군사 손실: 공성 실패로 인해 많은 군사를 잃었지만, 각지에서 의병이 모여 관군의 전력이 오히려 증강되었다.
  • 부대 배치: 관군은 부대의 진영을 옮겨 포위망을 짰으며, 각 문에 다음과 같은 인물을 배치하였다:
    1. 동문: 삭주부사 윤민동
    2. 서문: 의병장 허항, 행영장 정래흥, 함종부사 윤욱렬
    3. 소서문: 순천군수 오치수
    4. 북문: 의병장 김견신
    5. 남문: 평안 감영군과 박천에서 온 병사들
  • 공성 병기 요청: 관군은 순무영 본영에게 공성에 필요한 대장군전, 대완구와 공성 병기를 제작할 장인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반란군의 대응과 작전

  • 반란군의 활동: 관군이 전열을 가다듬는 동안 반란군은 성 주변의 가옥을 철거하여 엄폐물을 제거하고 약탈을 통해 물자를 보충하였다.
  • 탐색전: 관군은 야밤에 큰 소리로 병사를 행군시키며 반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허실을 알아내려 하였다.
  • 전투 준비: 반란군은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성 주변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 전투의 긴장감: 양측 모두 전투를 준비하며 긴장된 상황이 지속되었다.

윤차의 제작과 설계

  • 윤차 제작: 2월 1일, 관군의 김진원은 윤차라는 이름의 공성탑을 제작하였다.
  • 구조 설명:
    1. 상층: 포수 5~6명이 탈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철판으로 보호되었다.
    2. 중층: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3. 하층: 윤차를 움직이기 위한 바퀴가 있었고, 소가죽으로 가림막이 만들어졌다.
  • 우려의 목소리: 방우정은 바퀴가 잣나무 판대기로 만들어져 무게를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하였고, 손태영은 실패할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 기술적 문제: 윤차의 설계와 제작 과정에서 여러 기술적 문제와 우려가 제기되었다.

관군의 공격 시도

  • 공격 시도: 2월 2일 새벽, 관군은 북문 방면으로 공격을 시도하였다.
  • 부대 지휘: 김견신과 윤민동이 북문 공격을 지휘하였고, 나머지 부대는 양동 작전으로 서문과 남문을 공략하였다.
  • 접근 방법: 관군은 건조더미와 장작을 엄폐물 삼아 접근하였으나, 반란군은 관군의 작전을 간파하고 있었다.
  • 결과: 관군은 부상자 5명을 내고 성과 없이 철수하였으며, 모은 건초더미를 불태우고 퇴각하였다.

공성 병기의 실패와 피해

  • 2월 3일 공격: 관군은 공성 병기들을 대거 투입하여 사방에서 총공격을 펼쳤다.
  • 주공 방면: 남문과 소서문 방면이 주공을 맡았다.
  • 악천후: 비와 눈이 내리면서 진창이 만들어져 윤차가 진창에 빠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 피해 상황: 관군은 14명이 죽고 72명이 부상당하며, 고생해서 만든 윤차들을 모두 불태운 뒤 철수하였다.

순무영의 지원과 전투 상황

  • 지원 내용: 순무영에서 관군에게 인력과 물자를 지원하였다.
  • 지원된 화기: 지원된 화기는 호준포, 완구, 백자총통,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불랑기포, 대장군전, 석류화전 등이었다.
  • 인력 지원: 어영청 집사 김인환과 남한산성 집사 이정량을 포함한 10명의 인력이 지원되었다.
  • 전투의 지속성: 지원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계속되었고, 관군의 상황은 점점 어려워졌다.

반란군의 공격과 관군의 패배

  • 반란군의 초조함: 반란군은 성에 갇힌 상황에서 보급이 어려워지자 관군의 포위진을 깨트리기 위해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다.
  • 매복 공격: 2월 9일 반군이 매복한 박천진 부대를 공격하였고, 2월 19일 새벽에 의병들에게 걸려 6명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 반란군의 전투: 반란군은 5~6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출성하여 관군과 싸움을 걸었으나, 전사자 7명을 내고 퇴각하였다.
  • 전투의 긴장감: 반란군과 관군 간의 전투는 계속해서 긴장된 상황을 유지하였다.

이제신의 반란 계획

  • 이제신의 계획: 이제초의 동생 이제신이 홍경래의 목을 바쳐 죄를 용서받기 위해 반란을 모의하였다.
  • 모인 인원: 이제신은 50여명을 모아 홍경래를 벨 계획을 세웠으나, 밀고로 인해 계획이 발각되었다.
  • 홍경래의 반응: 홍경래는 이제신을 불러 잔치를 열었고, 이제신은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억지로 참석하게 되었다.
  • 체포와 구명: 잔치가 끝난 후 이제신은 체포되었고, 홍경래는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우군칙이 만류하여 살려주었다.

4차 총공세의 실패

  • 마지막 공세: 2월 25일, 박기풍은 4차 총공세를 지휘하였다.
  • 윤차의 개량: 순무영에서 파견한 장인 김재명이 윤차를 개량하여 투입하였다.
  • 기술적 문제 해결: 김재명은 장갑판을 보강하고 회석을 쌓아 엄폐물 겸 성내 진입용으로 사용하였다.
  • 결과: 4차 총공세도 관군의 대실패로 끝났으며, 전사자 12명과 부상자 144명을 내고 퇴각하였다.

관군의 패배와 퇴각

  • 패배 인정: 관군은 해가 지자 패배를 인정하고 노획을 막기 위해 윤차들을 모두 불태웠다.
  • 반란군의 승리: 연전연승한 반란군은 승리를 자축하며 사기를 높였다.
  • 관군의 사기 저하: 관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으며, 전투의 지속성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 전투의 결과: 관군은 계속된 패배로 인해 전투를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신임 순무중군의 도착

  • 유효원의 도착: 2월 28일, 신임 순무중군 유효원이 정주성에 도착하였다.
  • 지휘권 인수: 유효원은 박기풍이 통솔하던 관군과 의병 8,329명의 지휘권을 인수하였다.
  • 전투의 새로운 국면: 유효원의 도착은 관군의 전투 상황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었다.
  • 전투의 지속성: 관군은 새로운 지휘 아래에서 전투를 지속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관군의 고립 전략

  • 총공세 실패: 네 번의 총공세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관군은 새로운 방침을 세웠다.
  • 고립 전략: 관군은 목책을 사용하여 정주성 전체를 에워싸고 완전히 고립시키려 했다.
  • 초기 전투 상황: 정주성 전투 초기에는 관군의 진영이 정주성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반란군은 외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 주변 지원군 소탕: 관군은 주변의 지원군을 소탕하여 외부 지원을 차단하고, 주민들을 외지로 소개시켰다.

반란군의 초기 상황

  • 반란군의 협조: 초기에는 반란군이 관군의 방해 없이 백성들의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 연락 및 지원 모집: 외부와의 연락 및 지원 세력 모집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 관군의 진영 이동: 관군이 진영을 성과 가까운 곳으로 옮기면서 반군은 점점 고립되었다.
  • 탈주자 문제: 반군은 성내 주민들을 통제했으나 탈주자는 계속 발생하였다.

식량과 무기의 부족

  • 장기화된 농성전: 농성전이 장기화되면서 식량과 무기가 소모되었다.
  • 식량 배급 감소: 반군은 식량 배급을 절반으로 줄이고, 쌀 대신 누룩을 보급하였다.
  • 가축 도살: 소와 돼지, 군마를 도살하여 지휘관들이 사용할 몇 마리만 남겼다.
  • 무기 부족: 총탄이 부족하여 연환 대신 무쇠 솥을 부숴 만든 철환을 지급하였다.

반군의 공격과 관군의 대응

  • 공세적 태세: 초조해진 반군은 더욱 공세적으로 나왔다.
  • 3월 9일 공격: 우군칙과 홍총각이 이끄는 반란군이 관군 진영을 기습하였다.
    • 경계병 제거: 반란군은 경계병을 먼저 죽였다.
    • 화약주머니 사용: 불붙인 화약주머니를 던져 관군 진영에 불을 붙였다.
  • 관군의 피해: 이 전투에서 관군은 70명이 죽고 137명이 부상하였다.

주민들의 고통과 관군의 전략

  • 주민의 생존 상황: 정주성의 상황이 나빠지면서 주민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게 되었다.
  • 관군의 항복 유도: 관군은 반란군이 나오면 즉시 제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포수 매복: 동문 밖에 포수를 매복시켜 반란군의 출현을 대비하였다.
  • 잔치 개최: 각 진영마다 소 한 마리씩 잡아 잔치를 열어 굶주린 주민들의 항복을 유도하였다.

홍경래의 공세와 패배

  • 3월 20일 공세: 홍경래는 다시 한 번 공세에 나섰다.
  • 북문과 서문 공격: 반란군은 북문과 서문으로 나와 관군의 진영을 급습하였다.
  • 관군의 반격: 허항이 전투를 지휘했으나 선봉장 홍총각에 의해 피살되었다.
  • 전투 결과: 관군은 전사자 23명, 부상자 6명, 반란군은 전사자 48명과 많은 무기를 잃었다.

반란군의 최후 시도

  • 3월 22일 마지막 공격: 반란군은 정예병 1천 명을 이끌고 관군의 진영을 기습하였다.
  • 관군의 방어: 관군은 여러 부대를 투입하여 목책을 지키고 기병 돌격으로 대응하였다.
  • 반란군의 패퇴: 반란군은 관군의 기병에 의해 패퇴하였고, 홍경래는 도망쳐야 했다.
  • 관군의 전리품: 관군은 반란군 87명을 붙잡고 69명을 참수하였으며, 무기와 말을 빼앗았다.

홍경래의 극한 발언

  • 형세 인정: 패배한 홍경래는 현재의 형세가 매우 불리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 호병의 구원 기대: 4월 18일에 호병이 와서 구원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기다리라고 하였다.
  • 극한 발언의 목적: 이러한 발언은 반란군의 군기를 다잡기 위한 것이었다.
  • 항복 제안: 만약 호병이 오지 않는다면 자신의 목을 관군에 바쳐 항복하라고 말했다.

관군의 전염병과 병력 보충

  • 전염병 발생: 관군 진영에서 전염병이 돌며 많은 사졸들이 죽었다.
  • 병력 징발: 각 고을에 명령하여 병사 841명을 징발하여 관군에 편입시켰다.
  • 병력 보충의 필요성: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를 보완하기 위한 조치였다.
  • 관군의 대응: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관군은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반란군의 외부 지원 요청

  • 반란군 지휘부의 전략: 반란군 지휘부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외부로 원군을 이끌어오고 정보를 알아오며 관군의 후방을 교란할 사람들을 끊임없이 보냈다.
  • 정보 수집과 교란 작전: 반란군은 관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후방을 교란하기 위한 다양한 작전을 계획하였다.
  • 세작들의 활동: 1월부터 홍경래의 세작들이 정주성 밖으로 나가 각종 공작을 펼치고 있었으며, 이는 반란군의 외부 지원 요청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 관군의 대응: 관군은 이러한 반란군의 활동에 대해 경계하고 있었으며, 반란군의 외부 지원 요청이 실패할 경우의 상황을 고려하고 있었다.

반란군의 초기 활동

  • 농성 시작: 농성이 시작된 1월부터 반란군은 활발히 활동을 시작하였다.
  • 유한순의 정탐: 김사용의 사주를 받은 유한순이 관군의 정세를 정탐하고, 한양에서 벽보를 붙여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 박기조의 거사 참여: 박기조라는 인물도 한양에서 거사에 가담하였으며, 이는 반란군의 조직적 활동을 보여준다.
  • 반란에 가담한 인물들: 벼슬살이를 한 박종일과 이진채도 반란에 가담하여 도성에서 난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이들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반란의 실패와 체포

  • 모든 시도의 실패: 반란군의 모든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으며, 반란에 가담한 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외부 호응 부족: 외부의 호응이 없는 상황에서 정주성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 정보 누설과 인도: 반란군은 어려운 사정을 감추기 위해 노약자와 부녀자 총 227명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 유효원의 결정: 유효원은 이들을 죽였다가는 반군 측에서 더 이상 투항자가 나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이들을 모두 무사히 귀가시켰다.

관군의 총공세 준비

  • 관군의 전략: 4월 3일 새벽, 관군은 반란군의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각지에 병사를 매복시키고 다섯 번째 총공세를 펼쳤다.
  • 반란군의 저항: 굶주린 반란군이 무너지리라는 예상과 달리, 반군은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 관군의 전투 계획: 이 전투의 패배로 관군은 성벽을 폭파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는 전투의 전환점을 의미한다.
  • 지휘관들의 의견: 일부 지휘관들은 흙을 쌓으면서 성벽으로 전진하자고 주장하였으나, 폭파작전의 책임자 손태영이 시범을 보여주자 모두 납득하였다.

성벽 폭파 작전

  • 폭파 작전의 실행: 관군은 성벽을 폭파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 전투의 진행: 관군은 운산의 광부를 동원하여 땅굴을 파고, 연막작전으로 흙벽을 쌓고 성에 포격과 총격을 가하였다.
  • 작전의 어려움: 중간에 암석지대를 만나 우회하고, 비가 와서 물을 빼내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 땅굴 완공: 4월 17일 땅굴이 완성되었으며, 이는 반란군에 대한 결정적인 공격의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의미한다.

땅굴 작전과 전투 진행

  • 반란군의 저항: 반란군은 점점 다가오는 흙벽 뒤로 총탄과 활을 쏘았으나, 흙벽 덕분에 직사는 막을 수 있었지만 곡사는 막을 수 없었다.
  • 화약 준비: 약환감관 김치언 등이 굴속에 들어가 화약을 준비하고, 화약의 폭발 시기를 시험하였다.
  • 폭발의 순간: 한 덩어리 연기가 하늘로 솟구치고, 금빛 뱀 같은 불빛이 번개처럼 번쩍였다.
  • 성벽의 붕괴: 성 본체가 조각조각 부서지며, 적의 병졸들은 모두 깔려 죽었다.

 

화약 폭발과 성벽 붕괴

  • 화약의 사용: 관군은 4월 18일 화약 1천 700근을 땅굴에 묻고, 다음 날 새벽에 폭발시켰다.
  • 반란군의 피해: 북문의 성벽이 무너지고 반란군 수백 명이 깔려 죽었다.
  • 관군의 진입: 관군은 북문으로 진입하여 성문을 열고, 반란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하였다.
  • 저항 시도: 반란군은 중앙의 향교에서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패퇴하였다.

반란군의 최후와 패배

  • 반란군의 도주: 몇몇 반군은 남문으로 도주했지만, 매복한 관군에게 붙잡혔다.
  • 관군의 학살: 미처 탈출하지 못한 반군들은 관군에게 붙잡혀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 정주성 제압: 관군은 정주성을 제압한 이후 정주목사 임재수에게 행정사무를 맡겼다.
  • 홍경래의 난 종결: 이렇게 홍경래의 난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홍경래의 최후와 처형

  • 홍경래의 저항: 정주성이 함락될 때까지 홍경래는 마지막까지 저항하였다.
  • 전사: 그는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으며, 그의 시신은 참수된 후 '군대를 일으켜 반역한 우두머리'라는 죄목으로 처리되었다.
  • 가족의 처벌: 홍경래의 아내인 최씨는 성이 함락된 이후 체포되어 참수형에 처해졌고, 그 후 거리에 목이 내걸렸다.
  • 연좌 처벌: 홍경래의 처형으로 인해 연좌 처벌의 강도가 더욱 높아졌다.

부원수와 주요 반군의 전사

  • 김사용의 전사: 부원수 김사용 또한 홍경래처럼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 이희저의 도망: 이희저는 정주성이 무너지자 도망쳤으나, 의병 중 한 명인 함의형에게 살해당하였다.
  • 양시위의 처형: 양시위는 저항하다가 붙잡혀 바로 참수되었다.
  • 다른 반군의 운명:
    • 우군칙과 홍총각은 도주하다가 관군에게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된 후 참수되었다.
    • 김창시는 도주하다가 조문명에게 살해되었고, 박성간과 박성신 형제는 도주하다가 관군에게 붙잡혀 참수되었다.

농민들에 대한 잔혹한 처벌

  • 체포된 농민 수: 정주성에서 체포된 농민들은 총 2,983명이었으며, 이 중 10세 이하의 남아 224명과 여자 842명은 무죄로 방면되었다.
  • 처형된 농민 수: 나머지 1,917명은 반란군에 부역한 혐의로 4월 23일에 예외 없이 모두 처형되었다.
  • 처벌의 잔혹성: 농민들에 대한 처벌은 매우 잔혹하였으며, 이는 반란 진압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 사회적 영향: 이러한 처벌은 지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반군에 대한 지지를 더욱 강화시켰다.

정주성 함락의 이례적 학살

  • 관군의 학살: 정주성 함락 당시 관군이 자행한 학살은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 논공행상 문제: 난의 진압에 참여한 사람들을 논공행상할 때, "반란군 중에는 마지못해 난에 참여한 사람도 있을 텐데 성을 함락시키자마자 무턱대고 2천 명을 모두 처형한 것은 옳지 못합니다"라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 유효원의 삭직: 이로 인해 정주성 전투를 이끈 유효원의 삭직이 비변사에 요청되어 순조의 윤허를 받았다.
  • 조선의 전통적 대응: 조선은 반란이나 민란 발생 시 주동자와 핵심 가담자는 처벌하였으나, 단순 가담자에게는 선처를 베풀어 민심을 수습하는 전통이 있었다.

조선의 민란 대응 원칙

  • 유교 이념: 순조실록 1812년 6월 9일 자 기사는 조선이 유교 이념에 충실하였음을 보여준다.
  • 주동자 처벌: 반란이나 민란 발생 시 주동자와 핵심 가담자는 일벌백계로 처벌하였다.
  • 단순 가담자 선처: 단순 가담자인 지역민에게는 선처를 베풀어 민심을 수습하고 본업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 역사적 맥락: 이러한 원칙은 고종 시기의 제1차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할 때까지 지켜졌다.

관군의 훈련 부족과 민간인 학살

  • 관군의 훈련도: 당시 평안도의 지방 속오군 다수가 반군에 가담하였고, 남은 관군의 사졸들은 훈련도가 매우 낮았다.
  • 훈련도감의 역할: 훈련도감이 주축이 된 순무영이 전적으로 도맡았으나, 이들의 숙련도와 감투정신은 조선 최고였다.
  • 민사작전 고려 부족: 관군은 민사작전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으며, 이로 인해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였다.
  • 관군의 잔혹행위: 관군 병사들이 주민들을 약탈하고 학살하는 행위가 심각하였고, 이는 관군 지휘부에서 통제되지 않았다.

공성전의 장기화와 결과

  • 주민의 저항: 관군에 대한 적개심이 커지면서 주민들은 반군과 함께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 공성전의 기간: 공성전은 예상 외로 3달이나 진행되었으며, 이로 인해 관군의 피해가 커졌다.
  • 관군의 악화된 상황: 관군은 성 안에 들어가 포위당하여 피할 길이 없었고, 결국 조선조 유례없는 잔혹한 결말을 맞이하였다.
  • 결과의 심각성: 이러한 상황은 조선 역사에서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홍경래의 난에 대한 시각

  • 홍경래의 난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농민들이 주도한 반봉건적 민란으로 보는 시각
      • 1524~1525년의 독일 농민전쟁과 유사한 점이 있다.
      • 농민층의 주도적인 참여 반봉건적 성격을 강조한다.
    2. 농민전쟁이 아닌 민란으로 보는 시각
      • 주도세력과 농민층의 연대 부족을 지적한다.
      • 농민층은 난이 시작된 이후에야 참여하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 계급투쟁론을 조선 후기 사회에 도입하는 것은 이론적이라는 비판이 있다.

농민 참여와 계급 의식

  • 농민층의 참여를 인정하면서도 홍경래의 난을 농민 전쟁으로 보지 않는 시각도 존재한다.
  • 계급 의식의 기초에서 일어난 최초의 봉기로서의 의미가 있다.
  •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저항 행위의 정당성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감결 사상이 확산되었다.
  • 농민들이 정주성 농성 단계에서 능동성을 보이며 신분제에 대한 의식이 성장하였다.

체제 변혁의 출발점

  • 홍경래의 난은 단순한 계급적 저항이 아니라 체제 변혁의 출발점으로 해석된다.
  • 중세 사회의 극복에 중요한 단계를 이룩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 정주성 항쟁 시기를 강조하는 이들은 이를 '평안도 농민 항쟁', '평안도 농민 전쟁', **'홍경래의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봉기군이 단순한 폭도가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로, 정주성을 함락한 관군이 성 내의 향교, 사당, 관아 등이 거의 멀쩡하게 보존된 것을 발견하였다.

농민 항쟁의 성장

  • 농민들의 능동성이 증가하면서 백성이 형성되는 초보적인 단계를 경험하였다.
  • 신분제에 대한 의식의 성장은 농민 항쟁의 수준을 더욱 높였다.
  •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는 군사력과 봉기 이념에 한계가 있었으나, 대규모 항쟁을 주도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
  • 농민 항쟁의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사회적 변화의 가능성이 커졌다.

봉건적 사회 모순의 한계

  • 홍경래의 난은 봉건적 사회 모순을 극복하려는 진보적 사회 이념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 반란에 가담한 자들은 주로 향임이나 상인들이었으며, 하층민도 가담하였으나 주도층은 향임이었다.
  • 반란군이 점령한 고을들은 수령만 바뀌었을 뿐, 지배질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 홍경래는 삼남 지방의 농민 항쟁과 연대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봉쇄하였다.

외세의 지원 요청과 실패

  • 항쟁 말기에는 청나라 세력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등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위험성이 있었다.
  • 청에 병사 파견을 요청하는 등의 실질적 행동은 없었으나, "호병이 올 것"이라는 말이 난 초기부터 있었다.
  • 호병은 청나라 군대를 지칭하기보다는 정통성을 주장하는 명분상의 표현이었다.
  • 만약 청에 특사를 보내는데 성공했더라도, 조선왕조가 청의 질서에 이미 순응한 상황에서 반란군을 지원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였다.

전술적 한계와 병력 문제

  • 홍경래의 난은 전술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 가용 병력이 너무 적었으며, 초기 병력 1,000명이 정주성에서 5,000명으로 늘어났으나 훈련이 부족하였다.
  • 반군은 점령한 고을마다 최소한의 병력을 주둔시켜야 했기에, 반군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 반란 초기의 기습으로 승승장구하였으나, 조선 정규군의 수준을 과소평가하였다.

전략적 실패와 내분

  • 홍경래와 수뇌부들은 군사를 이끌어 본 경험이 없었으며, 이로 인해 전략적 실패가 발생하였다.
  •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고, 김대린의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이어졌다.
  • 반란군은 중요한 고을을 공격하지 못하고 지방군에게 패퇴하였다.
  • 이러한 문제들은 반란의 실패로 이어지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홍경래의 난의 사회적 영향

  • 홍경래의 난은 규모 면에서 조위총의 난이나 김헌창의 난보다 작았으나, 사회적인 영향력은 매우 컸다.
  • 이 난은 3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40여 개의 성이 호응하였다.
  • 사회적 영향력이란, 난이 단순한 규모를 넘어 백성들의 인식과 행동에 미친 영향을 의미한다.

저항의 상징으로서 홍경래

  • 난이 진압된 이후, 홍경래 저항과 변혁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 소문이 퍼져, "죽지 않고 하늘을 날아서 성을 빠져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 많은 사람들이 **"홍경래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며 백성 봉기를 선동하였다.
  • 이는 홍경래의 난이 단순한 봉기가 아니라, 상징적인 저항의 의미를 지닌 사건임을 나타낸다.

정감록과 농민 봉기

  • 홍경래의 난 조선 후기에 등장한 정감록을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농민 봉기였다.
  • 정감록은 당시 사회에서 예언서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 이 난은 농민들의 저항을 조직화하고, 사회적 불만을 표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주도에서의 영향

  • 홍경래의 난 서북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 1813년, 제주도 목사로 부임한 김수기 탐관오리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해녀들에게 전복을 잡아오라고 강요하였다.
  • 김수기는 해녀들을 폭행하며, 그들의 저항을 무시하였다.

제주도 백성의 봉기

  • 제주 백성들은 홍경래의 난 소식을 듣고, 양제해를 목사로 세우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다.
  • 양제해는 존경받는 토착 호족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 제주 감영의 병력이 적어, 수백 명의 백성들이 김수기를 끌어내렸다.

김수기의 폭압과 결과

  • 김수기는 양제해와의 약속을 어기고 즉시 그를 체포하였다.
  • 조정에 양제해의 처벌을 요청하는 보고가 올라갔다.
  • 이 사건은 제주도의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양제해의 처형과 여파

  • 양제해는 탈옥 후 다시 붙잡혀 옥사하였고, 그의 아들 일회 참형에 처해졌다.
  • 강필방, 김익강, 양인복, 김창서 등은 절도에 안치되었다.
  • 이 사건은 제주도 내에서의 사회적 불만 저항의 상징으로 남았다.

조정의 대응과 민심 회복

  • 조정은 사건의 실정을 인정하고, 도민선무에 힘쓰기로 하였다.
  • 전 목사 이현택 탐욕과 불법으로 민원을 초래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 후임 목사 허명은 해녀들의 조합비 수세를 폐지하고, 채무를 탕감하여 민심을 다잡았다.

1817년 쿠데타 시도

  • 1817년, 김맹억의 집에서 안유겸, 채수영, 김계호, 박충준, 신성문이 모여 쿠데타를 계획하였다.
  • 이들은 보부상으로 위장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 그러나 박충준의 변절로 인해 쿠데타는 실패하였고, 공모자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가짜 홍경래 사건

  • 가짜 홍경래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선천에 살던 학승이 홍경래를 사칭하였다.
  • 그는 "나는 죽었다고 알려졌던 홍경래"라고 주장하며 소문을 퍼뜨렸다.
  • 이 사건은 여론을 혼란스럽게 하였고, 결국 학승은 처형되었다.

학승의 사칭과 처벌

  • 학승 김진서를 속여 자신의 수하로 삼았다.
  • 그러나 그의 사칭이 드러나면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 김진서는 선처를 받아 귀양가는 정도로 그쳤다.
  • 조정은 부임하는 수령들에게 회산 지방을 잘 다스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홍경래와 임상옥의 관계

  • 임상옥은 조선 제일의 거상으로, 상권의 주도를 잡고 있는 인물이다.
  • 홍경래는 임상옥을 포섭하려고 시도했으나, 임상옥의 통찰력으로 인해 그 시도가 무산되었다.
  • 홍경래는 수행자 겸 일꾼으로 위장취업하여 임상옥의 호감을 얻으려 했다.
  • 이러한 회유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는 임상옥의 예리한 판단 덕분이다.

홍경래의 난과 관군의 대응

  •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임상옥은 관군을 지원하는 입장에 섰다.
  • 만약 홍경래의 난이 성공할 경우, 조선팔도의 백성들이 부작용의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 임상옥은 난을 저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관군을 지원하였다.

최연홍의 의기와 포상

  • 최연홍은 홍경래에게 항복하지 않은 가산군수 정시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다.
  • 난이 진압된 후, 최연홍은 **의기(義妓)**로 칭송받고 면천되는 포상을 받았다.
  • 그녀는 지역 기생들에게 **'운낭자'**로 불리며, 논개, 계월향과 같은 위대한 선배 기생으로 추앙받았다.
  • 고종 시대의 어진화사 채용신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반란군에 대한 처벌과 보상

  • 정시와 같은 인물들은 사후 병조판서에 추서되었으나, 도망치거나 투항한 수령들은 더 큰 벌을 받았다.
  • 정주목사 이근주는 반란군의 침입에 도망쳐 전라도 장성으로 유배되었다.
  • 철산부사 이장겸은 항복 후 반란군에게 협조한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 김익순은 반군에 제일 먼저 투항한 후, 반란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관군에게 용서받으려 했으나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김익순의 투항과 후손

  • 김익순의 손자는 김삿갓으로 잘 알려진 김병연이다.
  • 김병연은 평생 삿갓을 쓰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할아버지인 김익순이다.
  • 김익순은 오랫동안 **죄적(범죄자 명부)**에 적혀 있었으나, 1907년 11월에 복권되었다.
  • 1908년 1월, 이완용 등의 건의로 작위와 시호가 회복되었고, 최종적으로 1908년 4월 30일에 죄적에서 삭제되었다.

유정양과 다른 수령들의 운명

  • 태천현감 유정양은 반군이 오자 영변으로 도망간 죄로 파직되었다.
  • 이후 도주에 대한 건이 정상참작되어 재등용되었으나, 1818년에 난이 평정된 후 무고한 사람을 잡아들여 도륙한 사실이 발각되어 유배되었다.
  • 몇몇 수령들은 정상참작 또는 공을 세워 처벌을 면했다.
    • 곽산군수 이영식은 고을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송림 전투에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처벌받지 않았다.
    • 박천군수 임성고는 반란군이 노모를 인질로 잡아 어쩔 수 없이 항복한 점이 참작되어 무죄 방면되었다.

홍경래의 난에 대한 역사적 평가

  • 북한 조선력사에서는 홍경래의 난을 **'평안도 농민전쟁'**이라 부르며, 조선 후기 최대 규모의 민중항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 이 난은 임술농민폭동 갑오농민전쟁 이전의 사건으로, 역사적 중요성이 크다.
  • 홍경래의 난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홍경래의 가족과 후손

  • 홍경래의 아내는 처형당한 것이 맞으나, 아들들이 처형당했다는 기록은 없다.
  • 아들들이 난이 진압된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홍기조가 홍경래의 자손이라는 설이 있다.

위키백과의 정보

  • 위키백과에서는 홍경래의 난에 관하여 한국어 문서 이외에 태국어 문서가 존재한다.
  • 이는 홍경래의 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나타내는 사례로 볼 수 있다.

홍경래의 난과 만화

  • 윤승운 화백의 만화: 만화 맹꽁이 서당의 8권에서 홍경래의 난을 다루고 있다.
  • 주요 내용: 홍경래의 어린 시절부터 비범함을 보인 과정과 난을 지휘하며 죽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죽은 후의 영향까지 모두 포함된다.
  • 주인공: 홍경래는 8권 전반부의 주인공으로, 그의 난이 후반부의 주인공인 김삿갓 김병연의 방랑의 계기를 제공한다.
  • 다복동의 등장: 홍경래의 난의 발상지인 다복동이 김삿갓의 방랑길에 등장하며, 이곳에서 김병연이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통곡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홍경래의 영향력과 방랑

  • 홍경래의 영향력: 홍경래는 전체적으로 8권 내내 영향력과 존재감을 드러낸다.
  • 김삿갓과의 연결: 김병연이 홍경래 난리 때 극형당한 김익순의 손자임을 밝히며, 지역 사람들은 슬픔을 다시금 상기한다.
  • 방랑의 의미: 김병연의 방랑은 홍경래의 난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이는 후반부의 주제와 연결된다.
  • 슬픔의 재현: 지역 사람들은 김병연의 통곡을 통해 당시의 슬픔을 다시 느끼며, 그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한다.

 

반란군 모집 과정

  • 사람들 모집: 홍경래는 이희저, 우군칙, 홍총각, 김사용, 김창시 등 각자의 사연이 있는 이들을 언변과 기개로 설득하여 지휘부로 영입하였다.
  • 모집 방법: 백성들을 합류시키기 위해 대정강 일대에 금점판이라는 소문을 내어 많은 유랑민들이 몰려오도록 하였다.
  • 유인된 장소: 사람들이 주운 엽전과 금싸라기가 널려 있는 다복동에서 유민들은 의식주를 제공받고 반란에 힘을 보탰다.
  • 길의 명칭: 후세 사람들은 이렇게 사람들을 끌어들인 길을 '금싸라기 길' 또는 **'엽전 길'**이라고 불렀다.

 

반란에 필요한 자원

  • 물자와 자금력: 반란에 쓰인 물자와 반란군의 물주인 갑부 이희저의 자금력에 대한 이야기가 다뤄진다.
  • 군량미: 관군이 정주성의 반란군을 소탕하는 데 걸린 4개월 동안 사용된 군량미는 56,000섬에 달한다.
  • 기타 자원: 사용된 자원으로는 각종 잡곡 5,700섬, 간장 388섬, 소금 248섬, 잡아먹은 소 161마리, 백성들이 거둔 성금 14,500냥 등이 있다.
  • 자금의 가치: 이희저가 댄 돈은 현재 가치로 수백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소설과 드라마의 재구성

  • 소설 및 드라마: 소설 및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상도에서 홍경래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 임상옥의 역할: 임상옥은 자신의 재주와 자금력을 홍경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만상의 서기로 위장 취업하였으나, 스승의 교훈으로 가담을 거절한다.
  • 의주 방어: 임상옥은 의주를 홍경래 군대로부터 지키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하였다.
  • 소설의 결말: 소설에서는 임상옥이 이 일에 연루되어 사실상 은퇴하게 되는 내용이 포함된다.

홍경래의 난을 다룬 작품들

  • 만화 작품: 강철수 작가의 만화 민중 속의 혁명아가 홍경래의 난을 다룬 작품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작이다.
  • 주인공의 이야기: 주인공 홍경래는 여자친구인 달래를 사또에게 빼앗기고, 과거시험에 도전하지만 부정 행위와 차별로 불합격된다.
  • 동료 모집: 임꺽정 관련 픽션처럼 동료들을 모으는 과정이 길게 그려진다.
  • 비장한 결말: 결말에서 홍경래는 관군의 공격을 받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현대 매체에서의 재조명

  • 봉이 김선달: 2016년부터 다음에서 연재되는 봉이 김선달에서도 홍경래의 이야기가 다뤄진다.
  • 김선달의 제자: 김선달의 제자가 홍경래 군에 가담하며, 김선달의 일가와 임상옥 등이 말려드는 내용이 포함된다.
  •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주인공 홍라온이 홍경래의 여식으로 설정되어 남장을 하며 몸을 숨기는 장면이 있다.
  • 유튜브 콘텐츠: 유튜브 콘텐츠 '화력조선' 시리즈에서 홍경래의 난 후기의 정주성 전투를 다루고 있다.

대체역사물의 설정

  • 조선혁명 1812: 대체역사물 **'조선혁명 1812'**의 스타팅 시점으로, 군부대가 운석을 맞고 타임슬립하여 1812년으로 오게 된다.
  • 역사적 변화: 홍경래의 난 시점임을 알고 군부대가 홍경래의 반란군을 도와 관군을 쓸어버리는 것으로 역사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 장정들의 흡수: 홍경래의 반란군과 행군로에 있던 장정들을 흡수하여 도성을 강습하는 내용이 포함된다.
  • 순조의 인질: 반란군은 순조를 인질로 삼는데 성공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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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과 마적단: 역사 속의 두 얼굴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립군과 그와 대치했던 마적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해요. 이 두 집단은 한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각각의 독특한 배경과 의미를 지니고 있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독립군은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군대라고 할 수 있어요. 이들은 주로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며, 다양한 전투와 작전을 통해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했답니다. 이들은 불굴의 의지로 무장 투쟁을 이어갔고, 많은 사람들이 독립의 희망을 품게 했죠. 특히, 3.1 운동 이후 독립군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어요. 그러던 중에 일본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독립군은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답니다.

마적단의 출현

마적단은 독립군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장 집단이에요. 이들은 일본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 다양한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았죠.

독립군 잡는 '마적', 일제강점기의 또다른 풍경

 

 

마적단의 존재는 당시 사회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겼답니다. 그들은 주로 재산을 빼앗거나 폭력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위협했어요. 특히, 1920년대의 훈춘 사건은 이들이 얼마나 큰 위협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랍니다.

훈춘 사건

훈춘 사건은 1920년 9월에 발생한 사건으로, 마적단이 훈춘을 습격한 것이에요. 일본 제국의 지휘 아래에서 마적단은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이 사건을 일으켰답니다. 이 사건은 일본 영사관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초래했죠.

 

훈춘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독립군을 향한 일본의 탄압을 더욱 정당화하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독립군과 마적단의 관계

독립군과 마적단의 관계는 매우 복잡했어요. 독립군은 민족의 자주성을 위해 싸웠지만, 마적단은 그들의 길을 막기 위해 일본의 편에 서서 활동했죠. 두 집단은 서로 충돌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독립군은 더욱 강력한 저항 의지를 다지게 되었답니다. 하지만 마적단의 존재는 독립군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겼고, 수많은 전투에서 피해를 입기도 했어요.

독립군 마적단
일제3 항일무장투쟁 독립운동

 

독립군은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마적단의 공격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답니다.

마적단의 사회적 영향

마적단이 활동하던 시기는 한국 사회에 큰 혼란을 야기했어요. 이들은 단순히 폭력적인 행동만을 일삼은 것이 아니라, 민간인들에게도 큰 피해를 주었죠. 많은 사람들이 마적단으로 인해 고통받았고, 이는 독립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와 연대감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마적단의 존재는 결국 독립군이 단결하고 더욱 강한 의지를 다지도록 만드는 촉매제가 되었죠.이런 복잡한 관계 속에서 독립군은 결국 민족 해방을 위한 길을 걸어야 했어요. 독립군의 희생과 노력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기초가 되었답니다.

 

독립군과 마적단의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만이 아닌, 현재에도 여전히 많은 교훈을 주고 있어요.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잊지 않고, 다음 세대에 전해줄 책임이 있답니다. 마지막으로 마적단과 독립군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이처럼 독립군과 마적단은 역사 속에서 서로 다른 입장과 태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그들의 활동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여러분, 오늘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면 좋겠어요! 다음에 또 다른 주제로 돌아올게요. 그럼 안녕!

 


훈춘 사건 개요

  • 훈춘 사건은 1920년 9월에 발생한 사건으로, 만주 무장 독립군을 탄압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단이 훈춘(琿春)을 습격한 사건이다.
  • 이 사건은 일본 제국의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발생하였다.

사건 배경

  • 1919년부터 1920년에 걸쳐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 조선 총독부와 조선주둔군은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 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워 독립군을 대대적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 그러나 뚜렷한 명분 없이 군사 행동을 하는 것은 외교적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일본은 훈춘 사건을 통해 군사 행동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제1차 훈춘 사건

  • 훈춘 사건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으며, 모두 일본의 사주를 받은 마적단의 소행이었다.
  • 제1차 훈춘 사건은 1920년 9월 12일 오전 5시경에 발생하였다.
    • 마적 300여 명이 약 3시간에 걸쳐 훈춘 시가를 습격하였다.
    • 이들은 약탈과 방화를 하였고, 인질을 사로잡아 동쪽으로 빠져 나갔다.

 

제2차 훈춘 사건

  • 제2차 훈춘 사건은 1920년 10월 2일에 발생하였다.
    • 마적단은 훈춘을 다시 습격하여 일본 영사관을 불태우고 일본인 거류지를 공격하였다.
  • 일본군은 훈춘을 공격한 마적단 속에 **‘불령선인’과 ‘러시아 과격파’**가 포함되어 있다고 강조하였다.
    •  
    • 이는 마적단이 단순한 범죄 집단이 아니라 정치적인 집단이라는 주장을 통해 일본군의 군사 행동 명분을 만들고자 하였다.

 

일본군의 군사 행동

  • 1920년 10월 7일, 일본 내각은 **‘제국신민의 보호’**를 명분으로 일본군의 파견을 결정하였다.
  • 일본군은 훈춘 및 간도 지방에 있는 독립군을 **‘소탕’**할 것을 명령하였다.
  • 이에 따라 약 2만여 명의 일본군이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훈춘 사건의 결과

  • 일본군은 독립운동의 기반을 완전히 말살하기 위해 수천 명의 한인들을 살해하고, 수천여 호의 가옥을 불태우는 등 한인 거주지를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단독]오늘 3·1절… '1920년 경신참변' 새로운 사진들 공개
  • 이 사건은 간도 참변 또는 경신참변으로도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의 피해

  • 훈춘 사건으로 인해 1919년 3⋅1 운동 이후 키워진 독립 역량이 크게 손상되었다.
  • 독립군 부대들은 북만주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이는 독립운동의 지속 가능성에 큰 타격을 주었다.

훈춘 사건 추가 요약

훈춘 사건의 배경

  • 훈춘은 두만강 국경에서 약 5km 떨어진 지역이다.
  • 1920년 오늘, 훈춘사건이 발발하였다.
  • 이 사건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내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동북아 정세와 독립운동

  • 1918~20년 동북아 정세는 해방 직후의 한반도 정세와 유사하게 급박한 상황이었다.
  •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의회 연두교서에서 제시된 민족자결주의는 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이로 인해 일본과 중국, 러시아의 독립운동가와 청년들이 고무되었다.
  • 3ㆍ1운동과 같은 대규모 독립운동이 이 시기에 발생하였다.

조선의 독립운동과 국제적 흐름

  • 2ㆍ8독립운동은 일본 도쿄에서 시작되었고, 한 달 뒤 3ㆍ1운동이 한반도 전역에서 발생하였다.
  • 35년 일제 치하의 조선 독립 열기가 가장 뜨거운 시기였으며, 중국의 5ㆍ4운동, 인도의 반영운동, 베트남과 필리핀의 독립운동도 활발하였다.
  • 이러한 국제적 흐름은 조선의 독립운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국 북간도의 독립운동

  • 조선과 국경을 맞댄 중국 북간도에서 한인 무장독립운동 세력들이 전력을 보충하고 전열을 가다듬은 시기였다.
  • 1920년 당시 독립군 무장부대의 병력은 약 3만 명에 달하였다.
  • 조선총독부는 국내 통치 기조를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하였으나, 해외 무장세력에 대해서는 강경 토벌 작전을 실시하였다.

훈춘 사건의 발생

  • 훈춘 사건은 1920년 9월 12일 10월 2일에 발생하였다.
  • 마적단이 훈춘 시가를 습격하여 중국인과 조선인을 살해하고 약탈 및 방화를 하였다.
  • 특히, 두 번째 약탈에서는 일본 영사관을 불태우고 일본인 거류지까지 공격하였다.

일본의 반응과 간도 참변

  • 사건 발생 일주일 후, 일본군은 **‘제국신민 보호’**를 명분으로 간도 일대에서 조선인 약 3,500명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 이 사건은 ‘간도 참변’(20.10.9~11.5)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의 강경한 대응을 보여준다.

훈춘 사건의 주체와 논란

  • 훈춘 사건의 주체와 배후에 대한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 일제의 자작극이라는 설이 우세하지만, 항일 성향의 중국 자위부대와 일부 독립군이 개입했다는 주장도 있다.
  • 이러한 논란은 사건의 복잡한 배경 다양한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태그

#독립군 #마적단 #훈춘사건 #한국역사 #일제강점기 #역사속의이야기 #민족의자주성

이런 자료를 참고 했어요.

[1] 우리역사넷 - 훈춘 사건 -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tg/view.do?subjectCode=tg_ty_040&tabId=02&levelId=tg_004_2150&ganada=&pageUnit=10)

[2] 나무위키 - 훈춘 사건 (https://namu.wiki/w/%ED%9B%88%EC%B6%98%20%EC%82%AC%EA%B1%B4)

[3] 우리역사넷 - (1) 일본군의 간도 침공 -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8_0040_0020_0020_0010)

[4] 오마이스타 - 독립군 잡는 '마적', 일제강점기의 또다른 풍경 - 오마이스타 (https://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965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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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의 역사적 배경

간도는 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과거에는 조선의 영토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1900년대 초반,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중국의 영향으로 인해 간도는 한국의 손을 떠나게 되었죠. 이 지역은 한국과 중국의 경계에 위치해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많은 갈등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간도는 단순한 지리적 위치를 넘어, 한국 민족의 정체성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 지역입니다.

 

 

간도의 위치와 지리적 중요성

간도는 현재 중국의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에 걸쳐 있는 지역으로, 한국과의 근접성 덕분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이 지역은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역사적으로도 무역과 문화 교류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간도 지역은 농업과 자원 개발에 있어서도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 한국의 경제적 이익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고토 회복의 필요성

고토 회복은 단순히 영토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한국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은 간도를 고향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고, 이 지역의 회복은 민족적 자존심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간도의 회복은 한국의 역사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고토 회복은 단순한 정치적 이슈가 아닌, 문화적, 역사적 이슈로도 다뤄져야 합니다.

 

간도 영토론의 현재 상황

현재 간도 영토론은 한국 내에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합니다. 일부는 간도의 회복을 강력히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일부는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여 신중한 접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국제 사회에서의 외교적 관계와 중국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많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간도 영토론은 계속해서 논의되고 있으며, 한국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북방영토 전문가들의 의견

최근 북방영토 전문가들은 간도 회복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간도가 한국의 역사적 영토임을 주장하며, 이를 회복하기 위한 국제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특히,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성을 위해서도 간도의 회복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간도 회복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간도 회복을 위한 국제적 노력

간도 회복을 위한 노력은 단순히 한국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국제 사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다양한 학술 대회와 세미나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노력은 간도의 역사적 중요성을 알리고, 한국의 입장을 국제 사회에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노력은 한국과 중국 간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

간도의 회복은 단순한 영토 문제를 넘어, 한국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적 정당성을 회복하는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지역의 회복은 한국의 미래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간도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높아질수록, 이 지역의 회복 가능성도 더욱 커질 것입니다. 앞으로도 간도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view6980 생각)

찾아야할 우리땅

만주+ 요동+ 요서+ 산동 + 텐진일대 + 연해주+ 알파( 청도,상하이,난징...)

 

 


태그: #간도 #고토회복 #역사 #영토문제 #북방영토 #동북아시아 #한국역사 #간도영토론

이런 자료를 참고 했어요.

[1] 나무위키 - 간도영토론 (https://namu.wiki/w/%EA%B0%84%EB%8F%84%EC%98%81%ED%86%A0%EB%A1%A0)

[2] 천지일보 - 북방영토 전문가들 “동북아 평화 '만주복국·간도회복' 동반 ... (https://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3033232)

[3] KCI - 17·18세기 조선에서 '만주=故土' 의식의 출현과 전개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904200)

[4] TOP시사뉴스 - 고토회복은 과연 가능한가? (http://www.sisa.news/1120)

 

출처: https://view6980.tistory.com/293 [view6980 님의 블로그: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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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과 시베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게요. 고려인은 1930년대에 소련 극동 지역에서 살던 한국인들로,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그들의 강제이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려인의 역사, 문화, 현재 상황까지 살펴볼 수 있을 거예요.

먼저, 고려인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19세기 중반부터 한국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했어요. 이들은 주로 농업을 위해 이주했으며, 이후 시베리아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답니다. 이 시기에 고려인은 현지 농업과 경제에 큰 기여를 하였고, 그 숫자는 점점 증가했어요. 

 

 

 

그런데 1937년, 스탈린 정부의 명령으로 약 172,000명의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어요. 이는 단순한 이주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떠나야 했던 비극적인 사건으로 여겨져요. 많은 사람들이 이주 과정에서 가족과 친구를 잃었고, 새로운 땅에서 힘든 삶을 시작해야 했답니다.

 

이렇게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 특히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지로 분산되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기도 했어요. 이주 이후에도 많은 고려인은 한국의 문화와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 했고, 그들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애썼답니다.

 

지금은 고려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한국과의 연결 고리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문화 활동을 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고려인들은 한국어 교육, 전통 음식 및 음악을 보존하고, 한국과의 교류를 통해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또한, 이들은 한국과 중앙아시아 간의 문화적 다리 역할을 하며,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데 기여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고려인들이 직면한 문제들도 많아요. 정체성의 혼란, 사회적 차별, 경제적 어려움 등 여러 가지 도전과제가 존재하고 있어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며, 한국 정부와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지원해야 할 시점이에요.

 

결국, 고려인의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져야 해요. 그들의 강제 이주와 문화적 정체성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저항과 적응의 이야기를 배우고, 서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이렇게 고려인과 시베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고 지켜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어요. 앞으로도 고려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잘 지키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고려인 #시베리아 #강제이주 #디아스포라 #한국문화 #정체성 #역사

 

이런 자료를 참고 했어요.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고려인 강제이주(高麗人 强制移住)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274)

[2] Wikipedia - 고려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B%A0%A4%EC%9D%B8)

[3] 네이버 블로그 - [동북아역사재단] 고려인 디아스포라 80주년 시베리아 횡단기 (https://m.blog.naver.com/correctasia/221115365761)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고려인(高麗人)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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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2일 (화) 오후 8:26

 

 

😊 녹둔도에 대한 리뷰 포스트

 

안녕하세요! 오늘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인 녹둔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녹둔도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전투로 유명한 곳이죠. 그럼 지금부터 녹둔도의 역사적 배경부터 시작해볼게요.

 

녹둔도는 한반도의 북쪽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난 곳이에요. 특히 1587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과 여진족 간의 전투가 있었던 장소로 유명하죠. 이 전투는 조선의 국방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순신 장군의 군사적 역량을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당시 이순신은 변방의 하급 무관에 불과했지만, 그의 전략과 용기는 후에 그를 역사적인 인물로 만들어주었답니다.

 

 


녹둔도는 초기에 ‘사차마(莎次痲), 사차(莎次), 사혈(莎穴), 사혈마(莎穴魔)’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 세종 때 6진(六鎭) 개척 이후 조선에 편입되었다. 녹둔도라는 명칭은 ‘사슴이 모여 사는 언덕처럼 생긴 섬’이란 뜻으로 세조 원년인 1445년 <세종실록지리지>에 처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도 나와 있다. 1735년에 제작한 것으로 서양의 고지도 중 가장 객관적이고 정확한 한국지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조선왕국전도>에도 녹둔도가 한국 땅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이후 제작된 대부분이 지도 역시 녹둔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하고 있다.

녹둔도는 함경북도 선봉군(先鋒郡) 조산리(造山里)에서 약 4㎞ 거리에 있는 섬으로 두만강 하류의 하구 중심에 있다. 동쪽으로는 두만강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이 위치하고 러시아 연해주 최남단 도시인 핫산(khasan)에서 남쪽으로 7㎞ 지점에 있다. 일본인 쓰네야가 쓴 <조선개화사>에는 “두만강구의 삼각주인 ‘녹도’(鹿島) 또는 ‘녹둔도’라 칭하는 섬이 있어 경흥부에서 동남으로 70리, 조산보에서 10리, 러시아령 포시에트(Posiet)에서 91리, 연추까지는 100리로 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과 녹둔도 전투

녹둔도 전투는 이순신 장군의 첫 번째 백의종군으로 알려져 있어요.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병마절도사 이일에게 군사의 보강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여진족과 맞서 싸웠어요. 이 전투는 조선의 국방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순신 장군의 전투 전략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에요.

이순신의 첫 번째 백의종군-녹둔도 전투
녹둔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승전 기념비

선조 때 정언신은 녹둔도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였고, 백두산정계비 건립시 접반사 박권도 “경원에 야인의 소란이 있은 후 군량미 저축이 긴요해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 부사로 하여금 경작에 힘쓰나 경작력이 점점 떨어져 어렵다”고 하였다.

조선 성종 17년(1486년) 2월에는 홍문관 전한인이 녹둔도에 대해 “만일 적이 침략해 오면 무엇으로 막아낼 것이며, 큰물이 밀어닥치면 섬 전체가 침몰할 듯하니 농민들이 여기에 상주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실정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선조 20년(1587년)에는 “오량캐들의 노략질이 심하고 녹둔도가 오랑캐 땅 인근에 있어 방어에 적절한 인물을 엄선해 보내야 한다”면서 이 해 8월에 이순신을 녹둔도 둔전관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9월에 북호가 침입하여 ‘녹둔도전투’가 일어났다. 불시에 기습한 그들은 조선측 수호장 오형과 감관 임경번 등 11명을 죽이고 군민 160명을 납치하고, 말 15필을 약탈해 갔다.

이에 이순신의 처형이 거론되는 가운데 경원부사 이경록과 함께 추격하여 적호 3명을 참살하고, 조선인 50~60여 명을 탈환한 공로를 인정받고, 이듬해 여진 토벌을 위한 반격에 나서 여진 부락 200여 호를 불태우고 380명을 죽였으며, 말 9필, 소 20두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려 사면을 받게 되었다.


1883년 서북경략사 어윤중이 녹둔도에 갔다 와서 고종에게 보고한 자료는 “녹둔도는 본래 우리 땅입니다. 신이 조산에 가서 땅 모양새를 살펴보니 섬 동쪽에 모래가 쌓여서 러시아와 연결되어 있고,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우리 백성들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113가구에 822명의 조선 사람이 살고 있다”는 내용을 <아국여지도>에 새겨 넣었다. 이처럼 6진개척 이래 녹둔도에 대한 조선의 관리는 지속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조 이후 경작지 및 변방 방어기지로 관리하고 있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백의종군에서 명예회복까지…이순신의 여진족 토벌

 

 

이순신 장군은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고, 이는 그가 후에 더 큰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어요. 만약 이 전투에서 패배했다면, 그의 경력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르죠. 이순신 장군의 승리는 그가 역사에 남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답니다.

 

현재 녹둔도의 상황

현재 녹둔도는 조용한 섬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어요. 이곳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함께 역사적인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어, 역사 애호가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장소랍니다. 녹둔도를 방문하면 이순신 장군의 전투를 기념하는 기념비와 함께, 당시의 역사적 사건들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요.

 

 

녹둔도 록둔도 | 鹿屯島 | Nokdundo

소속 러시아 행정구 속령 극동 연방관구 프리모리예 지방 하산스키 군
위치 동경 130°41′ 북위 42°20′
면적 약 32~400km²[1]
쾨펜의 기후 구분 냉대 동계 건조 기후(Dwa)

녹둔도의 크기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략 남북으로 28㎞, 동서로 12㎞ 정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면적은 32㎢ 정도이다. <동국여지도>에 의하면 ‘남북 70리 동서 30리’라고 되어 있고, 1884년 12월초 고종이 권동수, 김용원 등을 밀파해 연해주 일대의 군사시설과 우리 교포들의 실상과 녹둔도에 대해 탐지하고 작성한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에도 남북이 70리, 동서 30리로 나와 있다.

지형은 평지로 섬 가운데는 산은 없고 조산보 강안에서 바라보면 수면상에서 10척 정도의 높이로 수목은 별로 없으며, 가옥은 한식으로 되어 있었다. 녹둔도는 두만강의 하천도서였기 때문에 상주(常住)가 금지되어 농민들이 배로 오가며 사토(沙土)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다. 우리가 개척한 땅이다.


조선의 농민들이 온갖 고난을 극복하면서 녹둔도를 개간하자 호전적인 여진족들이 불시에 두만강을 건너와 물자를 약탈하였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조선 정부에서는 녹둔도에 1246자의 토성을 쌓고, 높이 6자의 목책을 둘러 병사들을 배치해 방비하였다.

 

Board > 자유게시판 > 우리들이 모르는 영토 녹둔도
두 강대국의 밀약으로 러시아에 빼앗긴 우리섬 녹둔도

녹둔도의 문화유산

녹둔도에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있어요. 특히, 이순신 장군의 전투를 기념하는 기념비와 함께, 당시의 전투를 재현한 전시물들이 있어요. 이러한 유산들은 후손들에게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답니다.

 

이순신의 전투 장면을 담은 그림
이순신 (忠武公 李舜臣)| Yi Sun-sin

녹둔도를 방문하는 방법

녹둔도를 방문하고 싶다면, 먼저 인근 도시에서 배를 타고 가는 방법이 가장 일반적이에요. 배를 타고 가는 동안 아름다운 바다 경치를 감상할 수 있어요. 또한, 섬에 도착하면 다양한 관광 코스가 마련되어 있어, 역사적인 장소를 둘러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답니다.

마무리 및 개인적인 소감

녹둔도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예요. 이순신 장군의 전투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그가 남긴 유산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되새길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녹둔도를 방문하면서 역사와 자연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 정말 좋았어요. 여러분도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방문해보세요!


러시아에게 넘어간 조선의 영토


태그: #녹둔도 #이순신 #역사 #전투 #문화유산 #관광지 #한국역사 #여행

이런 자료를 참고 했어요.

 

[1] 국가유산청 - 이순신 장군의 첫 백의종군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jsessionid=lya6ZnENUCmhPyhvvGFM2YY9ef1ciGLtHihQKTmNW1CQGUZNpSxta2p2pr5CsYUY.cha-was02_servlet_engine1?nttId=79829&bbsId=BBSMSTR_1008&pageUnit=0&searchtitle=&searchcont=&searchkey=&searchwriter=&searchWrd=&ctgryLrcls=&ctgryMdcls=&ctgrySmcls=&ntcStartDt=&ntcEndDt=&mn=NS_01_09_01)

[2] 우리역사넷 - 녹둔도사건 1587 -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302010&code=kc_age_30)

[3] KBS 뉴스 - 녹둔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승전 기념비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146191)

[4] 나무위키 - 이순신 (https://namu.wiki/w/%EC%9D%B4%EC%88%9C%EC%8B%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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