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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6일 (화) 오후 6:41

포르투갈 제국의 개요

  • 포르투갈 제국은 포르투갈이 해외 식민지 및 후일 해외 영토를 지배하면서 존재했던 식민 제국이다.
  • 존속 기간: 1415년 북아프리카의 세우타 정복부터 1999년 마카오 반환까지 약 6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 유럽사에서의 위치: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식민제국으로 평가받고 있다.
  • 지배 범위:
    • 북아메리카: 캐나다
    • 남아메리카: 브라질
    •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 인도: 고아
    • 아시아: 말라카, 티모르, 마카오
    • 오세아니아: 도서 지역

역사


포르투갈 제국은 1430년대부터 해외영토를 가져 15세기~16세기에 브라질과 아프리카 등에 많은 식민지를 두었다. 19세기 이후 쇠퇴의 길을 걸어 2002년 현재의 포르투갈이 되어 있다.

주요 연표


1415년 - 북아프리카에서 항구 세우타 점령
1444년 - 카보베르데, 베르데곶, 고레섬에 도달.
1480년 - 포르투갈 제국, 서 아프리카 내륙에서 말리 제국 팀북투에 도달
1482년 - 서아프리카 황금 해안에 요새 건설
1488년 -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희망봉을 회항하다.
1490년 - 앙골라 해안 루안다에 식민 (노예 무역 본사)
1494년 - 토르데시야스 조약
1498년 - 바스쿠 다 가마 함대 인도에서 캘리컷에 도착.


1500년 -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 함대가 인도로 항해 중 브라질에 도착

 

1448년 바스코 다 가마의 캘리컷 도착 이래 연이어 후속 함대를 보냈다. 1500년 3월 8일에는 1000명의 선원과 13척의 대형 군함으로 이루어진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의 함대가 인도로 떠났다. 이들에 의해 캘리컷의 아랍 상인들은 물건은 물론 생명까지 빼앗겼으며, 바다에서 쏘아대는 해상 포격의 위력 앞에 캘리컷의 지배계급도 무릎을 꿇고 말았다. 포르투갈령 인도 제국, 즉 ‘에스타도 다 인디아’의 탄생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1년 후, 포르투갈 배 두 척이 지금의 벨기에 해안에 나타난다. 스헬더 강을 따라 안트베르펜까지 들어온 이 배들은 곧 선창에서 엄청난 양의 향신료를 부려 놓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이 곳에 향신료를 공급하던 베네치아 상인들의 가격보다 훨씬 싼 것은 물론이고, 품질도 훨씬 좋았다. 르네상스 내내 유럽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로 군림하던 베네치아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포르투칼 식민지

 

1505년 - 동아프리카에서 소팔라 및 키루와 요새 건설.
1507년 - 동아프리카의 모잠비크섬 요새 건설.
1508년 - 맘루크 왕조 이집트 함대, 챠우루 떨어져 포르투갈 함대를 깰

중세 이집트의 번영, 이슬람 맘루크 왕조


1509년 - 포르투갈 함대, 디우 앞바다에서 이집트 함대를 격파

동서양 최초의 무역전쟁, 디우해전
디우 전투

1509년 2월3일, 인도 서북부 디우(Diu)지역과 인접한 아라비아해. 포르투갈이 보낸 함대와 인도·이슬람 연합함대가 인도양의 패권을 놓고 승부를 펼쳤다. 외형적인 전력에서 연합함대는 포르투갈을 압도했다. 인도 캘리컷과 구자라트 지방의 술탄과 이집트 맘루크 왕국이 동원한 함선은 100척이 넘었다. 포르투갈이 동원한 전력은 달랑 18척. 병력 수도 5,000여명 대 1,700명(포르투갈 1,300명, 힌두교 코친 지원병 400명)으로 이슬람측이 훨씬 많았다.

이슬람 연합함대는 승리를 굳게 믿었다. 1년 전 차울(Chaul) 해전에서도 기습을 가해 포르투갈 함대를 물리친 승리 경험도 있었다. 이슬람 함대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원은 물론 이탈리아 도시국가인 베네치아 공화국의 기술과 정보까지 넘겨받았다. 결과는 예상을 빗나갔다. 포르투갈은 바다뿐 아니라 간헐적으로 전개된 지상 전투에서도 이슬람 군대를 쉽게 꺾었다. 이슬람은 왜 포르투갈에 졌을까. 무기의 질이 승부를 갈랐다.

무엇보다 포르투갈의 함선 성능이 앞섰다. 포르투갈은 18척 가운데 12척이 대포를 양쪽 측면에 설치할 수 있는 대양항해용 카라크(carrack), 나머지 6척은 카라크보다 작지만 빠른 카라벨(caravel)이었다. 반면 이슬람 연합함대 100척 중에 전투용 함선은 갤리(galley)선 12척에 불과했다. 파도가 낮고 잔잔한 지중해에서 주로 운용되던 갤리선은 노를 저어 항해할 때 빠른 속도를 자랑했으나 대포를 선수에 3~4문 싣는 게 고작. 화력에서 양쪽의 차이가 워낙 컸다.

이슬람 연합함대의 나머지 선박들은 인도양에서 상선으로 쓰던 다우(dhow)선으로 조작하기 쉬운 반면 크기가 작은데다 대포를 적재할 수 없었다. 선박의 한계 탓으로 연합함대의 전술은 단순했다. 갤리선으로 빠르게 적선에 접근해 화살 공격을 퍼붓거나 들이받은 후 선상 백병전을 치르는 방식에 매달렸으나 통하지 않았다. 포르투갈 함선의 높이가 높아 아래에서 위로 쏘는 화살의 위력이 약한 데다 접근하기 전에 대포에 당했다. 군사전문 저술가인 윌리엄 위어의 저서 ‘세상을 바꾼 전쟁’에 따르면 사흘간 이어진 전투에서 포르투갈의 인명 손실은 불과 30명. 반면 이슬람의 사망자는 최소한 1,500명에 이르렀다.

동원된 함선과 병력, 희생자 수만 본다면 디우 해전은 규모가 작은 전투에 속한다. 그럼에도 윌리엄 위어는 디우 해전을 ‘세계를 바꾼 50개 전투’의 하나로 꼽았다. 동서양 교류와 경제사 측면에서 보자면 디우 해전의 의의는 더욱 깊다. 동양과 서양이 맞붙었던 그 어떤 전쟁보다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니까. 레판토해전(1571·유럽 기독교국가들의 신성동맹 함대가 오스만투르크 함대를 격파한 해전)보다 디우 해전에 더 무게를 두는 시각이 있을 정도다.

출처 : https://www.sedaily.com/NewsView/1OBY7YGCX5


1510년 -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인도 고아 점령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1511년 - 알부케르크 믈라카 점령
1513년 - 포르투갈 처음 중국 광동에 내항


1515년 - 알부케르크, 페르시아 해안 호르무즈 점령

1517년 - 토메 피르스 사절단 베이징 방문 (이후 투옥)

마카오의 역사적 기원


마카오는 오늘날 세계 최대의 카지노 도시로 알려져 있다.
문화적 교류와 교역의 중심: 마카오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교류와 교역의 중심으로 성장하게 된 기원은 15세기 포르투갈인들의 방문에서 시작된다.


포르투갈의 방문 시기: 1518년 음력 1월 2일(양력 2월 21일)에 포르투갈에서 파견된 20여 명의 사절단이 인도와 믈라카를 경유해 광저우에 도착하였다.


포르투갈 사절단의 첫 방문
사절단의 구성: 포르투갈 사절단은 20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입국 신청: 이들은 광저우에 도착하여 입국을 신청하였다.
역사적 배경: 이 사건은 마카오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사절단의 인솔자와 교역 시도
인솔자: 사절단을 이끈 인솔자는 **토메 피르스(Tomé Pires)**이다.
중국 자료의 기록: 중국 자료에는 그를 **‘가필단말(加必丹末)’**이라고 기록하였다.

 

항해 특권: 이는 포르투갈 국왕이 부여한 항해 특권을 지닌 총독을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카피탕-모르(Capitão-mor)’**의 한어 음역이다.

 

명나라의 교역 거부
명나라의 반응: 명나라의 관리는 새로운 ‘오랑캐’ 포르투갈이 조공의 예법을 모른다고 판단하였다.
교역 허락 거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교역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절단의 어려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절단은 교역을 시도하였으나 어려움을 겪었다.

 

조정의 허락과 베이징 방문
관료들의 요청: 피르스 일행은 광저우 인근에 체류하며 뇌물을 이용해 관료들에게 진입을 요청하였다.
조정의 허락: 결국 1520년 1월, 조정의 허락을 받아 수도 베이징까지 도착하였다.중요한 역사적 사건: 

이 사건은 포르투갈과 중국 간의 관계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조선인 신상의 목격
조선인 신상: 당시 조공 사절로 베이징에 머물던 **신상(申鏛)**은 포르투갈 사절 20여 명을 목격하였다.
거래 내용: 신상은 그들이 금과 은을 많이 가져와 필요한 물건들을 거래하고 있었음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문화적 교류의 증거: 이는 동서양 간의 문화적 교류의 증거로 볼 수 있다.

 

정덕제 황제의 사망
황제의 회동 준비: 포르투갈 사절단의 입경을 허락하고 회동을 준비하던 정덕제 황제는 난징으로의 

순행 중 사고를 당하였다.
사망 원인: 운하에 빠져 감기에 든 것이 원인이 되어 빠르게 사망하였다.
교류의 실패: 황제는 외국 사절들을 초대해 교류를 즐기고자 하였으나, 자기 관리 실패로 공식 회동은 

불발되었다.


마카오 거주 허락과 카지노 개설
거주 허락: 1553년, 포르투갈은 물에 젖은 화물을 말린다는 명분으로 마카오에 정박을 시도하였다.
뇌물 활용: 뇌물을 활용하여 1557년부터 마카오의 거주를 허락받았다.


중요 거점으로 성장: 이때부터 마카오는 유럽과 중국의 교류에서 중요 거점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마카오의 문화적 발전


카지노 도박장 개설: 포르투갈은 1846년 마카오에 카지노 도박장을 처음 개설하였다.
문화적 변화: 이는 마카오의 문화적 변화와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현대 마카오의 기초: 이러한 

사건들은 오늘날 화려한 카지노 도시 마카오의 기초가 되었다.

 

현대 마카오의 모습
카지노 도시의 탄생: 오늘날 화려한 카지노 도시 마카오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문화적 상징: 마카오는 동서양의 문화가 융합된 상징적인 장소로 자리 잡았다.
경제적 중요성: 마카오는 현재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518년 - 실론 콜롬보 요새 건설


1538년 - 포르투갈 함대, 오스만 제국 함대를 디우 앞바다에서 격파
1543년 - 포르투갈 일본 내항 (총 전래) 

 


1549년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일본 도착.


일본에 대항해시대 이후 처음 도달한 서양인들이 포르투갈인이다. 그리고 일본은 포르투갈과는 대항해시대 때부터 외교관계를 맺었다. 당시 포르투갈인들은 일본에게 빵, 덴푸라, 조총, 기독교(가톨릭) 등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일본어에도 일부 포르투갈어 차용어가 존재한다. 또한, 포르투갈어로 된 일본어 사전도 나오기도 했다. 데지마도 원래 포르투갈 상인들을 위해 일본에서 만들어둔 무역 공간이었다.

그러다가 17세기 이후로 에도 막부가 기독교를 금지하면서 선교에 관심이 많던 포르투갈은 종교적인 문제 +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노예무역을 비롯한 무역 문제[2]로 교역이 끊겼고, 대신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대신해 일본과 무역을 독점하였다. 19세기 이후 다시 국교를 정상화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인 1942년 일본 제국은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동티모르에 연합군(영국군, 호주군, 네덜란드군)이 들어와 있다는 걸 빌미로 침공, 점령했고[3], 두 국가는 잠시동안 단교했으나 1953년 다시 관계를 회복한다.


1549년- 초대 브라질 총독 토메 드 소자가 부임, 수도 사우바도르 다 바이아 건설.

 

브라질 총독부의 설립

  • 브라질 총독부 포르투갈의 총독부로, 브라질의 식민지 통치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 이 총독부는 세습 카피타니아 제도가 실패한 후에 설립되었으며, 주앙 3세의 지시에 따라 카피타니아들을 합병하여 세워졌다.
  • 1549년 1월 7일, 초대 총독 토메 드 소자가 임명되었고, 그는 3월 29일에 브라질에 도착하였다.
  • 초대 총독의 주요 임무는 식민통치의 중심지를 건설하는 것이었으며, 바이아의 토두스 우스 산투스가 중심지로 선정되었다.

초대 총독과 초기 식민지

  • 토메 드 소자의 임무는 해안 경비를 정비하고, 지주들을 도와 식민지의 행정과 사법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었다.
  • 그는 도시를 정비하고, 특히 사탕수수 생산에 큰 역할을 하였다.
    • 땅을 나눠주고 길을 내며, 조선소도 설립하였다.
  • 이러한 조치로 인해 중앙통치체제가 자리 잡았고, 카피타니아들을 총독부로 통합하면서 식민화가 더욱 빨라졌다.

두아르트 다 코스타의 임기

  • 1553년, 토메 드 소자가 물러나고 두아르트 다 코스타가 부임하였다.
  • 그는 260명의 일행과 함께 도착하였으며, 그 중에는 아들 알바루 다 코스타와 바스크인 예수회 선교사 호세 데 안치에타가 포함되어 있었다.
  • 호세 데 안치에타는 원주민에게 기독교를 전파한 선교사로, 알바루 다 코스타와의 갈등이 있었다.
    • 알바루 다 코스타는 개종한 원주민을 노예로 부리려 하였다.
  • 두아르트 다 코스타의 임기 중, 프랑스인 개신교 선교사들이 구아나바라에 정착하여 프랑스 안타르크티크라는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멩 드 사의 정책과 전투

  • 1558년, 세 번째 총독인 멩 드 사가 부임하였다.
  • 그는 세즈마리아 정책을 통해 정착해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땅을 지급하였다.
  • 멩 드 사는 세르지피 강변에 엔제뉴(사탕수수 제분소)를 설립하였다.
  • 그는 구아나바라 만의 타모이우인들과 연합하여 프랑스 안타르크티크에 맞서 싸웠다.
    • 1565년, 멩 드 사의 조카 이스타시우 드 사가 구아나바라 지역을 수복하고 히우 지 자네이루라는 도시를 세웠다.

이베리아 연합 시기의 변화

  • 1580년부터 1640년 사이, 포르투갈 왕가와 스페인 왕가가 이베리아 연합을 형성하였다.
  • 이 시기에 스페인의 왕인 펠리페 2세,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의 통치를 받았다.
  • 남아메리카에서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형성된 국경이 무의미해지며, 브라질이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내륙 탐험과 식민지 확장

  • 엔트라다 또는 반데이란치라고 불리는 내륙 탐험대가 조직되었다.
  • 이들은 세르탕(오지)이라 불리는 서부 내륙 지방을 탐험하며 금이나 은 같은 값진 광물을 찾았다.
  • 또한, 원주민을 납치해 노예로 삼았다.

유럽 열강의 침략

  • 이베리아 연합 시기에는 포르투갈과는 우호적인 관계였지만, 스페인과는 적대하던 유럽 열강들이 브라질을 침략하였다.
  • 특히 네덜란드인들은 페르남부쿠와 파라이바 등 브라질 북동부 해변에서 25년 동안 물러나지 않았다.

행정적 변화와 브라질 분리

  • 스페인 왕조는 여러 가지 행정적 변화를 시도하였다.
  • 1621년, 브라질이 브라질국과 마라냥국으로 분리되었다.
    • 브라질국은 페르남부쿠부터 산타 카타리나까지의 지역을 포함하였다.
    • 마라냥국은 세아라와 아마존 우림 지역에 걸쳐 있었다.
  • 마라냥국의 수도는 상루이스, 브라질국의 수도는 사우바도르였다.

브라질국의 확장과 마라냥국의 소멸

  • 17세기에 브라질국은 파라에서 히우 그란지 두 노르치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 18세기에는 히우그란지지상페드루(현재의 히우그란지두술)와 미나스제라이스 지역, 그리고 일부 아마존 우림 지역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 마라냥국 폼발 후작 시대에 소멸하였다.

식민지 시대의 정의

  • 식민지 시대는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기간을 의미한다.
  • 이 시기는 브라질 발견의 해인 1500년이 아니라, 포르투갈인의 정착이 시작된 1530년부터 시작된다.
  • 식민지 시대는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브 연합왕국이 출범한 1815년에 끝난다.
  • 브라질에서는 1500년부터 1808년까지를 식민지 시기로 보며, 포르투갈에서는 이를 **"브라질 건설기"**라 부른다.
  • 포르투갈은 브라질의 독립을 인정한 1825년까지 이 시기를 연장한다.

포르투갈인의 도착과 초기 탐험

  • 브라질에 가장 먼저 도착한 유럽인에 대한 여러 이론이 존재한다.
    • 1498년 두아르트 파셰쿠 페레이라가 도착했다는 설.
    • 1500년 1월 16일 스페인의 비센테 야녜스 핀손이 도착했다는 설.
  • 공식적으로는 1500년 4월 22일에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바이아 남쪽 해안에 도착한 것이 최초이다.
  • 카브랄은 1500년 3월 9일에 원정을 시작하여, 무역풍을 타고 여러 섬을 지나 바이아에 도착하였다.
  • 포르투갈인들이 원주민과 처음 접촉한 장소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브라질의 명명과 초기 기독교 미사

  • 원주민들은 브라질을 **"핀도라마(야자나무의 땅)"**이라 불렀다.
  • 4월 26일에 열린 첫 번째 기독교 미사에서 포르투갈인들은 이 땅을 **"베라크루스(참된 십자가) 섬"**이라고 명명하였다.
  • 5월 1일에 열린 두 번째 미사에서 카브랄은 이 땅을 포르투갈 왕실의 소유로 편입하였다.
  • 이후 이 지역의 이름은 **"산타크루스(성스러운 십자가)의 땅"**으로 바뀌었고, 최종적으로 **"브라질"**로 변경되었다.

세습 카피타니아의 도입

  • 브라질의 식민지화는 주앙 3세가 즉위한 153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초기에는 브라질에 상업적 가치가 있는 상품이 거의 없었고, 원주민 문명이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 흑사병으로 인해 포르투갈 내 인구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 프랑스인들의 침범으로 인해 1516년에 카피타니아(총독령)가 설립되었고, 브라질에도 정찰대가 파견되었다.

브라질 총독부의 설립

  • 세습 카피타니아 제도가 실패하자, 주앙 3세는 카피타니아들을 합병하여 브라질 총독부를 세웠다.
  • 1549년 1월 7일에 초대 총독 토메 드 소자가 임명되었고, 3월 29일에 브라질에 도착하였다.
  • 초대 총독의 주요 임무는 식민통치의 중심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 중심지는 바이아 지 토두스 우스 산투스로 선정되었고, 도시는 상사우바도르 다 바이아 지 토두스 우스 산투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프랑스의 침입과 총독 교체

  • 두아르트 다 코스타의 임기 중, 프랑스인 개신교 선교사들이 구아나바라에 정착하였다.
  • 이들은 프랑스 안타르크티크라는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이에 분노한 바이아 의회는 왕실에 총독 교체를 요청하였다.
  • 1558년에 세 번째 총독인 멩 드 사가 부임하였고, 세즈마리아 정책을 이어갔다.
  • 멩 드 사는 1565년에 구아나바라 지역을 수복하고 히우 지 자네이루라는 도시를 세웠다.

브라질의 내륙 탐험과 확장

  • 엔트라다 또는 반데이란치라고 불리는 내륙 탐험대가 조직되었다.
  • 이들은 **세르탕(오지)**이라 불리는 서부 내륙 지방을 탐험하며 금이나 은 같은 귀중한 자원을 찾았다.
  • 원주민을 납치하여 노예로 삼는 행위도 발생하였다.
  • 이 시기에 브라질의 국경이 확장되었고,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의미가 퇴색하였다.

1557년 - 중국 남부 마카오에 거류권 획득.



1578년 - 알카세르키비르 전투

 

1578년 8월 4일 정오 무렵, 크사르 엘 케비르Ksar el-Kebir(지도 참조)라는 모로코Morocco마을 부근의 전장에서 3명의 군주가 전사했다. 두 명은 무슬림이고 한 명은 기독교였는데 이후 수십년 동안 유럽과 북아프리카 전역에 큰 영향을 남겼다. 그리고 영국과 스페인이 어부지리를 누렸다. 

 

 

 

일명 세왕의 전투로 알려진 알카세르 퀴비르Alcacer Quibir전투입니다. 좌측이 기독교 원정군, 우측이 무슬림 모로코군인데 벌써부터 그 결과를 알 수 있겠죠?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들 사이에서는 알카사르Alcazar전투로 더 유명한 크사르 엘 케비르전투는 세 왕의 전투로도 불린다. 가독교군주인 포르투갈왕 세바스티앙Sebastian 1세는 축출된 모로코술탄 모울라이 모하메드Moulay Mohammed(모하메드 2세)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는 모로코 사아디Saadi왕조를 연 모하메드 아쉬-쉐이크Mohammed ash-Sheikh의 아들이자 자신의 작은 아버지인 압델말레크Abdelmalek에 의해 왕좌에서 밀려났다. 

압델말레크는 형인 압달라 알 갈립Abdallah al-Ghalib이 왕위에 오른 후에 자신을 죽이려하자 1557년에 동생과 함께 오스만Ottoman제국으로 달아났었다. 1574년, 압달라가 죽고 아들인 모울라이에게 왕의가 계승되자 왕위계승을 주장하고 나섰다. 

모로코왕국은 내전으로 분열되었고 1576년, 오스만군의 지원을 받은 압델말레크가 수도에 진입했다. 모울라이는 왕궁에서 탈출해 게릴라전을 벌이며 세바스티앙의 지원을 간청했다. 

 

 

24살의 포르투갈왕은 모로코십자군원정과 구시대 기사도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병사를 일으켜 모울라이 모하메드를 돕고 바르라리Barbary영토를 침공하기로 했다. 특히 포르투갈의 쇠락한 영광을 되찾기 위해 지휘경험이 전혀 없는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는 북아프리카에 토마스 스투컬리Thomas Stukeley라는 젊은 영국인을 데려갔다. 영국왕 헨리 8세의 서자라는 소문이 있는 스투컬리는, 에드워드Edward 6세부터 온갖 종류의 대외공작에 개입했다. 

1550년대 초반부터 첩보원, 용병, 해적, 밀수꾼, 건달 등을 전전한 그는 늘 운좋게 위기를 모면했지만 동료는 쳐형되었다. 그가 계속 처형을 모면하자 영국왕실과의 연줄이 있다는 소문이 생겼다. 

 

1558년, 엘리자베스Elizabeth여왕즉위 후에도 스투컬리는 왕실에 걸림돌이 되었고 1570년에 영국을 탈출해 대륙으로 건너갔다. 그는 스페인의 영국과 아일랜드침공 계획에도 참여했다. 1578년 2월 2일, 교황의 지원을 받아 3,000명을 무장시키고 보급할 수 있는 군수품을 가득 실은 배에 몸을 실었다. 이탈리아용병 600명도 함께였다. 이들은 스페인에 있는 아일랜드반란군과 합류해서 아일랜드를 침공할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계획이 취소되었다.

선박은 심각한 상태였고 2주면 충분한 거리를 2개월이나 걸려 항해했다. 그동안 600명이 배에 실린 모든 식량을 먹어치웠다. 

4월 중순, 배가 카디스Cadiz에 도착하자 이탈리아용병은 폭동을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위기에 몰린 지휘관에게 반가운 전령이 찾아왔다. 스페인국왕 펠리페Pelipe는 스투컬리에게 리스본Lisbon으로 가서 세바스티앙의 원정군과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교황은 돈만 날리고 농락당했다. 

 

 

스페인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펠리페 2세입니다. 철저한 가톨릭 지지자로 유럽의 온갖 종교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만약 그가 조금만 관용을 베풀거나 정치적이었다면 세계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스투컬리는 아일랜드를 가톨릭Catholic으로 복구시키는 신성한 명령을 저버렸다. 심지어 교황은 사악한 여자(엘리자베스여왕)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허락까지 해두었는데 말이다. 펠리페는 아일랜드침공을 도와달라는 교황의 요청을 무시했다. 그는 저카 세바스티앙의 모로코원정을 지지하고 있었다. 

세바스티앙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17,000명의 원정군을 편성했다. 약 9,000명의 농부징집병, 1,500명의 영주지원병, 1,000명의 귀족출신기병, 5,500명의 외국용병(발룽, 스페인, 이탈리아 출신)과 포병부대였다. 

이렇게 잡다한 편성은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스투컬리의 이탈리아용병은 처음 목적과 달리 외국지휘관의 명령을 받고 식량을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사실에 거칠게 반항했다. 30개의 화약통과 7,000자루의 화승총이 준비되었지만 징집병 대부분은 창과 같이 전통적인 무기로 무장했고 전투대형조차 만들지 못했다. 

그런데도 세바스티앙은 서둘렀다. 그는 선두에서 서서 부대를 이끌고 돌격하는 환상에 젖어있었다. 경험이 미천한 지휘관이 현실과 조언을 무시하면 참담한 결과는 당연했다. 

 

 

6월 24일, 500척의 원정함대가 리스본 타구스Tagus강을 출발했고 7월 14일에 모로코의 대서양해안의 아실라Asilah에 도착했다. 원정은 처음부터 삐걱댔다. 원정군은 적국에 있으면서도 방어진지를 세우지 않고 들판에서 야영했다. 훈련은 거의 하지 않았다. 역할이 불분명해서 약간의 소동만 일어도 군대 전체가 뒤집혔다.

원정군이 도착하자 압델말레크는 협상에 나섰다. 해안영토를 내주겠다는 관대한 조건이었는데도 바스티앙은 제안을 거절했다. 자신감이 넘친 그는 함대의 지원을 받으며 해안을 따라 내려간다는 계획을 취소했다. 

6월 23일, 전쟁회의를 소집하고 신속하게 내륙으로 진군해서 승전한다는 계획을 주장했다. 보급을 받기 위해서라도 함대가 필요했다. 세바스티앙은 어떤 조언도 들으려하지 않았다. 스투컬리와 다른 지휘관 2명이 왕에게 맞서며 성급한 진군은 절대로 안된다고 말렸다. 세바스티앙은 왕의 권위를 내세우며 입다물게 했다. 

 

 

포르투갈의 모로코 식민지입니다. 

 

7월 29일, 원정군이 진군에 나섰고 그 뒤를 성직자, 장사꾼, 창녀, 음악가, 노예 등 수천 명이 따라갔다. 가족까지 합치면 원정군과 맞먹는 숫자였다. 1,100대의 마차에는 귀족의 품위를 유지하는 천막, 가구, 식기 등이 가득 실려 있었다. 

오래전에는 이런 일이 일반적이었지만 1570년대는 더 이상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엄청난 수송마차대열에도 불구하고 원정군은 곧바로 식수와 식량난에 직면했다. 그리고 원정군 뒤를 모로코경기병이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오합지졸 원정군은 겨우 50km를 진군하는데 6일이나 걸렸다. 압델말레크는 원정군의 위치와 방향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8월 3일 밤, 모울라이 모하메드는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합류하면서 세바스티앙에게 이튿날 늦은 오후까지 절대로 전투를 벌이지 말라고 조언했다. 압델말레크의 건강이 하루를 넘기지 못할 정도로 심각해서 적이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고 했다. 

스투컬리도 그의 조언을 지지했지만 왕은 다시 한 번 겁쟁이라고 비난하며 입을 다물게 했다. 세바스티앙은 모든 조언을 거부하며 동이 트면 바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포르투갈군의 공격로로 미리 정해두었는데 기병의 멋진 돌격을 위해서였다. 

설상가상으로 병사들을 수송마차대열과 함께 사각형 방진대형으로 펼쳐두었다. 창병 대부분은 수송마차를 지키는 역할로 전락했다. 

 

스투컬리와 이탈리아군, 스페인군은 보병의 좌익을, 독일과 발룽군은 우익을 맡았고 농부징집병은 그 뒤에 집결했다. 불안했던 스투컬리는 이탈리아용병을 작은 부대로 나누어 스페인부대 사이에 끼워 넣었다. 

세바스티앙과 포르투갈귀족이 기병을 이끌었고 모울라이군은 방진의 측면을 지원했다. 화승총병은 후위를 맡았다. 

총 23,000명의 원정군 건너편에는 약 60,000명의 무슬림군이 3열로 서 있었다. 압델말레크도 대포를 배치했고 화승총병의 숫자는 원정군보다 훨씬 많았다. 

 

세바스티앙이 바라던대로 알카사르Alcazar전투가 시작되었다. 겨우 6시간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포르투갈군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양쪽은 각각의 전투대형을 만들고 함성을 지르고 소리만 요란한 포격전을 주고 받은 후에 보병대가 앞으로 나가 치열한 백병전을 시작했다. 세바스티앙은 포르투갈기병대를 선두에서 이끌며 적진에 뛰어들었다. 순간의 충격으로 적진에 큰 구멍이 생겼지만 후속병력이 없어서 더 이상 효과가 없었다. 

무슬림예비대가 앞으로 나와 빈틈을 채웠고 10배나 많은 압델말리크의 기병이 포르투갈기병대를 전멸시켰다. 이후부터는 숫자싸움이었다. 무슬림군은 원정군의 방진을 포위해 사방에서 쓰러트렸다. 

 

 

 

원정군은 8,000명 이상이 죽고 15,000명이 포로가 되어 몸값을 치루지 못한 사람은 노예가 되었다. 생존자는 아실라의 함대로 돌아갔지만 그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무슬림군은 4,000명 정도를 잃었다. 

전사자 중에는 세바스티앙도 있었고 모울라이 모하메드 그리고 압델말레크도 있었다. 모울라이는 강을 건너 달아나려다가 익사했고 압델말레크는 모울라이가 말했던 것처럼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스투컬리도 죽었다. 

스투컬리의 죽음에는 두 가지 소문이 전해지는데, 무슬림대포에 다리를 잃고 전투초반에 죽었다는 소리가 있고 패전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이탈리아용병이 죽였다는 소리가 있다. 

후자의 소문은 영국극작가 조지 필George Peele의 알카사르전투The Battle of Alcazar(1594년 출간)과 작자미상의 토마스 스투컬리대장의 삶과 죽음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The Famous History of the Life and Death of Captain Thomas Stukeley (1600년 출간)으로 이어졌다. 

 

이 전투에서 3명의 군주와 40명의 귀족이 죽었기 때문에 스투컬리의 죽음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특히 세바스티앙은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의 왕좌는 2년 후에 스페인 펠리페의 손에 넘어가 포르투갈은 1640년까지 합스부르크Hapsburg왕가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세바스티앙은 원정으로 국고를 완전히 바닥내 포르투갈은 왕도 없고 귀족도 없고 돈도 없는 나라로 전락했다. 

스투컬리의 죽음은 조용히 그리고 무척 심각하게 조국에 영향을 미쳤다. 스투컬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편력과 모험에 대해 정치적인 의미를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영국은 설탕과 화약생산에 필수적인 질산칼륨을 모로코의 압델말레크에게 의존하고 있었고 영국출신의 지휘관이 부대를 이끌고 적과 함께 참전했다.  

엘리자베스여왕은 모로코와의 교역강화를 원했지만 압델말레크 다음으로 술탄에 오른 아흐메드 알 만수르Ahmad al-Masud는 협상을 미루다가 나중에야 대사를 파견해 조약을 맺었다. 

그런 면에서 스투컬리는 교황이 애초에 명령했던 대로 엘리자베스여왕을 괴롭혔다고 할 수 있다.



1580년 - 합스부르크 가문인 스페인 왕의 포르투갈 통치
1599년 - 버마 용병이 있던 포르투갈의 필리프 드 브리투가 탄린 지배 (- 1613년)
1630년 - 네덜란드의 브라질 북동부 점령 (~1654년)


1639년 - 일본,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 엄금.

16세기 중엽 포르투갈인의의 다네가시마(종자도) 표착 이후 일본에서는 서유럽과의 무역이 전개되는 동시에 그리스도교1)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특히 쇼쿠호시대(직풍시대)인 오다 노부나가(직전신장) 정권기에는 사원세력의 탄압과 동시에 그리스도교가 우대되어 일본의 규슈(구주)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도 초기에는 그리스도교를 용인하였으나, 규슈를 평정한 1587년 이후 ‘바테렌(반천련) 추방령’을 내려 선교사들의 국외추방을 단행하였다.2) 다만, 선교활동 이외에 무역선의 내항은 용인하여 명확하게 종교와 무역을 구분하여 서유럽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후 에도(강호)시대에 들어와 도쿠가와(덕천) 정권은 이른바 ‘쇄국정책’의 근간으로서 그리스도교 금제정책을 강화해 1637년 일본 최대의 그리스도교 반란인 ‘시마바라(도원)․아마쿠사(천초)의 난’을 전원 몰살이라는 강경책으로 진압하고, 1639년 포르투갈과의 선박의 내항을 금지함으로써 근세 일본의 ‘쇄국체제’를 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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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0년 - 포르투갈 본국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이탈. (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

 

포르투갈 독립 전쟁 개요

  • 전쟁의 명칭: 포르투갈 독립 전쟁은 포르투갈어로 "Guerra da Restauração", 스페인어로 "Guerra de Restauración portuguesa"라고 불린다.
  • 역사적 배경: 이 전쟁은 포르투갈 왕국과 합스부르크 스페인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낭만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 전쟁의 성격: 독립을 위한 전쟁으로, 포르투갈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었음을 나타낸다.
  • 전쟁의 중요성: 이 전쟁은 포르투갈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국가의 독립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전쟁의 시작과 종료

  • 독립 선언: 1640년, 주앙 1세가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 전쟁의 종료: 1668년, 리스본 조약을 통해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 전쟁 기간: 전쟁은 약 28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포르투갈의 독립을 위한 중요한 과정이었다.
  • 전쟁의 결과: 이 전쟁의 결과로 포르투갈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스페인 지배의 종말

  • 지배 기간: 1640년의 독립 선언으로 60년간 지속되었던 스페인의 포르투갈 지배가 끝나게 되었다.
  • 지배의 영향: 스페인의 지배는 포르투갈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독립의 의미: 독립 선언은 포르투갈 국민들에게 자주성과 정체성을 회복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역사적 의의: 이 사건은 포르투갈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로, 이후의 정치적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 중의 충돌

  • 간헐적인 충돌: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포르투갈과 스페인 간의 간헐적인 충돌이 계속되었다.
  • 전투의 양상: 이러한 충돌은 전투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양국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 전쟁의 지속성: 전쟁 중의 충돌은 전쟁의 지속성을 나타내며, 양국의 군사적 전략에 영향을 미쳤다.
  • 국민의 참여: 포르투갈 국민들은 이러한 충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독립을 위한 의지를 다졌다.

전쟁의 외부 요인

  • 스페인의 상황: 당시 스페인은 30년 전쟁, 프랑스-스페인 전쟁, 잉글랜드 내전 등으로 인해 이 전쟁에 집중할 수 없었다.
  • 포르투갈의 상황: 포르투갈 역시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으로 인해 스페인과 전면전을 벌이지 못하였다.
  • 전쟁의 복잡성: 이러한 외부 요인은 전쟁의 복잡성을 더하며, 양국의 군사적 전략에 영향을 미쳤다.
  • 전략적 결정: 외부 요인들은 전쟁의 전략적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전투의 양상에 변화를 주었다.

전쟁의 결과와 영향

  • 이베리아 연합의 붕괴: 이 전쟁 이후에 이베리아 연합이 붕괴되었다.
  • 브라간사 가의 등장: 전쟁의 결과로 브라간사 가가 포르투갈의 새로운 왕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 정치적 변화: 이 사건은 포르투갈의 정치적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새로운 왕조의 출현은 국가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 역사적 교훈: 전쟁의 결과는 포르투갈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으로 남아 있으며, 독립과 자주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1641년 - 네덜란드, 믈라카 점령. 네덜란드, 앙골라 해안 루안다 점령.
1648년 - 브라질 식민지군, 루안다 탈환, 앙골라 내륙 침공


1658년 - 네덜란드, 실론 점령

영국령 실론의 개요

  • 영국령 실론은 1796년부터 1948년 2월 4일까지 스리랑카섬에 존재한 영국의 왕령식민지이다.
  • 영어명: British Ceylon
  • 싱할라어명: බ්‍රිතාන්‍ය ලංකාව (브리타냐 람카와)
  • 타밀어명: பிரித்தானிய இலங்கை(브리타니야 일랑கை)
  • 존속 기간: 1796년 ~ 1948년 2월 4일

식민지의 시작과 확장

  • 영국령 실론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네덜란드령 실론을 빼앗아 시작되었다.
  • 1817년, 내륙의 캔디 왕국을 합병하면서 스리랑카섬 전역을 지배하는 식민지가 되었다.
  • 식민지 확장: 캔디 왕국의 합병은 영국의 지배를 강화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스리랑카의 식민 지배 역사

  • 스리랑카 지역의 식민 지배 역사는 포르투갈 콜롬보에 거점을 마련한 포르투갈령 실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식민 지배의 순서:
    1. 포르투갈령 실론
    2. 네덜란드령 실론
    3. 영국령 실론

네덜란드와 영국의 지배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네덜란드령 실론을 지배하였고, 이후 영국 동인도 회사가 네덜란드 영지를 빼앗으면서 영국령 실론이 시작되었다.
  •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는 해안의 주요 항구만 지배할 수 있었고, 내륙은 여전히 독립 국가들이 존재하였다.

내륙의 독립 국가들

  • 여러 나라가 분열하였던 스리랑카는 15세기 무렵 캔디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 캔디 왕국은 이후 식민주의 군대와 전쟁을 치렀다.
  • 내륙의 독립성: 내륙 지역은 외부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독립적인 국가로 존재하였다.

캔디 왕국의 통합과 전쟁

  • 캔디 왕국은 여러 나라가 분열된 상태에서 통합되었으며, 이는 스리랑카의 정치적 안정성을 높였다.
  • 캔디는 식민주의 군대와의 전쟁을 통해 저항하였다.
  • 전쟁의 결과: 캔디 왕국은 외부 세력에 맞서 싸우며 독립성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영국의 캔디 정복

  • 1815년, 영국은 캔디의 마지막 국왕을 사로잡았다.
  • 이후 1817년 캔디 조약을 통해 스리랑카 전역을 식민지로 합병하였다.
  • 캔디 조약: 영국의 지배를 공식화하고, 스리랑카의 정치적 지형을 변화시킨 중요한 사건이다.

1661년 - 헤이그 강화 조약으로 네덜란드가 브라질 북동부와 앙골라에서 철수
1703년 - 영국과 메수엔 조약. 영국 경제 종속을 강요당함


1750년대 - 브라질 금 생산 절정기
1763년 - 브라질 식민지 소재지가 사우바도르에서 리우데자네이루로 이전


1808년 -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포르투갈 궁정 리우데자네이루 천도
1815년 -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브 연합 왕국 성립
1821년 - 포르투갈 궁정 리스본 귀환


1822년 - 브라질독립 (브라질 제국)

 

나폴레옹과 포르투갈 왕가의 망명

  • 나폴레옹의 포르투갈 점령: 나폴레옹이 포르투갈 본토를 점령함에 따라,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가는 대서양을 건너 브라질로 망명하게 된다.
  • 브라질의 중요성: 당시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가장 거대하고 부유한 식민지로, 본토에 준하는 가치를 가진 영토로 격상된다.
  • 리우데자네이루의 수도 지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는 한때 포르투갈의 수도로 선포되었으며, 이는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도시가 수도로 선포된 유일한 사례이다.
  • 망명의 배경: 왕가의 망명은 나폴레옹의 군사적 압박과 포르투갈 본토의 정치적 불안정성에 기인한 것이다.

브라질의 성장과 자치권 확대

  • 브라질의 성장: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단순한 식민지로 남아있을 의사가 없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 자치권의 확대: 브라질은 막강한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고, 자치권도 확대되었다.
  • 연합왕국의 성립: 브라질은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을 선포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 본국 정부의 간섭 어려움: 리스본의 본국 정부는 브라질 자치 정부에 대해 간섭하기가 어려워졌다.

브라질의 독립 선언

  • 포르투갈 의회의 결의: 포르투갈 본국 정부는 브라질을 단순한 식민지로 격하할 것을 결의하였다.
  • 브라질인의 반발: 브라질인들은 이에 격분하였고,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 독립 선언: 포르투갈 국왕 주앙 6세의 아들인 페드루 1세가 1822년 9월 7일 독립을 선포하였다.
  • 제국의 성립: 10월 17일에는 제국을 선포하고, 1824년 3월 25일에 헌법이 제정되었다.

페드루 1세의 통치와 반발

  • 초대 황제의 지지: 페드루 1세에 대한 지지가 매우 높았으나, 국내 대립과 반목이 극심하였다.
  • 전제주의적 통치: 페드루 1세는 국가 분열을 진압하기 위해 전제주의적인 통치 방식을 택하였다.
  • 우루과이 독립: 남부의 시스플라티나 주의 지도자들이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아 돌아와 500일 전쟁 끝에 우루과이로 독립하였다.
  • 징집령 반대 폭동: 황제는 아르헨티나에 선전포고하였으나, 징집령에 반대하여 폭동이 일어났다.

페드루 2세의 재위와 발전

  • 장기 재위: 페드루 2세는 58년간 재위하면서 많은 치적을 쌓았다.
  • 총리 제도 실시: 1847년부터 총리 제도를 실시하여 정치적 안정성을 높였다.
  • 자본주의 발전: 흑인들과 원주민들로 구성된 노예들을 부리는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자본주의가 엄청나게 발전하였다.
  • 파라과이 전쟁: 1864년, 파라과이가 호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자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 연합하여 전쟁을 벌였다.

노예제 폐지와 정치적 변화

  • 노예제의 마지막 나라: 브라질은 아메리카에서 노예제가 유지되는 마지막 나라였다.
  • 노예제 폐지 서명: 페드루 2세는 1888년 전격적으로 노예제 폐지에 서명하였다.
  • 농장주들의 반발: 이 과격한 개혁은 농장주들과 자본가들의 큰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 공화주의자들의 증가: 페드루 2세의 치세 기간 동안 식자층이 늘어나면서 공화주의자들이 매우 증가하였다.

브라질 제정의 붕괴

  • 군사 쿠데타 발생: 데오도루 다 폰세카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1889년 11월 15일 브라질 의회는 제정 폐지를 의결하였다.
  • 페드루 2세의 추방: 페드루 2세와 그 가족들은 국외로 추방되었다.
  • 유럽에서의 생활: 페드루 2세와 그 가족들은 유럽의 호텔을 전전하면서 어렵게 살았다.
  • 재평가의 시작: 브라질에서는 황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849년 - 포르투갈, 거류지 마카오 식민지화를 선언
1859년 - 서티모르를 네덜란드에 할양


1942년 - 일본군, 동 티모르 전체를 점령 (~1945년)

 

티모르의 역사적 배경

  • **티모르(Timor)**는 포르투갈이 일찍부터 관심을 가진 지역이다.
  • 대항해시대에 포르투갈은 인도네시아 열도에서 향료무역을 개척하였다.
  • 1515년,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사제들이 티모르와 그 인근 지역에 가톨릭을 소개하였다.
  • 네덜란드가 바타비아를 건설하고 포르투갈 세력을 몰아내자, 포르투갈의 잔여 세력은 티모르 섬으로 이동하였다.

포르투갈의 식민지 확장

  • 포르투갈은 티모르에서 백단향 무역을 개척하였다.
  • **백단향(Sandalwood)**은 은은한 향기가 나며 약재로 사용되고, 고급 목재로도 각광받는다.
  • 이 나무는 금의 무게와 같은 가격으로 거래될 정도로 귀중한 자원이다.
  • 포르투갈은 현지인과 혼혈종족인 토파세와 협력하여 향료무역의 공백을 백단향 무역으로 메웠다.
  • 1702년, 포르투갈은 동티모르를 식민지로 편입하였다.

네덜란드와의 경쟁

  • 네덜란드 상인들은 백단향의 가치를 인식하고 서부 티모르를 장악하였다.
  • 백단향 무역을 둘러싸고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간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 그러나 두 나라는 티모르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지 못하였다.
  • 1854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티모르를 분할하기로 합의하였다.

티모르의 분할 협정

  • 이후 몇 차례의 협상을 통해 1916년 티모르는 현지 부족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두 나라에 의해 분할되었다.
  • 이로 인해 티모르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나뉘게 되었다.
  • 식민지 분할은 지역 주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의 권리는 무시되었다.

일본의 점령과 저항

  • 1941년 12월, 일본군이 남양군도를 공격하자, 연합국의 일원인 호주군이 티모르를 선제적으로 점령하였다.
  • 일본군은 2만명의 군대를 파병하여 동티모르를 점령하였다.
  • 티모르인들은 연합군과 합세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며 일본군에 저항하였다.
  •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이 종식될 때, 티모르인들의 사망자 수는 전체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6만명에 달하였다.

전후 복구와 반발

  •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이후 서티모르는 네덜란드령으로 복귀하였고, 동티모르에는 포르투갈이 돌아왔다.
  • 포르투갈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주민들을 동원하여 혹사시켰다.
  • 동티모르인들은 돌아온 포르투갈의 학정에 반발하여 1959년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 당시 포르투갈은 주동자들을 아프리카의 앙골라 모잠비크로 추방하였다.

대규모 폭동과 식민지 정책

  • 동티모르의 주민들은 포르투갈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불만이 쌓여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 이 폭동은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 포르투갈은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강경한 조치를 취하였고, 이는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 이러한 사건들은 동티모르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내며, 이후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1943년 - 일본군, 중립 항구 마카오 보호령화 (~1945년)

1962년 - 포르투갈령 기니에서 기니비사우 독립 전쟁이 시작

포르투갈령 기니


1964년 -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에서 모잠비크 독립 전쟁이 시작


1974년 - 카네이션 혁명으로 파시스트 정권이 붕괴. 신 정권의 식민지 독립 승인.
1975년 - 모든 아프리카 식민지(앙골라, 모잠비크, 기니 비사우, 카보베르데, 상투메프린시페) 및 포르투갈령 티모르가 독립.
1976년 -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 합병 (티모르 내전으로 발전)
1999년 -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 포르투갈 식민제국 사실상 소멸.


2002년 - 동티모르 독립 승인. 식민제국 완전 소멸.

<역대 군주>


✔아비스 왕조


주앙 1세 (1415년~1433년)
두아르트 1세 (1433년~1438년)
아폰수 5세 (1438년~1481년)
주앙 2세 (1481년~1495년)
마누엘 1세 (1495년~1521년)
주앙 3세 (1521년~1557년)
세바스티앙 1세 (1557년~1578년)
엔히크 1세 (1578년~1580년)
안토니우 (1580년)


✔압스부르구 왕조
펠리페 1세 (1580년~1598년)
펠리페 2세 (1598년~1621년)
펠리페 3세 (1621년~1640년)

 


대항해시대의 시작

  • 대항해시대: 포르투갈 왕국의 국력과 영향력이 전 세계로 확대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 헤콩키스타 종료: 1418년부터 포르투갈의 항해자들은 인도에서 시작되는 향료무역 개척에 집중하였다.
  • 최신 해양 기술: 카라벨 범선을 포함한 최신 해양 기술을 동원하여 아프리카 연안과 대서양 군도를 탐험하였다.
  • 주요 항해 성과:
    •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의 항로 개척에 성공
    • 1498년: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에 도달
    • 1500년: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브라질에 처음 도달항해와 탐험의 성과
  • 동아시아 탐험: 포르투갈은 동아시아 연안과 섬을 탐험하기 시작하였다.
  • 요새와 무역 거점: 가는 곳마다 요새와 무역 거점을 세웠다.
  • 해양 전초기지: 1571년에는 리스본을 출발해 아프리카 연안, 중동, 인도, 동남아시아를 거쳐 나가사키까지 연결되는 해양 전초기지가 완성되었다.
  • 경제 성장:
    •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교역망과 식민지 무역은 포르투갈의 경제 성장에 기여하였다.
    • 이로 인해 포르투갈 1인당 소득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익이 발생하였다.

이베리아 연합과 제국의 쇠퇴

  • 카스티야 연합왕국: 1580년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계승 전쟁을 벌여 '필리피 1세'로 포르투갈 국왕에 올랐다.
  • 이베리아 연합: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60여 년 동안 동군 연합을 이루었다.
  • 정부 구조: 두 국가의 정부는 여전히 별개로 유지되었으나, 스페인 국왕이 포르투갈 국왕이라는 사실은 유럽 열강들에게 공격의 명분이 되었다.
  • 제국의 쇠퇴:
    • 포르투갈은 인구와 국력이 약해져 교역 거점망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다.
    • 1663년부터 시작된 제2기에는 브라질이 가장 큰 식민지로 성장하였으나, 1822년 브라질이 독립하게 된다.

브라질 독립과 제국의 마지막

  • 제3기 시작: 브라질 독립 승인 후 1825년부터 포르투갈 제국의 마지막 시기가 시작되었다.
  • 해외 식민지 축소: 이 시기 포르투갈이 진출한 해외 식민지는 아프리카 연안의 요새와 농장, 포르투갈령 티모르, 포르투갈령 인도, 포르투갈령 마카오로 줄어들었다.
  • 식민지 연결로 확보: 아프리카에서는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잇는 식민지 연결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 영국과의 마찰: 남아프리카 식민지 확보에 나서던 대영제국과의 마찰로 1890년 영국의 최후통첩으로 좌절되었다.

식민지 전쟁과 독립

  • 살라자르 정권: 1932년 집권한 안토니우 살라자르 총리는 독재정권을 세우고 해외 식민지 유지 정책을 추진하였다.
  • 프로빈시아 우트라마리누: 각 식민지들을 이 이름으로 바꾸었으나, 강제노동 체제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 식민지 전쟁 발발: 1961년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이 발발하였다.
  • 카네이션 혁명: 1974년 4월에 살라자르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포르투갈령 아프리카의 독립이 승인되었다.

포르투갈의 현대적 상황

  • 현재 해외 영토: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해외 영토는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이다.
  • 자치령 전환: 포르투갈 정부는 이들 지역의 지위를 '프로빈시아 우트라마리누'에서 '자치령'으로 전환하였다.
  •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 포르투갈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국가 간의 국제 기구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 주민 구성: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는 포르투갈인이 주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대항해시대의 포르투갈: 식민지의 영광과 그 후유증

대항해시대는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지속된 시기로, 유럽의 여러 나라가 새로운 해상로와 땅을 찾기 위해 대탐험을 시작한 시기예요. 이 시기를 통해 유럽은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식민지 개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죠. 포르투갈은 이 시기에 가장 먼저 앞서 나간 나라 중 하나로, 그들의 탐험이 가져온 역사적 의미는 지금도 높이 평가되고 있어요.

 

 

대항해시대란? 

대항해시대는 유럽, 특히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주도했던 시기로, 지리적인 이해가 깊어지면서 새로운 대륙과 해양을 탐험한 시기를 말해요. 이 시기 동안 많은 탐험가들이 세계의 다양한 지역을 발견했으며, 이들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간의 무역로를 개척하게 되었어요.

 

포르투갈은 14세기부터 시작된 탐험을 통해 아프리카의 서쪽 연안을 탐사하고, 마데이라와 아조레스 제도를 발견했어요. 그러면서 대서양을 넘어 인도와 아시아로의 진출을 시도하기 시작했죠. 이러한 탐험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무역과 자원의 확보를 위한 경제적인 목적이 강했어요.

포르투갈의 식민지 개척

포르투갈은 15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식민지 개척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들은 해양 탐험을 통해 많은 식민지를 확보했죠. 대표적으로 브라질, 아프리카의 기니, 그리고 아시아의 고향인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이 있어요. 이러한 식민지들은 포르투갈 제국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특히, 포르투갈은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발견함으로써 인도와의 무역에서 큰 이익을 누리게 되었죠. 이로 인해 포르투갈은 아시아의 향신료와 같은 귀중한 자원을 유럽으로 들여오는 데 성공했어요.

주요 식민지와 탐험가

포르투갈의 식민지 개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탐험가들은 매우 많아요. 이들 중에서 바스코 다 가마, 페르난도 마그엘란 (마젤란) , 디에고 카오 등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죠.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 항로를 개척하여 포르투갈의 식민지 확장에 큰 기여를 했고, 페르난도 마그엘란(마젤란)은 세계 일주를 통해 지구의 크기를 입증했어요.

페르디난드 마젤란

 

포르투갈 제국의 주요 식민지 중 한 곳인 브라질은 그들의 가장 큰 영토였고, 이곳에서 포르투갈은 설탕을 재배하여 유럽으로 수출했죠. 이처럼 포르투갈 식민지는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문화적 교류의 장 역할도 했어요.

식민지 경영의 특징

포르투갈의 식민지 경영은 매우 특징적이었어요. 그들은 군사적 힘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통치 대신, 상업 중심의 경영 방식을 채택했죠. 예를 들어, 포르투갈은 자국 상인들이 식민지에서 상업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지원했고, 이로 인해 상업적 번영이 가능했어요.

하지만 이러한 경영 방식은 식민지 주민들과의 갈등을 초래하기도 했어요.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는 자원의 착취와 인권 유린 등의 문제가 발생했죠. 이러한 점은 현재까지도 그 후유증으로 남아 있어요.

현재의 평가와 유산

오늘날 포르투갈의 식민지 시대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어요. 긍정적인 면으로는 세계 각국과의 문화 교류와 경제적 발전을 이끌었다는 점이죠. 하지만 부정적인 면에서는 식민지 지배로 인한 인권 침해와 문화 파괴 등이 여전히 남아 있어요.

포르투갈의 식민지 유산은 오늘날에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많은 나라에서 포르투갈의 문화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어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현재의 우리가 이해해야 할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예요.

이미지 갤러리

다음은 대항해시대와 관련된 역사적 이미지를 소개할게요.

  • 포르투갈의 탐험 경로와 식민지를 보여주는 지도가 매우 흥미로워요.

 

  • 포르투갈의 탐험이 이루어진 지역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세계지도도 있죠.

 

대항해시대는 단순한 탐험의 시대가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이었어요. 포르투갈의 식민지 개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죠.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과거를 배우고, 현재를 이해하며, 미래를 고민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대항해시대 #포르투갈 #식민지 #역사 #탐험 #문화교류 #경제적발전

 

 

이런 자료를 참고 했어요.

 

[1] 나무위키 -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 (https://namu.wiki/w/%ED%8F%AC%EB%A5%B4%ED%88%AC%EA%B0%88%20%EC%8B%9D%EB%AF%BC%EC%A7%80%20%EC%A0%84%EC%9F%81)

[2] 나무위키 - 대항해시대 (https://namu.wiki/w/%EB%8C%80%ED%95%AD%ED%95%B4%EC%8B%9C%EB%8C%80)

[3] Wikipedia - 포르투갈 제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D%8F%AC%EB%A5%B4%ED%88%AC%EA%B0%88_%EC%A0%9C%EA%B5%AD)

[4] Wikipedia - 대항해시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AD%ED%95%B4%EC%8B%9C%EB%8C%80)

 

포르투갈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해요. 이 포스팅에서는 식민지 시대와 1차 세계대전, 그리고 식민지 전쟁의 영향을 중심으로 다룰 거예요. 특히, 포르투갈이 겪은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통해 오늘날의 포르투갈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죠.

 

포르투갈은 유럽의 서쪽 끝에 위치한 나라로, 대항해시대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며 세계적인 해양 강국으로 자리 잡았어요. 특히 브라질, 아소르스 제도, 모잠비크, 앙골라 등은 포르투갈의 주요 식민지로 알려져 있죠. 이러한 식민지들은 포르투갈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고, 문화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식민지 시절, 포르투갈은 세계 여러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다양한 문화적 풍요를 누렸답니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

1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초 유럽의 여러 나라 간의 긴장 속에서 시작되었어요. 1914년에 발발한 이 전쟁은 전 세계로 확대되었고, 포르투갈도 이에 참여하게 되었죠. 포르투갈은 당시 중립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독일의 공격으로 인해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답니다. 특히 독일은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앙골라를 공격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은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었어요.

포르투갈의 전쟁 참여

포르투갈은 1916년에 전쟁에 공식적으로 참전하게 되었어요. 이때 포르투갈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주로 아프리카 전선에서 전투를 벌였죠. 특히, 포르투갈 군대는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 독일군과의 격렬한 전투를 치렀어요. 이 과정에서 포르투갈 군대는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전투에서의 전략과 전술 덕분에 몇 가지 중요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답니다.

 

식민지 전쟁의 역사

1961년부터 1974년까지 포르투갈은 자신의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독립 전쟁을 경험했어요. 이 전쟁은 포르투갈 제2공화국과 식민지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단체 간의 갈등으로 인해 발생했답니다. 이 시기에 포르투갈 정부는 식민지 방어를 위해 많은 군인과 자원을 투입했어요. 하지만 이러한 전투는 포르투갈 내부의 정치적 갈등을 심화시켜 결국 식민지 독립을 더욱 촉진하게 되었죠.

 

식민지에서의 삶과 전쟁의 영향

포르투갈의 식민지에서의 일상은 전쟁의 여파로 크게 변화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전투에 참여하며 삶의 방식이 달라졌고, 식민지 주민들도 많이 희생되었답니다. 전후 포르투갈은 식민지에서 독립을 원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이는 결국 1974년의 카니발 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죠. 이 혁명은 포르투갈이 식민지를 포기하고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어요.

 

포르투갈 역사에서의 교훈

오늘날 포르투갈은 과거의 역사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어요. 식민지 시대의 경험과 전쟁의 상처는 포르투갈 사회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죠. 또한, 포르투갈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다문화 사회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답니다. 이제 포르투갈은 과거를 기억하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죠.

 

포르투갈의 역사에서 우리는 식민지와 전쟁의 영향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알 수 있어요. 이러한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요소랍니다. 역사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 많은 만큼, 우리는 이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야겠죠.

 

이상으로 포르투갈의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마치도록 할게요. 포르투갈의 과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역사 속에서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답니다.

태그

#포르투갈 #역사 #1차세계대전 #식민지 #식민지전쟁 #문화 #교훈

이런 자료를 참고 했어요.

[1] Wikipedia -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의 포르투갈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1%EC%B0%A8_%EC%84%B8%EA%B3%84_%EB%8C%80%EC%A0%84_%EA%B8%B0%EA%B0%84%EC%9D%98_%ED%8F%AC%EB%A5%B4%ED%88%AC%EA%B0%88)

[2] 나무위키 -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 (https://namu.wiki/w/%ED%8F%AC%EB%A5%B4%ED%88%AC%EA%B0%88%20%EC%8B%9D%EB%AF%BC%EC%A7%80%20%EC%A0%84%EC%9F%81)

[3] 나무위키 - 포르투갈/역사 (https://namu.wiki/w/%ED%8F%AC%EB%A5%B4%ED%88%AC%EA%B0%88/%EC%97%AD%EC%82%AC)

[4] Wikipedia -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D%8F%AC%EB%A5%B4%ED%88%AC%EA%B0%88_%EC%8B%9D%EB%AF%BC%EC%A7%80_%EC%A0%84%EC%9F%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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