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6
사무라이의 개념과 역사
- 사무라이는 일본 봉건시대의 무사 계급을 일컫는 용어이다.
- 시대에 따라 **사족(士族)**이라고도 불리며, 유럽의 **기사(knight, 騎士)**와 유사한 개념이다.
- 일본도와 화려하게 장식된 일본 갑주 및 뿔 장식이 달린 투구는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요소로, 현재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무사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 사무라이의 개념은 **전쟁에서 활약하는 부시(무사, 모노노후)**와는 일치하지 않으며, 문관도 사무라이를 자처할 수 있었다.
사무라이의 신분과 특권
- 사무라이는 양민보다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으며, 칼을 차고 다닐 권리가 있는 특권계급이다.
- 사무라이가 칼을 소지하는 것은 그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이다.
- 그러나 사무라이가 아무데서나 칼싸움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참수형의 위험이 존재한다.
- 이로 인해 사무라이들은 대나무로 만든 칼날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이는 **다케미츠(たけみつ)**라고 불린다.
사무라이와 부시의 구분
- 사무라이와 부시는 엄격하게 구분되는 개념이다.
- **부시(武士)**는 전쟁을 업으로 삼는 무사들을 지칭하며, 사무라이는 문관과 무관을 포함하는 총칭으로 사용되었다.
- 에도 시대에는 전쟁을 업으로 삼는 부시와 모노노후의 의미가 사라지고, 평민을 다스리는 지배계급으로서의 사무라이만 남게 된다.
- 이러한 변화는 일본의 사회 구조와 신분 체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사 계급의 기원과 발전
무사 계급은 헤이안 시대에 처음 나타났으며, 귀족을 경호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 이 시기에 사무라이라는 용어가 생겨났으며, 이후 겐페이 전쟁과 가마쿠라 시대, 무로마치 시대를 거치면서 귀족으로 발전하였다. 겐페이 전쟁
헤이안 시대 말기인 1180년에 벌어진 일본의 4대 본성 『겐페이토키츠』 중 양대 무사 일족인 겐지(源氏)와 헤이지(平氏)[1] 간의 내전을 일컬으며, 1185년 겐지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면서 전국을 장악해 가마쿠라 막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또한 겐페이 합전은 단순히 겐지와 헤이케 두 가문의 대결만으로 봐서는 안되는게 당시 일본의 중앙군을 장악한 무사정권 헤이케에 대항하여 겐지 가문을 지지한 지방군이 일본 천하를 놓고 대결을 벌여서 중앙군이 아닌 지방군이 승리하여 중앙정부를 장악한 헤이케의 로쿠하라 정권을 전복시키고 지방군 위주의 막부를 세웠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큰 사건이다.
그러나 센고쿠 시대에 접어들면서 무사 귀족 계급이 몰락하게 된다.
센고쿠 시대(戰國時代, 전국시대)는 무로마치 막부 후기부터 시작된 일본의 혼란기로, 잘게 쪼개진 수많은 각 세력들간의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은 시대였다.
천황의 권위가 이미 몇세기 전부터 땅끝으로 떨어져 있던 상태에서 오닌의 난으로 인해 쇼군이 수장인 막부의 권위까지 추락하자, 전국 각지에서 개나 소나 다이묘 되고 쇼군 되겠다며 들고 일어나고, 어제의 부하가 오늘의 적이 되는 배신과 하극상이 비일비재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지역의 지배자가 바뀌었으며 잘나가던 가문이 하루아침에 몰락하기도 하고, 별 볼 일 없던 세력이 순식간에 강성한 세력으로 급부상하기도 했다.[2] 난세가 늘 그렇듯 기름장수 출신, 병졸 출신, 약재상 출신, 농민 출신 등 미천한 출신의 인물들이 급작스럽게 출세한 시대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극상으로 새로이 나타난 다이묘뿐 아니라 기존의 슈고 다이묘 중 살아남은 다이묘[3] 혹은 이런 다이묘들이 서로 싸우다가 몰락한 틈을 타 스스로 다이묘로 성장한 옛 소규모 호족 등 이 시대의 다이묘들은 막부나 조정의 권위는 빌릴지라도 이들의 대리 지배자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법령을 제정하는 등, 독립적인 특성이 더욱 강해졌다. 역사가들은 이들을 전국다이묘라고 불러 이전의 슈고 다이묘 등과 구별한다.
이렇게 분열된 일본 열도의 통일을 시작한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였고, 그의 사후 일본을 일시적으로 통일시킨 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이 두 사람의 시대는 특별히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 또는 쇼쿠호 시대(織豊時代)로 칭한다. 마지막으로 도요토미의 사후 재분열이 일어난 일본을 수습하고 통일을 완성한 자가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 하급 계층들이 하극상을 일으키며, 새로운 무사 계급인 센고쿠 다이묘가 등장하게 된다.
센고쿠 시대의 변화
- 센고쿠 시대는 일본의 신분 체계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 이 시기에 관리들을 칭하는 용어가 사무라이로 변화하였고, 전쟁을 업으로 삼는 무관들은 모노노후로 불리게 되었다.
- 사무라이의 개념이 문관과 무관을 포함하게 되면서,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변화하였다.
- 이러한 변화는 일본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
-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서 전쟁을 업으로 삼는 부시와 모노노후는 의미가 없어졌다.
- 이 시기에는 평민을 다스리는 지배계급으로서의 사무라이만 남게 되었다.
- 사무라이의 역할은 군사적 기능에서 정치적, 사회적 지배로 변화하였다.
- 이러한 변화는 일본의 봉건 사회에서 사무라이의 위치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에도 시대(일본어: 江戸時代 에도 지다이[*]) 혹은 도쿠가와 시대(일본어: 徳川時代 도쿠가와 지다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에도 막부가 일본을 통치한 1603년부터 1868년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에도 시대 일본에서는 급격한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고 유례없는 번영을 누렸다. 에도 막부는 사회 안정을 최고 국시로 삼고 쇄국 정책을 펴 외부 세력들의 출입을 막았으며, 와(和)를 기반으로 한 정책들을 실시하였다. 이 시기 일본은 우키요에와 같은 다양하고 아름다운 문화들을 꽃피웠고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였다. 에도 막부는 1603년 3월 24일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하여 설립되었고, 1868년 5월 3일에 메이지 유신으로 인하여 에도가 개혁파들의 손에 떨어질 때까지 존속했다.
메이지 유신과 사무라이의 운명
- 메이지 유신 이후, 사민평등을 실현한다는 가치 아래 **"폐도령"**이 내려졌다.
폐도령 :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 정부가 군경이 아닌 사무라이, 민간인이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금지한 법. 1876년(메이지 9년)에 내려진 포고령이다.
- 이로 인해 칼과 신분을 잃은 구 무사계급은 대부분 **"향사"**가 되어 평민이 되었다.
- 유신 때 공을 세운 다이묘 출신이나 상급 사무라이들은 **"화족"**으로 편입되었다.
- 이러한 변화는 일본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사무라이 계급의 몰락을 의미한다.
사무라이의 어원
- 사무라이라는 말의 기원: 사무라이라는 용어는 헤이안 시대에 처음 등장하였다.
- 초기 의미: 이 용어는 귀족들을 경호해주는 사람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이는 **'시중들다'**라는 의미를 가진 옛 일본어 **사부라우(さぶらう)**에서 유래한 것이다.
- 어원 분석:
- 사부라우는 **사모라우(さもらふ)**에서 변형된 것으로,
- 사부라우의 명사형은 **사부라이(さぶらひ)**이며,
- 이는 다시 변형되어 **사무라이(さむらひ)**가 되었다.
- 정서법 개정: 1946년에는 정서법 개정에 따라 사무라이가 さむらい로 표기되게 되었다.
사무라이의 의미와 변천
- 사무라이의 초기 사용: 사무라이는 귀족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을 의미하였다.
- 어원적 변화:
- 사부라우는 시중드는 행위를 나타내며,
-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부라이와 사무라이로 변화하였다.
- 문화적 맥락: 이 용어는 일본의 사회적 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 언어적 변천: 일본어의 변화는 문화적 변화와 함께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사부라우의 변형 과정
- 사부라우의 변천:
- 사부라우는 사모라우에서 시작하여,
- 사부라이로 변화하고,
- 최종적으로 사무라이로 정착하였다.
- 명사형의 중요성:
- 사부라우의 명사형인 사부라이는 사무라이의 기초가 되었다.
- 언어적 변화의 예: 이러한 변화는 일본어의 어휘 발전을 나타내는 중요한 사례이다.
- 문화적 의미: 사무라이는 일본의 전통과 역사를 반영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정서법 개정과 사무라이
- 정서법 개정의 배경: 1946년의 정서법 개정은 일본어 표기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 사무라이의 표기 변화:
- 사무라이는 さむらい로 표기되게 되었으며,
- 이는 현대 일본어에서의 사용에 영향을 미쳤다.
- 문화적 영향: 이러한 변화는 일본의 문화적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
- 언어의 진화: 정서법 개정은 일본어의 진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싸울아비와의 관계
- 싸울아비의 유언비어:
- 백제 유민들이 일본으로 이주하면서 싸울아비에서 파생된 사무라이라는 어휘가 생겼다는 주장이 있었다.
- 그러나 이는 구체적인 근거가 없는 유언비어이다.
- 싸울아비의 역사적 기록:
- 싸울아비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에 이광수의 소설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 이 시점에서 싸울아비라는 어휘가 1400년 전 백제에서 존재했을 가능성은 낮다.
- 문화적 오해: 이러한 주장은 일본과 한국의 문화적 연결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 역사적 맥락: 싸울아비와 사무라이의 관계는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싸울아비의 역사적 기록
- 싸울아비의 최초 기록:
- 싸울아비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에 이광수의 소설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남아 있다.
- 어휘의 출현 시기:
- 이 시기에 싸울아비라는 어휘가 등장하였으며,
- 이는 백제와의 관련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 역사적 가능성:
- 1400년 전 백제에서 싸울아비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 문헌의 중요성: 이러한 문헌은 한국어와 일본어의 어휘적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해의 원인
- 오해의 확산:
- 사무라이와 싸울아비의 관계에 대한 오해는 진 사무라이 스피리츠 하오마루 지옥변의 국내판인 진 싸울아비 투혼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 문화적 영향:
- 이와 같은 오해는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와 한국의 전통 간의 관계를 복잡하게 만든다.
- 미디어의 역할: 미디어는 이러한 오해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 역사적 사실과의 괴리: 이러한 오해는 역사적 사실과의 괴리를 초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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