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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9  오후 8:07

 

검투사의 개요

  • 검투사는 고대 로마에서 유행했던 검투 대결에 출전하는 선수이다.
  • 현대의 프로레슬러 격투기 선수와 비유될 수 있다.
  • 검투사를 가리키는 라틴어 글라디아토르 검을 뜻하는 글라디우스를 다루는 사람을 의미한다.
  • 모든 검투사가 을 무기로 사용한 것은 아니며, , 도끼, 둔기 등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였다. 

 

검투사의 무기와 전투 방식

  • 검투사는 경기장에서 , 그물, 삼지창 등 무기를 들고 싸운다.
  • 그들은 야생 동물, 다른 검투사, 범죄자 등과 싸우는 격투가이다.
  • 검투사들이 싸우는 모습은 원형 경기장에서 유명하다.
  • 데스매치로 알려진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경기가 있지만, 모든 경기가 패자의 사망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검투 경기의 성격

  • 검투 경기는 스포츠로 발전하였으며, 단순한 싸움이 아닌 기획된 경기로 진행되었다.
  • 로마 사람들은 엄격하게 계약하고 경기를 기획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 경기는 스폰서 프로모션이 존재하며, 심판도 있었다.
  • 이러한 요소들은 단순 노예들의 막싸움과는 차원이 다른 경기를 만들어냈다.

검투사와 노예의 차이

  • 검투사는 신변의 자유가 적었다는 점에서 **'검노'**라는 번역이 더 적합하다는 주장도 있다.
  • 그러나 검투사 중에는 노예가 아닌 경우도 존재하였다.
  • 특히 로마 제국 후반기에는 검투사들이 인기를 얻게 되어, 연예인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 검투사들은 단순한 노예가 아닌, 사회적 지위를 가진 존재로 여겨졌다.

검투사의 사회적 지위

  • 로마 제국 후반기에는 유명 검투사들이 최상급 연예인 부럽지 않을 정도의 대접을 받았다.
  • 검투사들은 스포츠로서의 인기를 얻었으며, 그들의 경기는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다.
  • 검투사들은 명예 인기를 동시에 누릴 수 있었지만, 그들의 직업은 여전히 명예롭지 않다고 여겨졌다.
  • 검투사들은 로마 시민권을 온전히 누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제한적이었다.

검투 경기의 기획과 운영

  • 검투사 게임은 로마 사람들의 계약 기획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 경기는 규모, 기간, 참여 인원 등을 사전에 계획하였다.
  • 생사 불문의 경기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도 기획되었으며, 선수의 수준에 맞춰 대결이 이루어졌다.
  • 이러한 기획은 검투사들이 단순한 싸움이 아닌, 전문적인 경기로서의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검투사의 명예와 시민권

  • 검투사는 콤모두스와 같은 사례가 있더라도, 로마 시민권을 온전히 누릴 수 없었다.
  • 인기 있는 직업이었지만, 명예롭다고 보기 어려운 직업이었다.
  • 검투사들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들의 직업적 정체성은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 검투사들은 사회적 지위 명예를 동시에 추구했지만, 그들의 현실은 복잡하였다.

검투 경기의 유래 

  • 여러 가지 설: 검투 경기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존재한다.
    • 고대 그리스 역사: BC 1세기, 역사학자 니콜라오스는 검투 경기가 에트루리아의 제사 풍습에서 유래했다고 기록하였다.

에트루리아

 

  • 원시 인도유럽인의 유입
    • 원시 인도유럽인: 기원전 3000년경에 우크라이나 동부 초원이나 캅카스 북부 지역에서 유럽으로 유입된 민족이다.
    • Tyrsenian: 코카소이드이자 에트루리아인의 조상으로, 바스크인, 미노아인의 조상인 Vasconic, Eteocretan과 함께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8000년경부터 남서유럽에 농경 생활을 하며 거주하였다.
    • 신체적 특징:
      • 현대의 남유럽인이나 중동인처럼 검은색 계열의 곱슬머리를 가졌다.
      • 피부와 눈은 금발벽안인 사람에 비해 약간 까무잡잡하였다.
    • 기술적 발전:
      • 원시 인도유럽인은 위의 민족들보다 금속 도구를 가장 빨리 발명하였고, 전차를 가장 먼저 활용하였다.
      • 이로 인해 금발벽안이 유럽 전체에 퍼질 수 있었으며, 이들이 사용하던 언어는 고대에 멸종되어 바스크어만 현대에까지 전해진 상태이다.
    빌라노바 문화의 형성
    • 사료 부족: 기원전 900년기원전 700년부터 기원전 700년기원전 600년까지 이탈리아 반도 중북부에 있었던 빌라노바 문화에 대한 사료가 적고 기록이 확실하지 않아 논쟁이 많다.
    • 문화적 배경:
      • 빌라노바 문화는 이탈리아 중북부를 중심으로 성립된 초기 철기 시대 문화이다.
      • 이 문화는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300년~기원전 700년)부터 있었던 중앙 유럽의 언필드 문화의 분파로 여겨진다.

        언필드 문화(Urnfield culture)는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300년 경부터 기원전 700년경)의 온대 유럽 일대의 주요 문화이다. 영어로 유골함이 묻힌 들판이라는 뜻의 '언필드'(urnfield)라는 이름은, 죽은 자를 화장하고 그 유골을 항아리에 담아 밭에 묻는 이 문화 유적에서 발견된 관습에서 유래했다.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언필드 문화는 투물루스 문화를 이었고, 할슈타트 문화로 계승되었다. 일부 언어학자와 고고학자들은 이 문화를 원시 켈트어 또는 켈트 이전의 언어군과 연관시켰다.
        • 장례법:
          • 빌라노바 사람들은 이탈리아 반도에 철기 기술을 전수하였으며, 장례법으로 화장을 지냈다.
          • 시신을 태운 재는 **이중 원추 모양의 유골 항아리(biconical urn)**에 담아 묻었다.
          • 유골함은 토기 혹은 청동제로 제작되었다.
        • 문화의 영향: 빌라노바 문화는 에트루리아 문명이 근동, 그리스와 구별되는 독특한 요소를 가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 에트루리아인의 기원 논쟁
    • 역사적 기록: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에트루리아인은 아나톨리아의 리디아에서 유래한 종족으로 언급된다.
    • 디오니시오스의 주장: 디오니시오스는 에트루리아인이 이탈리아의 토착민족이라고 주장하였다.
    • 유전자 조사 결과:
      • 2007년의 유전자 조사 결과, 에트루리아인들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기근을 피해 이주해 왔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 이는 캅카스 등지에서 주로 확인되는 Y 염색체 하플로그룹 G의 비중이 높다는 데 근거한다.
    • 2013년 자료: 2013년의 mtDNA 분석 결과, 아나톨리아인과의 유전적 연관은 6~7천 년 전에나 있었으므로 에트루리아 문명과의 연관은 없다고 보았다.
    Y 염색체와 mtDNA의 차이
    • 해석의 차이: 두 해석의 차이는 Y 염색체에 의한 하플로그룹 분석 mtDNA에 의한 하플로그룹 분석의 성격 차이에서 발생한다.
    • 유전 방식:
      • Y 염색체는 부계로 유전되며, mtDNA(미토콘드리아 DNA)는 모계로 유전된다.
    • 성별 역할:
      • 임신과 육아 등의 문제 및 신석기 시대 이후 사냥-채집 역할의 분화로 인해 정복이나 이주 등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일반적으로 남성이다.
      • 따라서 Y 염색체 자료는 정복이나 이주 등을 더욱 민감하게 반영하는 반면, mtDNA 자료는 비교적 보수적이고 토착적인 성향을 많이 반영한다.
    • 하플로그룹 R 계통: 유럽에서 순동기~청동기 시대 이주해온 하플로그룹 R 계통의 Y 염색체 자료에 비해 mtDNA 자료는 신석기 시대 이후 정착한 토착 유럽인의 체질을 더욱 많이 반영한다.
    정복자와 토착민의 관계
    • 상반되는 자료: 두 자료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수의 외래 정복자가 우위를 점하였으되 실제 구성원 다수는 토착민이었다는 해석을 지지하는 상보적인 자료일 수 있다.
    • 언어 자료의 현황: 이러한 해석은 아래 언어 자료의 현황과도 부합하는 면이 있다.

 

 

 

 

 


 

  •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한 세대 후, 그는 BC 310년에 캄파니아 삼니움에 대한 승리를 자축하는 의미에서 검투 경기가 시작되었다고 기록하였다.
    현재의 이해: 현재는 로마식 검투 경기가 캄파니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 있다.

 

 


검투사의 자격과 변화

  • 자격 조건: 검투사가 되는 데 특별한 자격 조건은 없었다.
    • 초창기: 포로나 노예가 주로 검투사로 훈련되었으며, 이들은 서로 죽고 죽이는 경기를 하였다.
    • 일반 시민의 참여: 시간이 지나면서 일반 시민들도 검투사로 자원하여 프로모터와 계약을 맺고 직업으로 삼았다.
    • 귀족 자제의 참여: 심지어 귀족 자제들도 검투사로 활동하는 경우가 있었다.
  • 계약 선수: 자유민 검투사는 계약 선수로서 모든 조건을 알고 상호 합의한 후 경기에 나갔다.

검투사의 사회적 지위

  • 검투사의 인식: 실력 좋은 검투사는 현대의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와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 폼페이의 예: 폼페이에서 셀라두스라는 트라키아인에 대한 여성들의 사모하는 낙서가 발견되었다.
    • 여성 팬: 이는 검투사가 여성 팬을 거느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파르타쿠스 반란과 검투사

  • 검투사의 삶: 제정 이전의 검투사들은 노예 출신으로, 자유민 출신의 후대 검투사들에 비해 비참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 스파르타쿠스 반란: 이 반란을 일으킨 검투사들은 로마군을 격파하고, 생포한 로마군 포로들에게 자신들이 당했던 검투 경기를 시켜 복수하였다.
    • 추모식: 이러한 경기는 복수뿐만 아니라 전사자들에 대한 추모식의 성격도 가졌다.
  • 원로원의 반응: 원로원은 이러한 추모 경기에 대해 분노하였다.

 

제정 후 검투사의 생활

  • 생활의 변화: 제정 후대의 검투사들의 생활은 제정 이전에 비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 연예인 취급: 검투사는 연예인으로 취급되었으나, 로마 사회에서 배우와 연예인은 최하층 천민으로 여겨졌다.
    • 사회적 지위: 검투사의 신분도 다르지 않았으며, 현대의 연예인과 유사한 처우를 받았다.

검투사와 사회적 인식

  • 연예인의 사회적 위치: 현대에서도 성공한 스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연예인은 사회 최하층으로 여겨진다.
    • 한국의 직업별 평균소득: 한국의 직업별 평균소득 리스트에서 연예인은 최하위를 차지하고 있다.
  • 서약서: 검투사는 지원할 때 위 인용구와 같은 서약서에 서명해야 하며, 이는 스스로를 타인의 종으로 낮추고 시민권의 권리를 포기하는 선언과 같다.

검투 경기의 의식적 의미

  • 의식적 기원: 검투 경기는 제사 의식에서 유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 추모 경기: 검투 경기는 종종 추모 경기나 처형식 행사로 치러졌다.
    • 인신공양 풍습: 이러한 점에서 검투 경기를 인신공양 풍습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검투 경기의 금지 배경

  • 서기 325년: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검투 경기를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로마 콘스탄티누스 대제 동상, 13m 실제 크기로 재탄생
  • 기독교의 국교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검투 경기는 잔인함 부도덕성으로 인해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 사회적 반응: 검투 경기가 줄어드는 것에 대한 관중의 열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 검투사의 직업적 정체성: 검투사들은 정부의 탄압으로 경기를 그만두고 나가더라도, 검투 기술 외에 배운 것이 없어 생계 유지를 위해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검투사의 생존과 복귀

  • 검투사의 생계: 검투사들은 도적이 되기보다는 검투사로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 은퇴의 반복: 검투사들은 여러 차례 은퇴를 시도하였으나, 결국 다시 경기에 복귀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 사회적 압박: 검투사들은 외부에서의 생존이 어려워 검투사로서의 삶을 지속하는 경향이 있었다.
  • 검투사의 정체성: 검투사로서의 정체성이 그들의 생존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검투사의 위험과 부상

  • 부상의 위험: 검투사들은 마지막 경기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 은퇴와 부상: 검투사들은 은퇴를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부상으로 인해 경기를 마감하는 경우가 많았다.
  • 검투사의 삶의 비극성: 검투사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오락이 아닌, 생존 위험이 얽힌 복잡한 삶을 반영한다.
  • 사회적 인식: 이러한 부상과 사망 사건은 검투사 직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요소가 되었다.

경기 규정의 변화

  • 4세기 이후 규정 변화: 상대의 몸에 상처만 내면 무조건 승리하도록 규정이 변경되었다.
  • 저항 포기의 금지: 정당한 이유 없이 저항을 포기한 상대를 죽이는 것이 금지되었다.
  • 직업적 위험 감소: 이러한 규정 변화로 인해 검투사의 직업적 위험이 다소 줄어들게 되었다.
  • 경기 규정의 사회적 영향: 규정의 변화는 검투사들의 생존 방식과 경기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황제의 금지령과 현실

  • 금지령의 발효: 로마 황제들은 검투 경기를 금지하는 법령을 반포하였다.
  • 묵인과 현실: 실제로는 금지령이 시행되더라도 수위만 완화되면 묵인하는 일이 많았다.
  • 경제적 요인: 대중의 구매력이 떨어지면서 검투사를 유지할 수 있는 거액의 스폰서가 줄어들게 되었다.
  • 검투사의 자연적 소멸: 이러한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검투사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었다.

검투 경기의 사회적 영향

  • 로마 사회에서의 역할: 검투 경기는 로마 사회에서 중요한 오락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다.
  • 잔인함과 도덕적 문제: 검투 경기는 그 잔인함과 도덕적 문제로 인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 사회적 반응: 검투 경기에 대한 사회적 반응은 긍정적이지 않았으며, 이는 경기가 줄어드는 원인이 되었다.
  • 문화적 유산: 검투 경기는 로마의 문화적 유산으로 남아 있으나, 그 잔인함 때문에 비판받기도 하였다.

검투사의 잔혹한 직업

  • 검투사는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데스매치를 벌이는 잔혹한 직업이다.
  • 일반적으로 검투사에 대한 인식은 잔혹함 폭력성으로 가득 차 있다.
  • 모든 경기에서 패자를 죽이는 것은 아니지만, 사망자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초기 검투 경기의 특징

  • 공화정 초기에는 전쟁포로들이 많아 검투사로 양성할 자원이 풍부했다.
  • 이 시기의 검투 경기에서는 무자비하게 패자를 죽이는 경향이 높았다.
  •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패자를 무조건 죽이는 검투 경기를 금한다."**라는 칙령을 내렸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 관중들은 사망자 없는 경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경기가 흥미롭지 않으면 패자가 죽는 경우가 많았다.

 

검투사의 사망률 통계

  • 검투사들의 사망률은 통계적으로 매우 높았다.
  • 평균적으로 한 번의 검투 경기를 치를 때마다 최소 20명의 검투사가 사망했다.
  • 100명의 검투사가 투입될 경우, 1/5인 20명이 사망하는 것은 상당히 높은 수치이다.
  • 신참 검투사는 보통 1년 내로 사망하며, 운이 좋더라도 3년 안에 대부분 사망하는 경향이 있다.

신참과 베테랑의 대결

  • 로마인들은 베테랑 검투사가 신참을 상대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죽이는 것을 싫어했다.
  • 검투사는 비슷한 실력대의 검투사와 싸우는 것이 원칙이었다.
    • 신참이 뛰어난 재능을 보일 경우, 베테랑과 대결할 수 있지만 대개는 신참끼리, 베테랑끼리 붙는 경우가 많았다.
  • 베테랑 검투사는 몸값이 높고 양성 기간이 길기 때문에, 서로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관중의 결정권과 황제의 권한

  • 검투 경기의 패자를 처분하는 것은 관중이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 관중이 경기가 재미없다고 판단하면 패자는 살아남지 못했다.
  • 반대로, 경기가 스릴 있고 재미있었다면 관중들은 검투사를 살리려고 했다.
  • 최종적으로 패자의 생사 여부는 황제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황제의 잔혹함과 예외

  • 검투사들에게 어떤 황제를 만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 칼리굴라 황제는 승리한 검투사들을 다른 양성소에 팔아버렸다.
  •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패배한 검투사의 목을 치도록 명령한 이유가 죽는 순간의 표정을 궁금해했기 때문이었다.
  • 티투스 황제는 두 검투사가 동시에 항복하자, 쌍방 모두의 승리로 판정하여 자유를 주었다.
예루살렘 정복자 티투스 황제의 자비

 

로마 제국의 검투사 변화

  • 4세기 즈음 로마 제국이 서서히 몰락하면서 검투사로 공급할 노예가 거의 없었다.
  • 대부분의 검투사는 자유민으로, 사망자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 승패의 조건은 상대방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으로 완화되었다.

검투사의 실력과 훈련

  • 검투사는 로마에서 최고의 검술 실력과 싸움 기술을 가진 존재들이다.
  • 검투사들은 온전히 싸움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며, 군단병과는 달리 다양한 잡다한 기술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 이들의 검술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현대의 맨손 격투기 선수와 현역 군인/경찰의 차이와 유사하다.

훈련 프로그램의 구조

  • 검투사들은 목검으로 나무를 타격하는 기초적인 기술 훈련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체력 훈련을 진행하였다.
  • 훈련은 4일 주기로 돌아가며 매일 훈련량이나 방식을 다르게 하였다.
    1. 첫날: 고강도 훈련, 짧은 시간의 웜업
    2. 둘째 날: 고강도 장시간 체력훈련
    3. 셋째 날: 휴식
    4. 넷째 날: 중강도 훈련
  • 훈련 프로그램은 선수들의 체력 배분에 신경을 써서 설계되었다.

근력 훈련의 방법

  • 근력 훈련의 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땅파기
    • 무거운 물건 들기 및 들고 걷기
    • 로프 오르기
    • 줄 및 대들보 타기
    • 중량을 들고 팔을 올린 상태에서 다른 사람이 밀어대는 것을 버티기
  • 이러한 훈련은 근력 향상에 중점을 두고 진행되었다.

스피드 훈련의 기법

  • 스피드 훈련의 기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 뛰기와 펀치백 치기
    • 공을 들고 뛰기
    • 섀도 복싱
    • 팔과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는 연습
  • 제자리 뛰기 훈련도 포함되어 있으며, 발끝으로 선 상태에서 팔의 전후 왕복 속도를 빠르게 하거나 제자리에서 팔다리를 빠르게 왕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훈련 기구와 장비

  • 훈련을 위해 사용된 운동 기구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할테레스(Halteres): 그리스식 덤벨
    • 자연석 또는 암석에 손잡이용 구멍을 뚫어 훈련에 사용
    • 100kg가 넘는 훈련용 암석이 발견된 사례도 있다.
    • 모래 주머니와 현대 기계체조의 안마(pommel horse)와 유사한 기구도 사용되었다.
  • 다양한 움직임을 선보이기 위해 공을 이용한 훈련 방법도 포함되었다.

검투사의 군사적 활용

  • 검투사들은 실력과 충성심이 뛰어나 황제들에 의해 군사적으로 활용되었다.
  • 은퇴한 검투사들은 근위대에 채용되거나 내전 시 검투사 부대를 조직하여 투입되었다.
  • 예를 들어, 공동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는 검투사들을 소집하여 위기에 처한 아퀼레이아를 구했다.

검투사들의 경기 구조

  • 검투사들의 전투는 실전에 가까운 형태로 진행되었다.
  • 경기는 조 추첨에 의해 결정되며, 관중이나 검투사들은 싸울 상대를 경기 날짜가 오기 전까지 알 수 없다.
  • 검투사들은 평소 훈련 중에 상대의 기술이나 실력을 눈여겨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로마 정규군과의 대결

  • 로마의 정규군과 검투사가 겨루는 경우도 있었으며, 이때 로마 정규군이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 로마 정규군은 단체 전술에 중점을 두고 훈련하였기 때문에 1:1 대결에 대한 훈련이 부족하였다.
  • 만약 백인대장과 검투사 100명이 동시에 싸운다면, 정규군 쪽이 유리할 것이라고 평가된다.

베스티아리의 정의와 역할

  • **베스티아리(Bestiarii)**는 동물과 싸우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 글래디에이터는 사람과 싸우는 직종만을 포함하므로, 베스티아리는 글래디에이터로 취급되지 않는다.
  • 이들은 주로 원형 경기장에서 활동하며, 동물과의 전투를 통해 관중의 흥미를 유도하였다.
  • 베스티아리는 제국 각지에서 잡아온 희귀하고 위험한 맹수들과 싸우는 역할을 맡았다.

 

 

경기장에서의 전투 방식

  • 베스티아리는 오전 시간에 싸움을 진행하였다.
  • 이 시간 동안 동물끼리의 싸움도 함께 벌어졌다.
  • 경기장은 관중들에게 극적인 장면을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가 설치되었다.
  • 이러한 전투는 관중의 환호를 받기 위해 더욱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베스티아리의 무장과 전투

  • 베스티아리는 활, 창, 횃불, 갑주 등으로 단단히 무장하였다.
  • 이들은 스코틀랜드산 사냥개들을 대동하여 맹수들과 대결하였다.
  • 대개 베스티아리가 유리한 상황이었으나, 동물이 이길 확률도 존재하였다.
  • 관중들은 짐승을 죽이는 장면과 함께 베스티아리가 죽는 장면도 보고 싶어하였다.

관중의 기대와 베스티아리의 용기

  • 베스티아리는 상금과 명예를 위해 싸우며, 용기의 증명으로 여겨졌다.
  • 젊고 용맹한 사내에게 베스티아리 역할이 권장되었다.
  • 네로나 콤모두스는 직접 베스티아리로 나서서 맹수들을 물리친 사례가 있다.
  • 이러한 상금 경기를 위한 훈련 교실도 존재하였다.

 

콤모두스의 전투와 묘기

  • 로마 황제 콤모두스는 검투사질을 취미로 삼았다.
  • 그는 강력한 동물들을 하루에 100마리씩 잡아내는 능력을 보였다.
  • 콤모두스는 세쿠토레의 갑옷을 입고 전투에 임하였다.
  • 그의 사격술은 매우 뛰어나며, 타조를 활로 쏘아 맞히는 기록도 있다.

 

Damnatio ad Bestias의 개념

  • Damnatio ad Bestias는 중범죄자를 맹수와 싸우게 하는 형벌이다.
  • 이 형벌은 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자들에게 적용되었다.
  • 죄수들은 맨몸으로 경기장에 내몰려 맹수의 한끼 식사로 처형되는 경우가 많았다.
  •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이 형벌은 폐지되었다.

 

안드로클레스의 이야기

  • **안드로클레스(Androcles)**는 도망 노예로, 사자와 친구가 된 이야기이다.
  • 그는 사자의 발에서 가시를 빼주고 친구가 되었다.
  • 로마로 이송된 후, 안드로클레스는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 경기장에서 사자가 그를 잡아먹으려 하지 않자, 칼리굴라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석방하였다.

녹시다와 죄수 검투사

  • 녹시다는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죄수들로 구성된 검투사이다.
  • 이들은 일반적인 검투사와는 달리, 생존을 위한 싸움을 강요받았다.
  • 녹시다는 베스티아리와 유사한 역할을 하였으나, 주로 죄수들로 구성되었다.
  • 이들은 경기장에서 잔혹한 처형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베나토레스의 역할

  • **베나토레스(Venatores)**는 야수와 싸우는 사냥꾼이다.
  • 이들은 정면 대결이 아닌 사냥을 보여주는 역할을 맡았다.
  • 베나토레스는 사람과 싸우지 않으므로 글래디에이터로 취급되지 않는다.
  • 이들은 경기장에서 사냥의 묘미를 관중에게 제공하였다.

여성 검투사에 대한 문헌적 기록

  • 여성 검투사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부족하다.
    • 로마 시대의 문헌 기록은 주로 남성의 미덕을 강조하는 내용이 많았다.
    • 여성의 검투 경기는 남성의 미덕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기록이 적었다.

로마 사회의 여성 검투사 인식

  • 로마 사회에서 여성 검투사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었다.
    • 남성 식자층은 여성의 검투 경기를 경시하고 비난하였다.
    • 여성의 참여는 남성의 전통적인 가치관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유베날리스의 풍자시

  • 유베날리스의 시는 당시 여성 검투사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 "여성 검투사들은 모든 훈련을 경험했고, 플로라 축제에서 트럼펫을 불 가치가 있지만 더 큰 꿈을 가지지 않고, 아레나에 나타나기를 원하지만 않는다면 정숙한 부인들이다."
    • 여성 검투사에 대한 기대와 비난이 동시에 담겨 있다.

여성 검투사에 대한 비난

  • 여성 검투사에 대한 비난은 여러 지식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 철학자 세네카와 역사학자 카시우스 디오 등은 여성의 검투 경기를 비난하는 기록을 남겼다.
    • 후대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여성 검투사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고고학적 발견과 여성 검투사

  • 여성 검투사에 대한 정보는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밝혀졌다.
    • 문헌 기록이 부족한 상황에서 고고학적 발견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템즈 강 유역의 할라카르나소스에서 발견된 두 여성 검투사의 시체와 장비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여성 검투사의 이름과 신화

  • 여성 검투사의 이름은 아마존과 아킬리아로 알려져 있다.
    • 이들은 상위 랭크의 검투사로, 당시 여성 검투사에게도 등급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 이들의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으며, 두 사람 모두 살아남았다.

여성 검투사 양성소의 존재

  • 여성 검투사를 전문으로 양성하는 곳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콜레기아 이우베눔'과 '루두스 마그누스'에서 여성 훈련 공간이 발견되었다.
    • 그러나 이러한 공간은 흔하지 않았고, 드물게만 운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성 검투사의 위상과 자료 부족

  • 여성 검투사에 대한 자료는 여전히 부족하다.
    • 함부르크에서 발견된 여성 검투사상은 상의 탈의 상태로 나타났다.
    • 이는 여성 검투사가 성적 대상으로 취급되었음을 시사하지만, 하급 여자 검투사를 묘사한 것일 수도 있다.

여성 검투사에 대한 문학적 언급

  • 여성 검투사는 문학에서도 언급된다.
    • 로마 시대를 다룬 소설 **《폼페이 최후의 날》**에서는 여성 검투사 출신의 조역이 등장한다.
    • 이는 여성 검투사가 실존했음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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