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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제3공화국의 수립과 혼란
- 독립과 제3공화국 수립:
- 필리핀은 1946년 7월 4일에 독립하여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 그러나 정관계 유착이 심해지면서 민중들은 공산당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 정치적 혼란:
- 이 시기에는 좌익 무장투쟁과 군부세력의 대두로 인해 정치상황이 혼란스러웠다.
- 이는 냉전기의 전 세계적인 흐름과 관련이 있으며, 많은 국가들이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었다.
- 잠재적 악재 요인:
- 필리핀은 산업 구조, 지주 세력, 분열 위험 등 여러 잠재적 악재 요인을 가지고 있었다.
- UN과의 관계:
- 1950년 6.25 전쟁 발발 시, 필리핀은 UN의 정신적 가치에 부합하여 파병을 결정하였다.
- 필리핀은 유일한 아시아 국가로서 기독교 국가이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하였다.
6.25 전쟁과 필리핀의 참전
- 전쟁 발발과 UN의 역할:
-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UN 안전보장이사회가 개최되었다.
- 필리핀은 국가 사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파병을 결정하였다.
- 참전 국가:
- 파병국들은 미국을 위시한 개신교 뿌리를 가진 자유진영 국가들이었다.
- 구 스페인 식민지였던 가톨릭 국가들 중에서는 콜롬비아와 필리핀만이 전쟁에 참전하였다.
- 필리핀의 의의:
- 필리핀은 기독교 국가이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 유일한 아시아 국가로서의 의의가 있다.
6.25 전쟁 미군과 사진을 찍고있는 필리핀군, 전통 칼 중 하나인 Bolo를 들고 있다.
- 필리핀은 기독교 국가이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 유일한 아시아 국가로서의 의의가 있다.
필리핀군의 전투와 희생
- 전투 상황:
- 6.25 전쟁 발발 후, 한국에 파병된 필리핀군 900여 명은 율동 전투에서 4만명의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격퇴하였다.
- 6.25 전쟁 발발 후, 한국에 파병된 필리핀군 900여 명은 율동 전투에서 4만명의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격퇴하였다.
- 전투 전략:
- 필리핀군은 다른 UN군이 후퇴할 때 남아 중공군의 발을 최전방에 붙잡아 두었으며, 백병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 필리핀군은 12명만 전사하고, 중공군 공세가 잦아들자 잃어버린 지역을 되찾기 위해 북쪽으로 진격하려 했다.
- 유엔군사령부의 명령:
- 유엔군사령부는 필리핀군에게 남쪽에 포위될 위기에 처한 미 1군단과 9군단의 부대들을 도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필리핀의 정치적 혼란과 이민
- 이민 현상:
- 이 시기는 필리핀계 미국인들이 정상적 방법으로 미국에 이민을 가던 시기였다.
- 필리핀계의 대규모 미국 이민은 20세기 초반부터 시작되었으며, 1965년 아시아인 이민 금지 개정 이전부터 이민이 이루어졌다.
- 정치적 상황:
- 필리핀의 국운은 내리막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여러 전쟁과 정치적 혼란이 얽혀 있었다.
- 정치와 외교 노선의 혼란과 내전 상황이 필리핀의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정치적 공백과 대지주 권력 강화
- 정치적 공백:
- 필리핀 정치의 공백을 지방 대지주들이 차지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 이로 인해 필리핀은 과두정 형태로 돌아갔다.
- 대지주층의 반공 정책:
- 대지주층들은 반공을 확실히 하여 필리핀을 친미국가로 만드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 그러나 토지개혁과 멀어지면서 전근대 스페인 제국 시절부터 존재하던 대지주들의 권력이 유지되었다.
중산층 붕괴와 민주주의 악화
- 중산층의 붕괴:
- 전통적으로 필리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중산계층의 붕괴는 타격이 컸다.
- 이는 전후 복구 및 정국 수습과 필리핀 민주주의의 악화에 영향을 미쳤다.
- 정치적 혼란의 원인:
- 필리핀은 여러 전쟁을 겪으면서 정치적 혼란과 내전 상황이 얽히게 되었다.
- 문맹률이 높던 시절에 중산층의 붕괴는 필리핀의 정치적 안정성을 해치는 요인이 되었다.
마르코스 정권의 시작과 독재
- 초대 대통령과 후계자:
- 초대 필리핀 대통령은 로하스였으나 재임 2년 만에 사망하였다.
- 그 후 키리노가 대통령이 되었으며, 대미협조를 근본 정책으로 삼았다.
- 마르코스의 정치적 경로:
- 라몬 막사이사이가 대통령이 되었고, 그는 공산주의 게릴라를 진압하였다.
- 이후 카를로스 P. 가르시아와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이 대통령직을 거쳤다.
마르코스의 권력 강화와 탄압
- 계엄령 선포:
- 마르코스는 재임 2기 중반부터 1972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하였다.
- 반공을 내세워 야당 인사들과 무슬림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 무장세력의 반란:
- 필리핀 공산당이 조직한 **신인민군(NPA)**과 모로족의 무장 독립투쟁 단체가 마르코스를 압박하였다.
- 마르코스는 1981년에 계엄령을 풀었으나 부정선거로 3선에 성공하였다.
(신인민군(NPA)은 1960년대부터 필리핀 정부에 맞서 싸운 공산주의 게릴라 집단인 신인민군을 가리킨다. 필리핀 공산당(CPP)의 군사 조직이며, 이 나라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좌파 반군 집단 중 하나로 여겨진다. NPA의 주요 목표는 필리핀 정부를 전복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들은 다양한 갈등과 테러 활동에 연루되어 필리핀에서 장기 반란을 일으켰다.)
니노이 아키노 암살과 반정부 운동
- 니노이 아키노의 귀국:
- 1983년, 니노이 아키노가 미국 망명 생활을 끝내고 귀국하자마자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 이 사건은 국내외에서 반마르코스 여론을 촉발하였다.
- 국민들의 시위:
- 국민들은 반마르코스 투쟁을 벌였고, 마르코스는 1986년 초에 대통령 선거를 앞당겨 치렀다.
- 부정선거로 코라손 아키노 후보를 이겼으나, 국민들은 이에 불복하였다.
마르코스 정권의 붕괴와 민주화
- 경제 성장과 정치적 불안:
- 마르코스 시절 필리핀의 경제는 꾸준히 성장하였으나,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입지가 약해졌다.
- 베니그노 아키노 암살 사건 등으로 인해 경제 성장이 하락세로 돌아섰다.
- 민주화 과정:
- 마르코스가 망명한 후,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민주화에 기여하였다.
- 반정부 인사들을 대거 사면하고 대통령의 임기를 6년 단임제로 제한하였다.
최근 정치적 변화와 두테르테
-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당선:
- 2016년 5월 대선에서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당선되었다.
- 그는 과격한 방법으로 필리핀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 기념일과 외교 관계:
- 2021년에는 필리핀 탄생 500주년 기념일이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 필리핀은 미국과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을 맺어 미군 주둔을 다시 허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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